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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아

마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10 추천 수 0 2020.12.08 20:2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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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16:21-28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24653 설교보기:https://youtu.be/2KRTnrqta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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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아!”

마 16:21-28, 성령강림 후 13주, 2020년 8월30일

 

스칸달론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설교 본문에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예수의 발언이 나옵니다. 23절에서 예수는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불렀습니다. 사탄은 사람을 악에 떨어지도록 유혹하는 자입니다. 예수가 이런 호칭을 사용한 장면이 마태복음 앞 대목에서 한 군데 더 나옵니다. 마 4:1-11절은 공생애 직전에 광야에서 금식기도 하면서 예수가 받은 세 가지 시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마귀가 예수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떡으로 만들어 보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봐라. 당신이 나를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명예를 주겠다. 예수는 10절에서 그를 향해서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말합니다. 이 경우는 이해가 되지만 베드로를 그렇게 부르는 건 이해가 안 됩니다.


베드로가 정말 크게 잘못한 것일까요? 고난과 죽음이라는 운명이 예수에게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베드로의 강변은 잘못된 게 아닙니다. 그 장면에서 그렇게 주장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겁니다. 다른 제자들도 이심전심으로 똑같이 생각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예수의 발언을 오해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예수는 21절에서 고난과 죽음만이 아니라 부활까지 언급했습니다. 이를 문자적으로만 본다면 베드로가 뭔가 오해한 것처럼 들립니다. 고난과 십자가의 운명은 말려야겠지만, 부활은 반겨야 할 일이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에 관한 유대인들의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그 말을 듣고 제자들이 “와, 우리 선생님이 고난받고 돌아가시겠지만, 곧 곧 부활하실 거야. 그러니 힘내자.”라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말씀을 오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왜 베드로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꾸짖으셨을까요?


이어지는 말씀에 따르면 베드로는 예수를 넘어지게 하는 자였습니다.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스칸달론”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스캔들”이 이 헬라어에서 왔습니다. 부끄러운 소문이나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는 함정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발언이 예수를 함정에, 또는 시험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당시에 예수는 정신적으로 몹시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고난과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것인지, 아니면 후일을 도모할 것인지 결정해야만 했습니다. 지금 예수는 30대 초반입니다. 연륜도 좀 더 쌓이고 제자들을 더 키우고 힘을 더 비축했다가 세상을 바꿀만한 힘이 생겼을 때 유대교를 개혁해도 됩니다. 그의 내면에서는 갈등이 심했을 겁니다. 자신의 미래를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게 옳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아주 힘들게 내린 판단이었습니다. 그 판단을 제자들에게 설명했습니다. 21절입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강변했습니다. “예수 랍비여, 그런 판단은 옳지 않습니다. 고난을 받고 죽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됩니다.” 예수에게 베드로의 발언은 스캔들이었습니다. 유혹자이며 시험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니 “사탄아!”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페트라

오늘 본문 바로 앞 대목에 베드로에 대한 예수의 평가가 상반되게 나옵니다. 이 두 대목을 대조해서 읽어야만 오늘 본문을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보는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는 말들이 나왔습니다. 예수는 세상 사람이 아니라 제자들의 생각을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불쑥 나서서 먼저 말합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최초의 신앙고백인 셈입니다. 이 위대한 고백을 들은 예수는 베드로를 극찬합니다. 마 16:18절은 이렇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 시몬입니다. 예수는 그를 “베드로”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반석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근거해서 로마가톨릭교회는 베드로를 제1대 교황이라고 주장합니다. 역사적 근거는 없습니다. 베드로의 지위가 당시 교회에서 특별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베드로라는 이름과 반석이라는 단어 사이에는 언어유희가 숨어 있습니다. 헬라어로 베드로는 “페트로스”이고, 반석은 “페트라”입니다. ‘페트로스’는 교회의 ‘페트라’입니다. 교회의 반석으로 인정받았던 베드로가 오늘 설교 본문에서는 즉시 교회의 스캔들로 추락한 겁니다.


