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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빌1:21-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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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25733 설교보기 :https://youtu.be/vAd0uC_WxtE |
복음, 은혜, 믿음, 고난
빌 1:21-30, 창조절 셋째 주일, 2020년 9월20일
삶과 죽음
신약성경에 나오는 바울의 편지를 대할 때 신앙적인 면에서 바울의 경지에 이르는 건 저에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동네 조기 축구 동아리 회원이 스페인 프로 축구 라리가에서 뛰는 메시 선수를 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빌 1:21-30)의 첫 구절부터 우리를 겁먹게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삶과 죽음을 초월한 듯한 진술입니다. 이어서 22-24절에서 그는 살아있기보다는 차라리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게 개인적으로는 원하는 일이지만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서 할 일이 있으니 아직은 자신이 살아있는 게 빌립보 교인들에게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실제로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나 빌립보 교인들에게 신앙적인 교훈을 주기 위해서 말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이럴 때는 바울의 말을 트집 잡기보다는 그런 말의 근거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게 좋습니다.
바울은 지금 삶과 죽음을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바라봅니다. 앞에서 인용한 빌 1:21절을 KJV은 그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For to me to live is Christ, and to die is gain.” 한 마디로 그리스도가 바로 자신에게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표현이 우습게 들릴 겁니다. 공부 잘하고 돈 많이 벌고, 그래서 잘 먹고 잘사는 게 생명이지 어떻게 그리스도가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나쁜 짓만 하지 않고, 좀 더 나아가서 착하게 살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좋은 조건에서 살려고 노력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기독교인도 많습니다. 그런 생각을 이상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이런 생각에 머물러 있는 한 바울이 말하는 신앙의 깊이에 이르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생명, 즉 자기의 삶, 자기 인생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죽음마저 유익하다고 말한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생명을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하는 겁니다. 여기 마라톤 시합에 나선 사람들이 있다고 합시다. 모두 우승하려고 사력을 다합니다. 들키지만 않는다면 속임수를 쓰기도 할 겁니다. 다른 선수가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걸 은근히 좋아하겠지요.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모르는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이 시합에 참여한 사람 모두 대통령이 여는 만찬에 초대받는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그에게는 우승이 아니라 만찬에 초대받는 게 중요합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달리기 자체가 즐겁습니다. 비록 꼴찌를 해도 상관없습니다. 가능한 한 마라톤 대회가 빨리 끝나는 게 좋습니다. 바울에게는 이 만찬 소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사건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난 일을 복음(유앙겔리온)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복된 소식을 들었기에 이 세상에서 생명을 좀 더 유지하는가, 아니면 조금 일찍 죽는가는 그에게 두 번째였습니다. 궁극적인 생명을 얻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고백입니다. 이게 말이 될까요? 사이비 교주를 추종하는 사람들처럼 바울이 지금 뭔가 망상에 빠진 건 아닐까요? 바울의 발언을 좀 더 따라갑시다.
바울은 27절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라고 권면했습니다. 많은 걸 함축하는 발언입니다. 앞에 나오는 빌 1:5절과 7절에서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복음에 이미 참여했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인 28(후)절에서 복음의 성격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복음이 어떤 이들에게는 멸망의 증거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앞에서 비유로 든 마라톤 이야기를 다시 보십시오. 마라톤 우승만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사람에게 대통령의 만찬 초대는 실망할만한 일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상대적인 차원으로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복음이야말로 구원의 증거였습니다. 거기에 만찬 초대와 같은 생명의 비밀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장이 과연 옳은가요? 그리고 설득력이 있을까요? 그런 주장은 단순히 종교적이어서 실제 우리의 삶에는 아무 상관이 없을까요? 여러분은 복음을 통해서 “나에게 생명은 그리스도다. 그러니 죽음도 유익하다.”라고 실제로 생각하면서 살고 계시는가요?
하나님의 은혜
복음을 구원의 증거로 느끼고 받아들이는 일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복음과 대립하는 방식의 삶에 길들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깨닫는 데에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셔야 깨달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29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성경이 반복해서 강조한다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특히 신약성경에 가장 자주 나오는 단어는 은혜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바울도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쓰면서 은혜를 반복해서 언급합니다. 빌립보서 시작인 빌 1:2절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빌립보서 마지막 구절인 빌 4:23절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왜 어떤 사람에게는 복음을 깨달을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베푸시지 않느냐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 그런지를 누가 알겠습니까? 인간이 모든 걸 알 수는 없습니다. 은혜로 나타나는 현상만 알뿐입니다. 아주 일상적인 일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두 사람이 카페에 앉아서 대화를 나눕니다. 한 사람은 말싸움으로 상대방을 이기는 데만 정신이 팔렸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카페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현상을 신비롭게 느낍니다. 첫 번째 사람의 눈에는 카페 안이 아주 초라하게 보이지만 두 번째 사람에게는 풍성하게 보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두 번째 사람에게만 은혜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불평할 수 없습니다. 은혜가 주어지지 않은 게 아니라 자기가 거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첫 번째 사람은 은혜를 본래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수다 떠는 데만 정신이 팔려서 카페 전체와 그 밖의 세계에 관심이 아예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동안 유대교 전통에서 그렇게 얻어보려고 했으나 얻지 못했던 풍성한 생명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은혜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 이유를 바울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우선 29절 전체를 읽어보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은혜를 베푸신 첫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은혜는 믿음과 직결됩니다. 