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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8:30-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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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8장 30절-35절: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마침 거기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하신대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 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치던 자들이 그 된 것을 보고 도망하여 성 내와 촌에 고하니 사람들이 그 된 것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아래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진리 인격화란 잘 참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자기를 잘 다스려 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지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일수록 자기의 마음을 거울처럼 잘 닦아놓는다. 진리 인격화로 안 되었으면 다른 사람의 허물을 자기 입에 늘 물고 있는데,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이 또 자기의 허물을 물고 씹게 된다. 이런 사람에게는 악하고 더러운 성격 성질의 귀신이 붙을 가능성이 많다.
더러운 귀신에게 한 번 붙들리면 흉악한 짓을 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꾸 광야로 나가게 된다. 이런 사람은 마음이 진리의 말씀 안으로 안 들어오고 자꾸 세상을 바라보면서 교회 쪽으로는 자꾸 원망과 불평이 생긴다. 마음이 하나님 앞으로 모아지는 게 아니라 자꾸 세상으로 나간다. 광야로 나간다는 말은 버림을 받는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사람이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으면 되겠느냐?
그런데 예수님께서 귀신들의 간구를 들어주는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 우리로 ‘사람을 선택하느냐, 짐승을 선택하느냐’ 하는 선택을 바로 하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신앙사상적인 차원에서 돼지처럼 육적으로 키우지 말라는 뜻이다. 세 번째는 군대귀신 영웅귀신이 들린 자들의 결과를 알게 해 주려고이다. 군대귀신은 영웅귀신이 든 것이다. 사명감을 받았다고 하고,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고.
그런데 귀신들이 무저갱을 무서워하는 이유가 뭘까? 왜 무저갱을 겁을 내고 벌벌 떠는 것일까? 무저갱이란 끝이 없는 매우 깊은 곳, 뚜껑은 닫혀져 있고 바닥은 없다. 바닥이 없으니까 위로는 못 올라오고 아래로 아래로 한없이 내려가는데, 이곳은 시간을 측정할 수도 없다. 하나님이 위는 닫아버렸다. 또 무저갱을 지옥 또는 죽은 자들이 가는 곳이라고도 한다. 무저갱을 지옥이니 뭐니 하며 어떻게 말하더라도 그곳의 성격이나 성질을 모르면 모르는 거다. 지옥이라는 말은 알지만 지옥의 맛을 모르는 거다.
어쨌든 무저갱의 뚜껑은 닫혀있으니 그곳에서는 상승은 안 된다. 올라올 수는 없다. 성장적이고 건설적이고 위로 솟구치는 사상은 없다. 막혀버렸다. 그러나 아래로는 마음대로 갈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이 아래로 아래로 계속 내려가면 어떻게 되겠느냐? 지금 그런 마음을 정신을 표현하려고 무저갱이라는 용어를 들고 나온 것이다. 귀신들이 무저갱을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무저갱에 집어넣거나 무저갱에 빠지면 나오는 활동을 못하게 된다.
이것은 귀신에게만 해당되는 말인가? 은밀히 들여다보면 모두 우리를 위해 하시는 말씀이다. 계:에 보면 귀신들이 노는 큰 성 바벨론이 있는데,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고 했다. 그곳에 귀신들만 논다면 우리에게 그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문제다. 그래서 그 말씀을 하는 것이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 하는 것은 ‘귀신들의 소굴에서 나오라’ 하는 것이다. 사람이 문제라서 계:에서 귀신들의 집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도 귀신들린 교회가 많다. 말하자면 거짓목자는 마귀에게 잡힌 것이다. 그런 거짓목자에게 귀신의 활동은 당연한 것이다. 그건 아예 깔고 들어간 거니까.
귀신들이 자신들을 무저갱에 넣지 말라고 하는 것은 미련한 인간들은 귀신들보다도 뭘 모른다 그 말이다. 귀신들은 무저갱을 엄청나게 겁을 내는데 미련한 인간들은 이게 뭔지를 모른다. 귀신들은 결국은 무저갱에 들어가겠으나 지금 이 말의 의미는 귀신들이 자기들의 활동중단을 무서워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생명적 활동이 중단되는 것이 무서운지, 아니면 기쁜지?
