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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

마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53 추천 수 0 2020.12.01 18:4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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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13:31-33, 44-52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22895 설교보기 :https://youtu.be/1uQ04SoIQ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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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

마 13:31-33, 44-52, 성령강림 후 여덟째 주일, 2020년 7월26일

 

마 13장은 비유 장(章)이라고 부를만한 특징이 있습니다. 주로 하늘나라에 관한 비유입니다. 13:1 이하에는 씨가 떨어진 네 가지 땅 이야기가, 13:24절 이하에는 알곡과 가라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마 13:31절에는 겨자씨, 33절에는 가루 세 말에 넣은 누룩이 나오고, 44절에는 밭에 묻힌 보화가, 45절에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 이야기가, 47절에는 그물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도 모두 하늘나라 비유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이라는 헬라어를 천국이라고 번역했는데 그것보다는 하늘나라는 번역이 훨씬 더 자연스럽습니다.


두 가지 질문을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하늘나라가 무슨 뜻인지, 그 실체가 무엇인지 손에 잡히십니까? 대답이 서로 다를 겁니다. 어떤 이는 우주를 생각할 것이고, 또 어떤 이는 자기 마음속을 생각할 겁니다. 어떤 이는 죽음 이후의 천당을 생각하고, 또 어떤 이는 지금 살아있는 동안의 행복한 세상을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든지 하늘나라라는 주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은 많지 않습니다. 둘째, 하늘나라가 우리의 인생살이에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 질문 앞에서도 대답은 각자 다를 겁니다. 전체적으로는 하늘나라가 지금의 삶에 별로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가수 조용필이나 BTS 방탄소년단의 노래보다 호소력이 없는 주제로 들립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 걸까요? 하늘나라는 원래 시시한 주제라서 그런가요? 우리의 삶이 어딘가 왜곡된 탓일까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기독교인의 평생 신앙생활은 헛수고입니다. 오늘 설교를 다 들은 다음에도 하늘나라가 여전히 시시하게 느껴진다면 더 늦기 전에 교회 생활을 포기하는 게 나을지 모릅니다.

 

다섯 개 비유

오늘 설교 본문에 나오는 하늘나라 비유는 다섯 개입니다. 첫 비유는 겨자씨입니다.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심은 겨자씨와 같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는 유독 크기가 작습니다. 그게 자라면 나무처럼 우거지고 거기에 새들이 깃들 수 있습니다. 상전벽해입니다. 겨자씨만이 아니라 모든 씨에서는 이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둘째 비유는 누룩입니다. 33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하늘나라)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가루 세 말과 비교해 볼 때 누룩은 미미하지만, 발효를 통해서 가루 전체를 부풀게 할 수 있습니다. 겨자씨와 누룩은 일종의 “나비 효과”와 비슷합니다. 처음에는 눈에 뜨이지 않으나 어느 순간이 되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그게 하늘나라의 속성입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평범한 유대인 랍비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중의 한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도 이와 비슷한 현상입니다. 씨가 땅에 떨어져 발아하듯이, 물 반죽 된 밀가루에 누룩이 들어가듯이 어느 때가 되면 우리의 인격과 운명 전체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알고 경험한 사람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셋째 비유는 44절에 나옵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묻힌 보화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를 발견한 사람은 기뻐하며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은 샀습니다. 45절에 나오는 넷째 비유에서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고 했습니다. 보석상은 최고로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 그 진주를 샀습니다. 두 비유 모두 하늘나라는 절대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의 소유를 다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소유를 다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절대적인 세계가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그런 세계를 우리가 경험했을까요?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섯째 비유는 47절 이하에 나옵니다. 하늘나라는 물고기를 잡는 그물과 같습니다. 그물을 던지자 그물에 물고기가 가득 들었습니다. 어부는 그물을 끌어 올려서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를 분리합니다. 이 그물 비유는 오늘 설교 본문 바로 앞 단락(마 13:24-30)에 나오는 “알곡과 가라지” 비유와 비슷합니다. 어떤 사람이 밭에 씨를 뿌렸습니다. 거기에 알곡만이 아니라 가라지도 자랍니다. 주인은 추수 때까지 가라지를 내버려 둡니다. 추수 때에 가라지는 솎아내서 불사릅니다. 알곡은 잘 정리해서 곡간에 보관합니다. 이는 하늘나라에서 일어날 심판의 절대성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어중간하게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선택받든지 버림받습니다. 이미 지금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모릅니다. all or nothing!


