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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8:21-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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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25252 설교보기:https://youtu.be/KCR2ERxBPss |
용서, 그 불가능한 명령
마 18:21-35, 창조절 둘째 주일, 2020년 9월13일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
예수의 제자 집단에서 예민한 주제가 나올 때마다 베드로가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서도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에게 질문합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되는지요. 일곱 번이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일곱 번도 생색을 낸 숫자입니다. 세 번까지가 최선입니다. 베드로는 “그래, 그런 정도면 됐다.”라는 대답을 기대했겠으나 어긋나는 대답을 듣습니다. 예수는 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한다면 490번을 용서해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 단어를 77로 번역할 수도 있긴 합니다만 중요한 것은 용서에서 숫자를 폐기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는 이어서 23절부터 유명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 비유의 주제는 “천국”인데,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
일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 임금(주인) 앞에 섰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당시 일반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금액입니다. 그쪽 지방 정부의 일 년 재정보다 훨씬 큰 액수입니다. 그 종은 갚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임금은 빚진 사람과 가족을 팔아서라도 빚을 갚게 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종은 그 명령을 부디 거둬달라고 매달립니다. 기다려주면 돈을 벌어서 갚겠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 허튼소리입니다. 주인은 그 종을 불쌍하게 여겨서 빚을 탕감해주었다고 합니다. 빚 문제가 해결된 이 사람은 안심하고 돌아가다가 자기에게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빚 액수는 백 데나리온입니다. 요즘으로 환산하면 1천만 원 정도입니다. 이 사람은 빚을 갚으라고 독촉했고, 그 동료는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조금만 참아주면 벌어서 갚겠다고 호소했습니다. 이 사람은 호소를 외면하고 그 동료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친구들이 주인에게 그 벌어진 일을 알렸습니다. 주인은 만 달란트 빚졌던 사람을 다시 불러들였습니다. “자네를 불쌍히 여겨서 내가 큰 빚을 탕감해주었으니 자네도 빚진 친구를 불쌍하게 여기는 게 마땅하지 않냐.”라고 말하면서, 괘씸하게 여겨 이 사람을 감옥에 넣었다고 합니다. 예수는 이 비유를 다 마친 후에 이렇게 말씀을 끝냅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기독교인은 용서를 가장 큰 미덕으로 삼으라는 말씀이라고 받아들일 겁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라는 말씀까지 포함해서 생각하면 더 그렇습니다. 미운 사람을 용서하면서 살려고 노력해본 분들은 그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경험했을 겁니다. 용서는커녕 오히려 당한 것보다 두 배, 세 배로 앙갚음을 하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왜 당하고만 살아, 그렇게 살면 자기만 손해고, 바보가 되는 거라는 생각이 이 세상에는 팽배합니다. 이런 생각이 잘못된 것만도 아닙니다. 여기 외국인 노동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는 불법 체류자입니다. 이 사람의 약점을 이용해서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는 고용인을 용서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조금 더 심각한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몰아내기로 작정했습니다. 초창기에는 여러 가지 정책을 통해서 유대인들의 일자리를 빼앗았고, 나중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그들을 체포하여 집단 수용소에 가뒀습니다. 6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히틀러와 나치를 용서해야 한다고 아무도 말하지 못합니다. 이런 비슷한 일들은 인류의 역사에서 반복해서 일어났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일어납니다. 어린아이 유괴범을 용서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반인륜적인 범죄를 행한 사람에게는 거기에 따른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책임을 묻지 않으면 세상은 혼돈으로 떨어집니다. 이런 현실을 알만한 예수는 왜 제한을 두지 말고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걸까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빠지기 쉬운 오류는 말씀의 일반화입니다. 성경 말씀은 허공에서 나왔거나 허공을 향한 게 아닙니다. 거기에는 인간의 구체적인 삶이 들어 있습니다. 용서하라는 말씀을 기계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적용하는 태도는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모든 노동을 멈춰야 합니다. 예수는 안식일 법을 알고 있었으나 안식일에 장애인을 고치기도 했습니다.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의 본질을 말씀하신 겁니다. 성경 구절, 특히 윤리 문제를 다루는 성경 구절을 읽을 때는 그것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먼저 아는 게 중요합니다. 그걸 놓치고 문자에 매달리면 아무리 선의라고 하더라도 오늘 예수에게 일곱 번 용서하면 되냐고 질문한 베드로 수준에 떨어집니다.