관념적으로만 은혜를 받았다고 즐거워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믿음과 연관됩니다. 자기의 믿음을 믿는 게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역사에서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그와 하나 되고, 그와의 영적인 친밀감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철저하게 세속화된 세상에서 사는 21세기 현대인들에게 그리스도와의 일치라는 말은 낯섭니다. 오늘 우리는 신용카드나 스마트폰과의 일치라면 모를까 예수와의 일치는 외계인에게나 해당한다고 느낍니다. 저는 이 문제에 관해서 더는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은혜를 은혜로 아는 사람은 마치 사랑에 빠진 연인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고 싶어 하고, 친해지고 싶어 한다는 사실만 알면 됩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둘째 이유는 고난을 받게 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믿음만이 아니라 고난도 함께”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허공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과 역사에서 발생합니다. 바로 앞에서 우리는 역사 인물인 예수를 믿지 자신의 믿음을 믿는 게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념으로서의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는 실존적으로 살았습니다. 그에게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고 형제들이 있습니다. 그는 유대의 랍비 전통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과 충돌했습니다. 그들을 비판했고, 그들에게서 비판받았습니다. 나중에는 종교 재판을 받았고, 그들에 의해서 로마 법정으로 넘겨졌습니다. 로마 형법에 따라서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이렇게 역사에서 실제로 살았던 그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그를 따르는 제자로서의 고난까지 감수하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는 자기를 따라오려거든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자기의 인생을 부정하라는 말이 아니라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고난이 당연히 따라온다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 한편으로 불편해질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편하고 즐겁게 사는 걸 목표로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니까 오히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인도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교회는 속칭 삼박자 축복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예수 믿어 만사형통한다는 뜻입니다. 그걸 조금 세련된 개념으로 바꾸면 시민종교, 즉 부르주아 종교가 되는 겁니다. 미국교회가 대체로 그런 경향을 보입니다. 전무후무 기독교 베스트셀러가 된 릭 워렌 목사의 <목적이 이끄는 삶>이 그 전형입니다. 그런 주장을 무조건 부정하기도 어렵습니다. 미국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는 한국교회에도 이런 경향이 아주 강합니다. 기독교인들이 부르주아 계급으로 자리를 잡는 겁니다. 서울 강남에 있는 중대형 교회의 구성원들이 누군지를 보면 답이 나옵니다. 믿음과 고난이 함께한다는 말씀은 그들에게 아무런 울림이 없습니다.
복음의 싸움
바울은 기독교인의 고난 문제를 30절에서 더 확장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에게 고난이, 즉 복음을 위한 싸움이 있었고, 자신에게도 있었다고 말합니다. 30절을 들어보십시오. 바울의 말이 생생하게 들릴 겁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전에 그리스도를 위해서 싸우는 것을 보았고 또 지금도 계속해서 싸우고 있다는 것을 듣고 있을 터이지만 지금 여러분도 같은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아주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전투 중이라는 겁니다. 은혜를 받았다면 평화롭게 살아야지 싸우기는 왜 싸운다는 것일까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를 믿는다면 우리를 대적하는 모든 사람을 무조건 용서해야지 싸우기는 왜 싸운다는 말인가요? 여기서 싸운다는 말은 상대방을 헐뜯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라톤 시합에서 누가 1등을 하는지 경쟁하자는 게 아닙니다. 진리 논쟁입니다. 27절이 말하는 복음을 복음으로 살아내려는 사람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입니다. 복음을 변질시키고 왜곡하는 세력에 저항하는 겁니다. 바울은 이런 싸움을 가장 치열하게 살아낸 사람입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서 빌립보서를 쓰고 있습니다. 빌 1:12절과 13절에서 이를 밝혔습니다. “내가 당한 일”로 복음이 전파되었으며, “나의 매임”이 로마 경비대에 잘 알려졌다고 말했습니다. 17절에서도 그는 “나의 매임”을 언급합니다.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바울을 감옥으로 보냈지만 이런 방식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걸 자기는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을 감옥에 보낸 이들은 바울이 말하는 복음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로 유대교에 열광적인 이들과 기독교 신앙에서 바울과 의견을 달리했던 유대 기독교인들입니다. 이들을 가리켜서 바울은 빌 3:2-3절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이 문장으로만 본다면 바울이 싸우는 대상은 할례파입니다. 할례파는 예수를 믿으나 유대교의 율법도 좋은 건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입니다. 할례파가 빌립보 교회에도 들어와서 세력을 펼칠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기에 당연히 어렸을 때 할례를 받았습니다. 문제는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당시 기독교에서 심각하게 일어났습니다. 당시 주류 교회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 교회는 할례를 필수 조건으로 내세웠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주장을 거부했습니다. 할례 문제는 복음의 본질을 훼손시킨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지지해주는 세력은 별로 없었습니다. 고군분투하던 그는 결과를 알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그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자료가 기독교 역사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의 절박한 심정이 오늘 설교 본문에도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빌립보 교인 여러분과 저는 지금 복음을 위해서 싸우고 있습니다.”
당시의 할례 문제가 오늘 우리에게는 현실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런 문제가 다 해결된 이후의 교회를 다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이슈로서의 할례 문제는 지나갔으나 바울이 붙들었던 복음의 본질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를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참된 행복이 가능하냐, 아니면 세상이 말하는 행복한 삶의 조건들도 필요하냐는 논쟁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각자 대답이 다를 겁니다. 이런 문제는 아예 생각해보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다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온통 할례와 토라가, 즉 남보다 멋지게 사는 기술이 범람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다고 대답할 기독교인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복음을 듣지 못했으면 모르겠으나 들었으니 복음에 합당하게 살려는 노력만은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노력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구도적으로 가까이 가고,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싸움을 피하지 않겠다는 원칙에 충실한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기독교인은 언젠가 때가 되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라는 바울의 고백을 자신의 입으로 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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