기독자들이 무저갱의 정신 사상을 아는가? 무저갱 사상의 가르침들을 아는가? 천국에 갈 영능의 실력을 준비를 해야 할 천국백성들에게 교회에서 세상과 세상 것을 소원 목적하여 가르치는 건 무저갱 사상들이다. 또한 군대귀신이며 모두 영웅성이 들어있다. 여기는 무저갱이 바탕이 없듯이 그리스도의 기초, 정신, 사상이 없다. 그런 가르침은 허망한 가르침이다. 바탕이 없으니 설 수가 없다. 바탕이 있어야 쌓으면서 올라가든지 말든지 하는 건데 바탕이 없으니 안 된다.
세상 불탈 것을 구하는 허황된 욕심들은 사람이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니 이런 교훈은 생명적 활동이 아니다. 그래서 무저갱의 정신 사상을 가르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들은 마귀니라’ 그렇게 책망을 하신다.
무저갱의 정신 사상에 빠진 자들은 자기가 어디에 빠져있는 줄을 모른다. 가르쳐 줘도 모르는 것은 머리 위의 뚜껑이 닫혀서이다. 예수님을 1년을 믿었던 10년을 믿었던 제발 뚜껑이 열려서 하늘 위의 것을 소원 목적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 성격 성질을 못 고치면 자기 눈에 안 들면 틀어지게 미련이다. 이러면 시험에 걸린다.
교회가 잘못됐으면 잘못된 그 교회에서는 나오고, 방편은 어떻게 됐건 그 교회의 교훈이 옳은 것이라면 그 옳은 교훈에서 신앙성장이 되라고 방편을 이렇게 저렇게 쓰는 것이니 그런 것을 가지고 탓을 하면 안 된다. 누구든지 방편적인 면은 같지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질로 나간다면 거기에서 배우고 듣고 하나님의 것을 잘 받으면 또 자기가 가르칠 때는 또 다른 방편이 나오는 것이다. 진리 깨달음은 안 받고 방편에 머물러서 왈가왈부하면 그 사람은 벌써 발뒤꿈치를 든 것이다. 마음이 떴다.
사람이란 처음부터 잘 믿을 수는 없다. 우리도 다 예수를 모르는 이방인이었었다. 물론 사람마다 신앙의 깊이가 다르고 살다가 보면 시험도 들고 하는데, 남자고 여자고 간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만 권고할 사람이 따로 있고 책망할 사람이 따로 있는 거다. 주일날 부득이 하게 예배에 빠질 것 같으면 ‘목사님, 이래서 못 갑니다’ 하면 되는 거다. 그러면 그 사정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앙생활이 모범도 안 되고, 말없이 빠져나가고, 가족 중 하나가 아프면 온 가족이 다 빠지고. 이건 우리교회에서는 용납이 안 된다.
우리교회가 마음이 안 들면 딴 데로 가면 되는 거다. 그러나 옮겨간 교회에서 하나님 앞에 바로 해야지 옮겨간 교회에서도 여기서 다니던 그 정신을 가지고 다니면 그건 어디를 간들 누가 그 신앙의 꼴을 봐주겠느냐? 인본주의 교회에서도 그런 사람은 안 봐준다. 도둑의 세계에서도 충성봉사를 잘해야 도둑의 세계에서도 알아주지 도둑질도 안 하고 피둥피둥 놀고 있으면 그런 자를 올려주느냐? 어디를 가든 옳은 것을 붙잡았으면 옳은 것을 붙잡고 냅다 달려라. 달리면 잘한다고 박수를 쳐준다.
성경이 말하는 것이지만 절대로 이방여인을 취하지 말아라. 이방남자를 취하지 말아라. 성경에 이방여자를 취했더니 그 자식들이 아람 방언만 하고 이스라엘 말은 못한다. 이게 무슨 꼴이냐? 안 그런가 봐라. 하나님의 심판이 무서운 거다.
32절-33절: 귀신들이 예수님께 ‘우리가 저 돼지에게 들어가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래, 너 말 잘했다. 그러면 들어가라’ 했다. 귀신들 입장에서는 무저갱에 들어가기는 무섭고 싫고 해서 ‘돼지에게로 들어가겠습니다’ 한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볼 때는 귀신들이 예수님에게 말을 참 잘한 것이다.
산에서 키우는 돼지는 고급에 속한다. 높은 곳에서 키우는 돼지이니까. 산 밑에는 호수가 있다. 그러니까 돼지들이 목욕하기도 좋다. 여름에는 호수 쪽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겨울이 되면 돼지 방에 스팀도 넣어주고. 요즘은 돼지를 키우는데 음악도 틀어준다고 한다. 영양사가 있어서 식사시간이 되면 제 때에 영양을 골고루 주고, 전염병 예방주사도 놔주고, 또 아무렴 짐승이다 보니 사람이 천상 짐승의 때밀이가 돼야 한다. 그리고 돼지가 결혼 적기가 되면 주인이 알아서 신혼 방을 꾸며준다. 그러니까 문화시설이 없는 저 시골 산골짜기에 처박혀 사는 돼지는 산에서 사는 돼지를 보고 날마다 심통을 부린다.