예수를 넘어지게 하는 스캔들이 무엇인지가 본문에 나옵니다. 앞에서 짚었듯이 예수에게 고난과 죽음의 운명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베드로의 생각과 발언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그의 발언이 사람의 일이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는 게 문제입니다. 사람의 일은 상식적입니다. 공부 잘해야지, 건강해야지, 결혼 잘해야지, 목회에 성공해야지 등등입니다. 우리는 늘 이런 기준으로 생각하고 말합니다. 우리 자녀들도 이런 상식이 통하는 인생을 살기 바랍니다. 이걸 누가 나쁘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따르면 그건 사람의 일이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일은 무엇일까요? 그게 구분될까요?


이를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예수의 말씀 중에서 두 군데만 보겠습니다. 마 9:13(후)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여기서 의인은 세상에서 인정받는 사람들이고, 죄인은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의인은 한국에서 제일 좋은 대학교에 들어간 학생들이고, 죄인은 지방의 이름 없는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젊은이들을 낙인찍습니다. 예수는 의인이 아니라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가 의인을 싫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의인들이 오히려 예수를 싫어하기에 예수가 그들과 관계를 맺고 싶어도 맺을 수가 없습니다. 단순히, 세상에서 잘나가는 사람이 의인이라거나 뒤처진 사람이 죄인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뒤처져 있으면서도 의인인 척하는 사람이 있고, 앞서 있으나 죄인 같은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저 말씀을 해석하면, 예수는 교만한 사람이 아니라 겸손한 사람을 부르러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섬김을 받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은 드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작동 기제는 밑에서 섬기는 사람에 머물지 않고 섬김을 받는 사람이 되려는 욕망입니다. 섬기는 삶은 쉽지 않기는 합니다. 섬긴다는 말을 상하 관계로 보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사람은 아랫사람으로, 섬김을 받는 사람은 윗사람으로 말입니다. 섬기는 삶의 본질은 자신의 삶을 카리스마로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은사라는 뜻의 헬라어 카리스마는 자신의 행위를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선물이니까 자기가 하는 일이 기쁜 겁니다. 경찰은 경찰업무 자체를 기쁘게 받아들고, 소방대원은 소방업무를 즐거워합니다. 즐거운 일이니 누가 하라 말라 하기 전에 자기가 일을 찾아서 합니다. 의사들도 의료 행위 자체를 하나님의 선물로 알아서 즐거워합니다. 거꾸로 섬김을 받는다는 말은 삶을 카리스마가 아니라 자기의 소유로 여기는 것입니다. 자기를 주인이라고 생각하니까 실제로 주인이신 하나님의 일을 찾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게 말처럼 간단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좋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믿음이라고 한다면 누가 베드로를 따라가겠습니까. 교회의 반석으로 불리던 베드로 아닙니까. 반석은 동시에 스캔들이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게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믿음이 아주 쉽게 교회를 넘어지게도 합니다. 교회에서 벌어지는 대부분 문제는 믿음 좋은 사람들에게서 나옵니다. 목사, 장로, 권사, 안수 집사 등등입니다. 그 사람들만 악해서가 아니라 사람의 본질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더 높이, 더 넓게, 더 멋있게 세우려다 보니 인간적인 생각이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도 그렇습니다. 예수에게 고난과 죽음이 발생하면 안 된다는 그의 주장은 선합니다. 예수가 더 오래 자신들과 함께하면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쳐야만 했습니다. 그런 베드로의 선의가 어느 순간에 예수를 넘어지게 하는 스캔들이 되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확고한 믿음에서 나온 말과 행동이 오히려 예수를 넘어지게 하는 것이었다니, 평범한 우리로서는 당황스럽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오피소 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는 헬라어 문장이 재미있습니다. 이 문장은 베드로를 무조건 꾸짖는 것처럼 들리긴 합니다. 그렇게만 읽으면 곤란합니다. 이 문장에서 핵심은 “내 뒤로”입니다. 헬라어로 “오피소 무”(after me)라고 합니다. 이 표현은 예수가 하나님 나라 일꾼으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사용한 것과 똑같습니다. 마 4:19절에서 예수는 갈릴리 호수에게 고기 잡고 있던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를 향해서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라는 문장에 바로 이 “오피소 무”가 나옵니다. 이 문장을 직역으로 바꾸면 “나의 뒤로 오라.”입니다. 오늘 본문인 마 16:23절을 직역으로 바꾸면 “나의 뒤로 가라.”입니다. 이 두 문장에서 오라(데우테)와 가라(휘파게, go away!)라는 단어만 바뀌었지 “오피소 무”는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이 사탄 같은 놈아, 그런 말 하려면 내 눈앞에서 당장 꺼져.”라는 뜻이 아니라 “사탄처럼 생각하지 말고 내 뒤를 따라오라.”라는 뜻입니다. “내 뒤를 따르라.”라는 말씀은 제자의 길을 꾸준히 수행하듯이 가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도입니다.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공동체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기 위한 최선의 길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데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상식만으로는 그게 안 됩니다. 예수 앞에서 서는 게 아니라 “예수 뒤에” 서는 겁니다. 오늘 설교 본문 후반부인 24절부터 구체적으로 제자의 길이 언급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2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오피소 무)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구절에도 “오피소 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23절의 오피소 무는 “내 뒤로”라고 번역되었고, 24절의 오피소 무는 “나를”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23절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24절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번역되었지만 실제로는 똑같이 예수의 뒤를 따르라는 뜻입니다. 예수는 베드로를 책망했다기보다는 그가 가야 할 길을 다시 제시한 것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공동체가 선택한 제자의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도 그런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도


