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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공동체 예배란?]
(역대하 29:20-36)
히스기야와 백성들이 참된 공동체 예배의 모습을 보여준다.
어떤 것이 공동체의 참된 예배일까?
1. 리더가 우선 예배해야
변치 않는 너무나 중요한 예배의 원리가 있다.
리더가 예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하 29:20-21, 새번역) [20] 히스기야 왕은, 다음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도성에 있는 대신들을 불러모아, 주님의 성전으로 올라갔다. [21] 왕가의 죄와 유다 백성의 죄를 속죄받으려고, 그는 황소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와 어린 양 일곱 마리와 숫염소 일곱 마리를 끌어다가, 속죄제물을 삼고, 아론의 혈통을 이어받은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주님의 단에 드리게 하였다.
히스기야는 자신과 왕가의 죄와 유다 백성의 죄를 위해
모세의 율법에 따라 속죄제를 드렸다.
리더는 예배를 지시하기만 하거나,
예배의 인도자만 되고
백성들에게만 예배하도록 하고서는
공동체가 결코 바르게 예배할 수가 없다.
리더는 예배하는 척만 하면서
백성들에게는 참된 예배를 하게 하는 것도
결코 공동체를 올바른 예배로 세울 수 없다.
참된 공동체 예배의 시작은 리더가 올바른 예배자가 되는 것이다.
리더가 자신과 조상들의 죄를 속죄하는
참된 속죄의 예배를 드리고서야
공동체가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목사가 예배에서 리더라고 볼 수 있다면
목사가 예배 인도자만 되고,
참된 예배를 드리는 척 하기만 한다면
그 예배는 참된 예배가 될 가능성이 없어진다.
그런데 목사가 예배 인도자만 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너무 많은 것 같다.
리더가 예배 인도자일 뿐 아니라
참된 예배자가 되는 것이
공동체의 참된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작이 된다.
2. 회중이 예배해야
히스기야 왕이 예배하자 백성들도 예배했다.
(대하 29:27-28, 새번역) [27] 히스기야가 번제를 제단에 드리라고 명령하니, 번제가 시작되는 것과 함께, 주님께 드리는 찬양과, 나팔 소리와 이스라엘의 다윗 왕이 만든 악기 연주 소리가 울려 퍼졌다. [28] 온 회중이 함께 예배를 드렸다. 번제를 다 드리기까지 노래하는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고, 나팔 부는 사람들은 나팔을 불었다.
히스기야가 예배하라고 명령을 해서
예배의 분위기가 만들어졌고
온 회중은 그 분위기에 맞추어 함께 예배한 것이다.
그런데 리더가 예배하면 회중은 저절로 예배할까?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리더가 예배하라고 하고 그가 예배하고
예배의 분위기도 다 만들어 놓았으니
그 안에서 예배하는 척 할 수 있고
분위기에 취해서 자신도 예배한다고 착각할 수도 있지만,
참된 예배자가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참된 예배자가 된다는 것은
분위기에 취해서 예배 드린다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 본인이 자신의 죄의 심각성을 알고
속죄의 필요성을 깨닫아,
자신의 전인격적인 결단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다.
좋은 리더, 참된 예배자인 리더를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예배자 각자가 속죄의 필요를 느끼고
자신의 전인격으로 결단하여 드리야 참된 예배가 될 수 있다.
3. 먼저된 자가 나중될 수 있다
예배는 신앙생활을 오래한 사람이 더 잘 드리고
신앙의 연수가 낮은 사람은 잘 못 드릴까?
아니면 목사나 장로나 권사는 예배를 더 잘 드리고
일반 신자는 예배를 조금 더 못 드릴까?
신앙의 연수나 직책이 예배자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이 맞을까?
그럴 리가 없다.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신앙의 연수나 교회에서의 직분과 전혀 관계가 없다.
히스기야 왕의 시대에 예배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
(대하 29:34, 새번역) 그런데 번제로 바칠 짐승을 다 잡아 가죽을 벗기기에는 제사장의 수가 너무 모자라서, 이 일을 끝낼 때까지, 성결 예식을 마친 제사장들이 보강될 때까지, 제사장들의 친족인 레위 사람들이 제물 잡는 일을 거들었다. 사실, 자신들의 성결을 지키는 일에는, 제사장들보다는 레위 사람들이 더욱 성실하였다.