거라사인의 산에서 사는 팔자가 늘어진 돼지가 되고 싶은 사람이 있느냐? 그러니까 시설도 굉장히 좋고 스팀도 잘 나오고 목욕도 날마다 할 수 있으니까 이거는 별장이다. 이런 별장에서 살고 싶으냐?
돼지가 주인의 눈에 사랑스러워지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살만 많이 찌면 된다. 그러면 값은 잘 쳐준다. 그러니까 귀신이 그런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한 것은 말을 참 잘 했다. 지금 돼지라서 그렇지 자기는 그런 곳을 미래적으로 꿈을 안 꿨느냐? ‘내가 시집가면 호수 옆에 별장을 짓고 사시사철 바람 쐬러 가고, 호수에 오리 배를 띄워 타고 놀고’ 하는 이런 꿈을 안 꿨느냐? 그게 나쁘다가 아니라 그런 꿈은 다 헛꿈이라는 것이다. 이런 꿈을 꿨으니 이제는 실현될 날만 기다리면 되는 게 아니냐?
‘너 말 잘 했다. 그래, 돼지에게로 들어가라.’ 수많은 군대귀신들이 돼지 떼들에게 들어가니 그 돼지 떼들이 눈알이 뒤집어진다. 갑자기 함성을 지르면서 가파르고 경사진 호수를 향해서 서로 일등을 하려는 듯이 그냥 돌진이다. 이 장엄한 행진을 누가 막을 수 있느냐? 못 막는다. 막다가는 자기도 밟혀 죽는다. 그것을 멈추게 하려고 그 가운데 섰다가는 그야말로 그거는 순교가 아니라 개죽음이다.
이 좋은 진리를 노회나 총회에 가서 외치고 싶으냐? 개죽음이 되려면 그렇게 하라. 그런 건 순교가 아니다. 순교는 예수 믿은 사람이 어떤 사건에서 죽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을 위한 자타의 이룰구원의 활동에서 죽어져야 그게 순교이다. 또 그렇게 살다가 자연생명을 다하고 죽으면 순생애이다. 이 순생애는 순교와 같은 것이다. 왜 그런가 하니 순교의 사건은 주님이 주시는 건데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 순교의 사건을 안 줘서 그렇지 순교의 사건만 준다면 이 사람은 얼마든지 순교를 하게 된다.
그러면 나에게 순교의 사건을 달라고 하면 주는 거냐? 그렇지 않다. 그러나 이룰구원의 신앙사상은 순교적 각오를 가지고 나가는 것이다. ‘내가 주를 위해서 죽겠다’ 그 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제물이 되는 거다. 사람 속이 세상화로 되어있는데 주를 위해 죽겠나이다? 아이고, 너나 잘 하라. 그런 것을 하나님이 받으시느냐? 안 받으신다. 마귀는 잘 받겠지. 순교는, 신앙은 말에 있는 게 아니다.
뛰는 돼지 떼들이 뱃살을 출렁이면서 숨을 헐떡이며 산 아래로 달려가는데 돼지 한 마리가 옆의 돼지에게 물었다. ‘지금 우리가 왜 뛰지?’ ‘응, 그것은 우리가 지금 군대귀신이 들었다. 그러니 너도 영웅이 되려면 열심히 뛰어라’ 한다. 사람에게 군대귀신이 들어가면 영웅성도 같이 들어가는 거다. 군대는 ‘누구를 위해 죽는다’ 하는 게 들어있다. 너도 나도 ‘앞으로 돌진’ 하면서.
돼지 떼들이 내리 달아 뛴 결과 높은 절벽에서 호수로 그냥 내리꽂힌다. 이는 뭣과 같은가 하니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마4:) 땅에 꽂히겠느냐, 서겠느냐? 꽂힌다. 그 사상과 같은 거다. 사람에게 군대귀신이 들어가면 세상이라고 하는 그 사상 그 물을 향해 그냥 돌진을 하게 되는데 그 결과는 멸망이다.