“천국” 비유
오늘 예수가 들려준 비유의 주제는 앞에서 인용한 23절에서 보았듯이 천국입니다. 천국, 즉 하늘나라(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는 하나님 나라(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와 똑같은 뜻입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습니다. 예수의 말씀과 행위와 운명은 이 한 가지 주제에 해당합니다.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돌아서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회개입니다. 예수는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수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종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인간의 모든 삶이 하나님 나라와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비유도 용서의 숫자나 용서 여부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근본 속성이라 할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당연히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까지 불쌍히 여길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탕감이라는 단어가 반복합니다. 백 데나리온을 갚지 못한 동료를 감옥에 넣은 이 사람은 원래 주인에게 만 달란트를 빚졌습니다. 백 데나리온과 만 달란트를 비교하면 1대 50만입니다. 이 사람은 50만 배나 많은 빚을 탕감받았습니다. 이 사람이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는 말은 자신이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액수의 빚을 탕감받았다는 사실을 절감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자신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자비가 얼마나 엄청난지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왜 그렇게 교만하고 뻔뻔하게 사느냐, 다른 사람을 왜 불쌍히 여길 줄 모르느냐, 하고 따져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은 자신이 탕감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만 달란트를 탕감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여러분은 알고 있을 겁니다. 제가 아는 한에서 조금만 보충할 테니, 참고하십시오. 두 가지 사실을 짚겠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 다른 생명체를 잡아먹는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평생 살아가면서 먹는 소와 돼지와 닭과 생선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 상상이 가시는지요. 제가 어릴 때는 소고기를 일 년에 몇 번 먹지 못했습니다. 멸치나 어묵볶음 정도는 자주 먹었지만, 주로 먹는 건 채소였습니다. 달걀도 먹기 힘들었습니다. 요즘 우리는 다른 동물을 너무 많이 잡아먹습니다.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동물을 키웁니다. 저는 동물 복지를 우선하는 채식주의자가 아닙니다. 다만 먹는 문제에서 인간이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 만 달란트 빚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탕감해주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저는 상상하기조차 싫습니다. 코로나19 사태가 인간의 이런 먹는 문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 체제를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설교 시간에 자본주의를 자주 거론하는 게 혹시 불편하지는 않으신지요. 저는 유대인들의 바알 숭배를 가장 큰 죄로 비판한 선지자들의 전통을 따르는 중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재물과 하나님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는 예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본주의 체제에 내재한 악을 외면하고 설교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 주일에 이어서 의사 집단 휴진에 대해서 다시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게 자본주의 체제의 죄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의사만이 아니라 다른 전문 집단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학교 비정규직 강사들의 생존을 보장하려면 정규직 교수들의 연봉을 10% 깎아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된다면 교수 집단에서 어떤 반응이 나올지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복지 국가로 나아가려면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람들이 세금을 더 내야 한다는 주장을 누가 반대할지도 우리가 다 경험했습니다. 의사들은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공부를 잘했고 혹독한 훈련을 거쳤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사회가 그들에게 혜택을 준다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북한과 쿠바 같은 나라에서는 의사도 다른 공무원들과 비슷한 연봉을, 높더라도 약간 높은 정도의 연봉을 받습니다. 이런 사회주의 체제가 과연 국민을 행복하게 만드느냐,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느냐 하는 건 또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는 지금 해도 해도 너무한 자본주의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모두가 만 달란트 탕감받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감옥에 넣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 자본주의라는 쓰나미에 휩쓸려서 정신을 놓치고 살아가는 건 아닐는지요.