직분으로 본다면 제사장들은 제사를 집례하는 사람들,
레위 사람들은 성전을 돌보고
제사장의 집무를 도와주는 사람들이었다.
직분으로만 본다면 당연히
제사장들이 성결을 지키는 것에 있어서
가장 잘 하고 성실해야 했다.
그러나 레위 사람들이 자신들의 성경을 지키는 일에서
제사장들보다 더 성실했다고 성경이 기록한다.
왜 굳이 이 기록을 남긴 것일까?
거룩, 성결, 예배에 대한 태도는
직분과 상관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신앙의 연수도 아니고 직분도 아니다.
그럼 무엇이 중요할까?
'자신의 성경을 지킴에 있어서의 성실함'이 중요하다.
놀랍게도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성실함'이 강조된다.
사람들의 큰 착각이 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간절히' 예배하는 것이
참된 예배자의 자세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마음 자세가 틀린 것이 전혀 아니다.
꼭 필요한 마음 자세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그런 마음 자세가 저절로 가져지지 않고
항상 그런 마음 자세가 되는 것도 아니라는 문제다.
어떤 때는 간절한 마음으로 열심히 예배하지만
어떤 때는 간절한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
맹숭맹숭하게 예배하고 은혜를 받지 못한다.
왜 그런 일이 발생할까?
어떻게 하면 그런 일을 막고 항상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할 수 있을까?
참된 예배자가 되게 하는 것은
예배하는 순간에 '간절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그 순간에만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어떻게 늘 참되고 간절한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그 비결은 레위인들의 태도에서 배운다.
'자신의 성결에 대한 성실함'이 있어야 한다.
'성실함'이란 예배하는 순간에만 잘 하는 것을 의미할 수 없다.
'성실'이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것은 일상의 삶이다.
즉 일상에서 자신의 성결에 관심을 자져야
'성실함'이라는 단어가 적용될 수 있다.
일상에서 자신의 성결에 관심을 가질 때,
예배 때 참된 예배자로 예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신앙의 연수가 반드시 일상의 성결로 연결되지 않고,
직분도 일상의 거룩과 비례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되는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4. 일상에서 성결에 성실할 수 있는 방법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일상에서
자신의 성결에 성실할 수 있을까?
'성결' 이라는 단어와 '성실'이라는 단어를
각각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일상에서 '성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성결과 상관이 없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일상이다.
일상에서는 성결보다는 먹고 사는 것에 집중하게 되고
세상에서 생존하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성결 따위는 잊어 버리고 일주일을 살다가
주일이 되어서 예배의 자리로 간다.
일주일 동안 관심이 없던 성결이라는 주제가
갑자가 자신의 관심사가 되기는 어렵다.
그러니 예배에 참여하지만 참된 예배를 드리기가 어려워진다.
성결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해야 생길까?
간단하다.
일상을 똑같이 살아가지만
일상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죄에 깊이 빠지는지,
자신이 얼마나 죄를 사랑하는지를 만나야 한다.
그 사실을 적나라하게 만날수록
자신에게 절망하고
주님을 필요로 하게 된다.
주의 십자가가 날마다 새롭게 필요해진다.
주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이 생긴다.
즉 자신의 죄에 대한 민감도가
성결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되고,
그건 주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으로 연결된다.
그것이 예배에 대한 갈망으로 또한 연결된다.
그리고 '성실'이 또한 중요하다.
그렇게 자신의 죄에 대해 민감하고
자신의 성결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 삶을
하루만이 아니라, 가끔씩이 아니라
매일 하는 것이 '성실'이다.
경건은 언제나 '탁월성'이 아니라 '성실성'이 보장한다.
하루나 이틀이나 특정한 기간만이 아니라
매일 하는 것이 경건의 비결이고 성결의 비결이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좋은 경건의 훈련인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리더도 직분자도 평신도도
모두가 일상에서 자신의 죄와 성결에 대해 관심을 갖고,
매일 성실하게 말씀을 묵상하는 공동체가
가장 참된 예배 공동체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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