육본주의 인본주의 세상주의로 살찌우는 그 신앙사상에는 예수님의 허락 하에 군대귀신이 들어가는 것이다. 제발 성경을 똑바로 봐라. 그들의 활발한 열심 충성봉사는 올라가는 게 아니라 열심히 내려 뛰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모든 활동이 ‘일 잘한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 그 신앙의 성질을 분석하면 금방 답이 나온다. 자기가 어디에 가서 잘 모이는지? 그 신앙사상은 세상이라고 하는 물에 빠지는 사상이다.
절벽에서 호수로 떨어져 몰살하는 돼지들을 본 돼지를 치던 자들이 놀라서 도망치다시피 하여 돼지를 키우는 곳이라면 성 안이고 시골이고 여러 동리로 찾아다니면서 그 사실을 다 알린다. 이게 전도다. 돼지를 치는 자들이 ‘이제 우리 돼지 치는 직업은 망했다. 예수라는 사람을 쫓아내자. 못 들어오게 하자’ 하며 모두 단합이 됐다.
신학 공부하는 곳에 오는 목사님들 중에도 이단도 사교도 모르면서 우리의 교훈을 들어보고 자기들과 뭔가가 다른데 똑부러지게 말은 못하고 어정쩡하게 ‘혹시 이단이 아닌가?’ 한다. 여기 계시는 분들은 콩인지 팥인지 녹두인지 분명히 구별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자기가 성경도 안 본 상태에서 무엇을 분별할 수 있느냐? 이단에게 가면 ‘이게 이단이다’ 하고 분별이 되느냐? 참단을 모르는데 어떻게 이단이 분별이 되느냐? 그러니 이게 정신이 바른 것이냐?
그래서 신탄진이고 포도원이고 안산이고 여기고(주-김경형목사님이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 모이는 분들은 여기저기 다 돌아다녀본 분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떨어진다면 그 결과를 보자. 가고 오고 하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이지만 그 결과는 좋게 따르던 나쁘게 따르면 반드시 너에게 따르는 거다. 그걸 알아라. 옳음을 향해서 달린다면 옳은 사람이 되는 거고, 세상 소원 목적적으로 달린다면 세상 사람이 되는 거다. 이게 이치다.
예수 믿는 사람도 여러 가지 질이 있는데, 제일 쉬운 질은 생활위주로 예수 믿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생활형편이 나아지면 교회에 안 나온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사는 모습이 게으른 사람이 많다. 또 하나는 남편이던 아내이던 세상성이 가득 들어있어서 그 위주로 가정이 돌아가면 또 교회에 안 나온다. 아내 쪽이 세상으로 들어있으면 남편들은 왜 그렇게 그 꾀임에 잘 넘어가는지? 맞다. 하와가 먼저 선악과를 따다가 남편의 입에 넣어주었듯이 어쩌면 똑같으냐? 왜 그렇게 사느냐? 남자의 권은 어디로 갔느냐?
정신 사상이 세상의 물이 많이 들면 그 위주로 자꾸 빠지게 된다. 그러나 그런 데서 자꾸 신령성으로 올라올 줄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서 가정에 사건이 자꾸 생긴다든지 생계유지가 잘 안된다거나 하면 하나님 쪽으로 마음이 자꾸 붙어야 하는데 왜 마음이 자꾸 넓은 길로 나가느냐? 마음이 세상위주로 돌아가면 그 사람은 세상 일이 잘 되면 교회에 안 나오고 잘 안 되면 교회에 나오고 이런 식이 된다. 이거 못쓴다.
돼지를 치는 자들이 ‘우리 직업이 망했다’ 하면서 모두 단합이 됐다. 돼지를 키우는 자들은 단합이 잘 된다. 그런데 속은 다 따로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세계적으로 보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하나님의 본질로 나가는 교회는, 성도는 참 보기 힘들다. 세상 육덩이로 키우는 교회는 세상에 편만하다. 세상에 널려있다. 이건 거짓된 교회요 거짓된 목사다.
계:에 보면 예수님께서 각 교회에 나타나실 때 세상 소원 목적으로 돼 있었느냐? 일곱 교회를 향해서 당신의 사자들에게 말씀을 했다. 그러면 교회에서 사자 즉, 목사의 위치가 아주 중요한 것인데 교인들이 목사를 볼 줄 아느냐? 본질의 신앙을 모르면 분석을 못한다. 정확하고 옳은 것을 모르면 거짓된 것을 못 찾는다. 자기 눈이 어두운데 뭘 보느냐? 눈이 밝아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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