어린아이와 천국
오늘 본문의 비유는 천국에 대한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실은 마 18장 전체가 천국을 말합니다. 마 18:1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을 읽으면 오늘 본문이 더 분명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정말 딱한 질문입니다. 제자들의 언행을 보면 철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당시 제자들이 주로 이십 대였을 테니까 철부지처럼 행동할만합니다. 그 나이 때에 이미 하나님과 삶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젊은이들도 많긴 하지만 저의 이십 대를 돌아보면 제자들의 이런 언행이 이해됩니다. 제자들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서도 등수가 먹여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더 크냐? 누가 예수의 좌편과 우편에 앉느냐? 예수는 어린아이 하나를 불러 제자들 가운데 서게 한 뒤에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3절)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 이야기와 만 달란트 탕감 비유가 천국이라는 단어로 연결됩니다. 생명의 나라인 천국은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에게 주어지고, 그 천국의 주인은 만 달란트를 탕감해주는 임금과 같습니다. 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춘다는 말이 됩니다. 자기를 낮추면서도 초라해지지 않으려면 자기가 얼마나 높은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만 달란트를 탕감받았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지 못하기에 자꾸 누가 크냐는 질문에 집착하고, 다른 이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못하고, 용서하지도 못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는 앞에서 만 달란트를 탕감받았다는 사실을 두 가지 사회적인 관점에서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소극적인(네거티브) 설명입니다. 여기서는 어린아이의 속성과 연관해서 적극적인(포지티브) 한 가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 와서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만 달란트를 선물로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만 달란트보다 더 많은 액수를 선물로 받은 겁니다. 우리는 온통 보석으로 꾸며진 왕궁에서 왕이나 왕비처럼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요.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람은 새 예루살렘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 (계 21:18,19),
요한계시록 기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집에 대한 묘사를 통해서 천국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집은 이미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이 이미 새 예루살렘입니다. 하이데거는 사소한 사물을 거룩한 사건이라고 보았습니다. 하늘과 땅과 죽을 자와 신성의 모임이라고 말입니다. 다리와 구름과 야생화에서 천사를 보는 겁니다. 세상을 천국으로 느끼면서 사는 사람이 있고, 지옥으로 느끼면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인생을 보면서도 불행한 일만 크게 느끼는 사람이 있고, 행복한 일에 마음을 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을 천국으로 볼 줄 아는 사람은 만 달란트를 선물로 받고 사는 사람입니다.
어린아이의 눈에 세상은 보물 창고이고 마법의 나라입니다. 하늘이 신비롭게 보입니다. 달은 또 어떻습니까. 저의 어린 시절은 우리나라가 몹시 가난하던 1960년대였습니다. 가난과 상관없이 당시의 저에게 세상은 재미있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와 친구들과 동네에서 놀던 시절이 지금도 그립습니다. 저녁 시간이 되면 집에서 밥 먹으라고 부릅니다. 그 전에 더 재미있게 놀아야 합니다. 어둠이 서서히 찾아드는 그 시간에 친구들과 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세상이 보물로 경험됩니다. 밤하늘은 또 어떻습니까. 비록 가난해서 배가 고프지만, 세상은 여전히 무지갯빛으로 다가왔습니다. 아이들에게 세상이 보물 창고로 보이는 이유는 자기를 채우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그대로 직관하는 겁니다. 산을 산으로 보고, 강을 강으로 봅니다. 어른이 되면 어린아이의 눈을 잃어버립니다. 천국에서 누가 크냐 하는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거와 같습니다.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쫓기다 보니 자기가 만 달란트를 선물로 받았다는 사실은 당연하게 여기고, 즉 시시하게 여기고, 다른 이가 자기에게 빚진 백 데나리온만 크게 느낍니다. 기독교적인 용어로 은혜는 없고, 좋은 뜻이든 나쁜 뜻이든 자기 욕망만 가득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길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생각이 다른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면서 그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았습니다. 오늘 교회력에 따라서 주어진 “둘째말씀”의 한 구절인 롬 14:9절입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궁극적인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어찌 형제를 비판할 수 있겠느냐, 오늘 본문에 따르면 만 달란트를 탕감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어찌 백 데나리온 빚진 형제를 용서하지 않을 수 있겠냐는 말씀입니다. 탕감받았다는 말은 우리의 인생이 가련하다는 게 아니라,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을 여기서 더 보탤 필요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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