하늘나라에 관한 다섯 가지 비유를 여러분은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밋밋합니까, 울림이 있습니까? 요약하면, 앞의 두 개는 전적인 변화를 가리킵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겨자씨에서 새들이 깃들일 수 있는 나무가 나옵니다. 누룩이 밀가루 전체를 부풀립니다. 이어서 나오는 두 가지 비유에서 하늘나라를 발견한 사람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포기했다고 합니다. 하늘나라의 절대성을 의미합니다. 다섯째의 그물 이야기도 하늘나라의 절대성을 가리킵니다.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아무도 하늘나라의 심판은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은 너무 준엄해서 평소 말랑말랑한 일에만 마음을 두고 살았던 사람들은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세상 사람은 그러려니 해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늘나라를 피할 수 없습니다. 거기서만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인 세계

먼저 우리가 세상살이에서 무엇을 절대적인 대상으로 여기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돈과 권력과 명예일까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노골적으로 그렇게 말하거나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국가나 민족을 절대적인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졸업한 대학교를 자랑할지 모르겠습니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군대를 절대적인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긴 합니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이런 것들이 우리의 삶에 대단한 영향을 끼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첫째, 이런 세상의 힘은 무상합니다. 모든 권력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국가의 힘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가 무너졌듯이 지금의 초강국도 무너집니다. 둘째, 이런 세상의 힘은 늘 제한적입니다. 돈은 우리 몸을 파멸시킬 수 있으나 우리 영혼을 파멸시키지는 못합니다. 현대인은 영혼의 삶을 과소평가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대상이 없습니다. 절대적인 대상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하늘나라는 곧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고, 밭에 묻힌 보화나 진주와 같고, 그물과 같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느끼면서 사는 사람이 있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현실(reality)로 경험하는 사람이 있고, 심리적인 투사로만 접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 사이에 이런 차이가 벌어지는 이유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표현을 빌리면, 들을 귀가 관건입니다. 또는 볼 눈이 중요합니다. 들을 귀가 없으면 아무리 말해줘도 듣지 못하고, 볼 눈이 없으면 눈앞의 것도 보지 못합니다. 그림에 관해서 아는 게 없고 관심이 없으면 고흐나 렘브란트, 김홍도나 신윤복의 그림을 앞에 두고도 시큰둥한 거와 같습니다. 답답한 일이지요.


들을 귀가 없다는 말은 구원에 관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구원에 관한 질문 자체가 현대인에게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거짓 구원에 속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구원을 찾기에는 먹고 사는 일이 너무 바쁩니다. 구원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인생을 재미있게 살고, 남에게 민폐 끼치지 않고 사는 게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소에 건강을 챙기고, 조금 여유가 있으면 취미생활을 하면서 나름 행복하게 살다가, 그리고 자녀들 잘 키워놓고 죽을 때가 되어서 죽으면 충분하다고 여깁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을 포함하여 평범한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최선의 삶이자 그들의 구원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대략 그렇게 사니까 자기도 그렇게 살아갑니다. 제가 보기에 그들은 무언가에 속고 있으며, 자기 자기까지 속이는 겁니다. 실제로는 행복하지 않으면서 행복한 척하는 겁니다. 티브이 드라마에 자신의 인생을 쏟으면서 행복하다고 자족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인생을 그냥 ‘무탈’하게 살면 충분한가요? 세상이 제시하는 모범답안을 줄줄이 외우는 삶으로 충분한 건가요?


예수 당시에 가장 원만하고 그럴듯하게 인생을 산 사람들은 율법 선생들이었습니다. 서기관, 바리새인, 랍비, 제사장 등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그들은 사회 지도층 인사들입니다. 세상 경험도 많고 실력도 좋았습니다. 오늘의 판사, 검찰, 대학교수, 국회의원, 의사 등등을 생각하면 됩니다. 그들은 율법에 기준을 맞춰서 살았습니다. 그 율법은 오늘날의 실정법이나 학문과 같습니다. 율법과 실정법과 학문은 세상을 작동시키는 체제, 즉 이데올로기입니다. 기업체 사장의 연봉과 말단 직원의 연봉, 정규직의 연봉과 비정규직의 연봉도 그런 체제에서 정해집니다. 세상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앞에서 끌어가는 사람들이 사회 지도층 인사들입니다.