제자의 정체성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예수의 제자로 살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본성에 어긋나기에 사람들이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우리 본성은 ‘자기’를 부인하는 게 아니라 내세우라고 합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채우라고 다그칩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게 인간의 딜레마입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자기가 누군지 어디서 확인이 됩니까? 가정 안에서 자기의 위치, 사회에서의 위치로 자기를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증권과 아파트 등기부 등본과 은행 통장을 통해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합니다. 지금 자신이 매달리는 것이 바로 자기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적인 방식으로 돌려서 말하면, 우리가 자기로 생각했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순간이 우리에게 닥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태도로 살아야만 우리는 사탄의 길을 피할 수 있습니다. 준비가 더 되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에서 “자기”가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의 십자가를 감당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구체적인 삶에서 감당해야 할 책임입니다. 그 십자가는 각자가 다릅니다. 여러분에게 그게 어떤 것인지는 제가 알지 못합니다. 제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와 여러분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는 다릅니다. 무조건 고난 겪어야 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느 정도의 무게를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을지는 제가 대답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고유한 십자가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만이라도 제자로서의 첫걸음을 내딛는 겁니다. 예수는 자기의 십자가를 감당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고, 결국 고난받아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제자의 삶은 피곤한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십니까? 아닙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이 역설적으로 목숨을 얻는 길이라고 25, 26절이 말합니다. 일상적인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아무리 게으른 부모라고 하더라도 멀리 떠났던 자식이 온다면 자식이 머물 방을 깨끗하게 청소합니다. 청소가 귀찮은 일이기는 하나 자식을 생각하면 즐거운 일이 됩니다. 우리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위해서 방을 청소하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2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그 영광의 순간을 아는 사람이라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압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반석으로 인정받았던 베드로가 동시에 사탄으로 불렸다는 사실을, 즉 교회의 스캔들로 떨어졌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도 똑같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에게 가장 확실한 길은 정신 차리고 “오피소 무”, 즉 “예수의 뒤”로 자리를 옮기는 것입니다. 예수를 삶의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종종 사탄으로 떨어지더라도 다시 예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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