당시 세상을 향해서 예수는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세상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잘못되었다는 건 사람들이 거기서 행복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행복하지 않다면 빨리 거기서 나와야 합니다. 예수의 말이 그들의 귀에 들렸을까요? 개인에 따라서 달랐습니다. 대다수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회개하라는, 즉 지금의 틀에서 벗어나라는 말은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다 잘살고 있는 겁니다. 제사장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정교한 의식에 따른 제사를 지냅니다. 성전에 들어오는 이들에게서 성전 세를 받고, 환전상들에게 자릿세를 받아서 성전을 관리하는 이들에게 월급도 주고 건물 보수도 합니다. 그리고 남은 돈은 제사장들끼리 나눠 갖겠지요. 세상이 다 잘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뭘 회개해야 합니까?


저는 예수 당시의 유대 사회가 저질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았기에 정의롭지 못한 일들이 벌어지기는 해도 최소한 율법 공동체로서의 품위는 지키는 사회였습니다. 위대한 랍비나 존경받는 제사장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눈에 그들의 삶에는 가장 중요한 무엇이 빠졌습니다. 하나님입니다. 하늘나라입니다. 유대인들이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같지만, 유대 절기에 성지 순례자들이 많이 몰려든 데서 알 수 있듯이 여전히 종교적인 열기가 뜨겁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그들을 향해서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 나라, 즉 하늘나라가 무엇인지에 관해서 비유로 가르치고, 행동으로 보이시고, 자기 운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의 선포를 거부했습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예수를 제거했습니다. 예수의 메시지는, 그리고 그의 존재 자체가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늘나라는 사람들에게 불편한 겁니다. 한편으로 이미 세상의 삶에 길들어서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들의 가짜 행복이 노출될까 걱정하는 겁니다.

 

하나님 경험

지금 여러분의 삶에는 하나님이 있습니까? 각자 대답이 다를 겁니다. “아멘!”이라고 큰소리로 대답한다고 해서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 다섯 개의 비유에 비쳐서 대답해보십시오.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그 절대적인 능력이 여러분의 삶에서 일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지, 자기 소유를 다 팔아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절대적인 능력을 경험했는지, 살펴보십시오. 이 말이 세상에서 하는 일은 무의미하니까 매일 교회에 나오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종교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지금 교회에 나와 앉아있는지, 거리를 걷고 있는지, 여행하는지가 문제는 아닙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총체적으로 지배하는 대상이 무엇이냐가 핵심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 자신에게 질문했습니다. 나는 하늘나라를 절박한 심정으로 구하는 사람인가? ‘나’라는 사람의 실존 전체가 그 하늘나라를 지향하고 있는가? 하늘나라의 능력에 휩싸여서 나의 소유와 가족까지 버릴 준비를 했나? 하늘나라가 내 영혼에 기쁨의 근원이 되었나? 대답이 쉽지는 않습니다. 여러분도 저와 마찬가지일 겁니다. 하늘나라에 대해서 “그렇다”와 “아니다”로 딱 떨어지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 하늘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우리 삶에서 걸어가야 할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비유를 알아들은 깊이만큼 대답의 깊이도 달라집니다. 저는 저 비유를 어느 정도의 깊이에서 알아들었을까요?


하늘나라가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으나 실제로는 우리의 삶과 직접 관련됩니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동화나 수수께끼나 수학 공식이 아닌 겁니다. 자, 50년 후의 여러분을 생각해보십시오. 평균 수명을 1백 살로 잡으면 우리 중에 많은 이들이 죽었을 겁니다. 100년 후를 생각하면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0년의 수명이 늘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책을 몇 권 썼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200년 후를 생각하면 남아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몇 평 아파트에 살았는지, 재테크로 얼마를 벌었는지도 무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냥 자기 수준에 맞는 편안한 삶을 살면 그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2백 년 후에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며 시작과 마침”(계 22:3)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우리도 하나님의 그 존재 방식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500년 후에도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있습니다. 세상 마지막에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없다면 굳이 기독교인으로 살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믿음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야말로 모래 위에 세운 집이나 마찬가지입니다(마 7:26-27). 약간의 어려움만 닥쳐도 삶과 신앙 전체가 위태롭게 흔들릴 겁니다. 그럴 바에야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데까지 마음 편하게 살다가 죽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귀가 솔깃하십니까? 하나님 없이는 궁극적인 의미에서 마음 편히, 행복하게 살지 못한다고 제가 앞에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평생에 걸쳐서 하늘나라에 다가가는 사람들입니다. 놀라운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하늘나라는 이미 여기에 왔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는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실감이 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를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예수에 관한 관심 자체가 없는 거 아닐까요? 오직 자기에만 관심을 두고 사는 건 아닐까요? 그런 사람에게는 하늘나라가 겉돌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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