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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8:43-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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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8장 43절-49절: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옷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하거늘.
43절-44절: 혈루증 병든 여자가 피를 아래로 자꾸 쏟고 있다. 이건 병이다. 계속 피를 흘리면 그 여자의 일생은 죽는다. 성경은 복합적인 계시가 들어있는 것인데 이것을 혈루병만으로 생각을 하면 일반적인 생각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 아무 차이가 없다. 글자대로 생각을 하니까. 우리는 좀 더 나가서 사람의 몸에 피가 빠져나가면 그 사람은 죽는다. 그러니까 자기를 살리고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건강이 보존되어 나가야 하는 것인데 피가 빠져나간다는 것은 그게 안 되고 있는 거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매일 먹어도, 돈을 써도 그게 자꾸 피로 빠져나가 버린다. 노력하고 돈을 번 게 건설이 안 돼 간다. 사망으로 자꾸 빠져나가니까.
우리는 좀 더 크게 생각을 해서 우리의 전폭의 삶이 선악과 따먹은 차원에서 많이 살고 있는데 이것은 혈루증 병이 든 거다. 이렇게 되면 그의 삶 전부는 사망으로 흐른다. 심판으로 다 흐른다. 산 보람이 없다. 예수 믿은 보람이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서 자기 전폭의 삶이 구원의 정신 삶의 소원 목적으로 영생으로 영원으로 전부 통일을 시키고 올려놔야 한다. 그런 면에서 자기의 삶을 자연적 일생으로 마치게 하면 안 된다. 즉 일반사람들이 사는 그런 사고방식 소원 목적을 가지고 살면 안 된다.
성경을 볼 때 이중 삼중의 뜻이 나오는 거다. 주님이 병든 여자를 등용시킨 것은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의 밥 먹고 마시고 하는 모든 활동이 생명적으로 들어가야 할 텐데 사망적으로 빠지는 것은 병이요 일생 단축이다. 이룰구원이 없다.
혈루증 병든 여자는 자기 생명이 단축되어 가는 판국인데 무리 중에 누구를 붙잡고 시시비를 하겠느냐? 이것을 우리 삶의 영역으로 끌어들여서 생각을 하면 내가 죽어 들어가는 판국인데 누굴 붙잡고 시시비하고 그런 것을 잡고 늘어지겠느냐? 누가 여자 자기 발을 밟았다고 시비하고 싸우겠느냐? 이 남자 저 남자를 쳐다보고 윙크를 하겠느냐? 다 비켜라. 내가 고침을 받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그런 여자의 마음을 모르실까? 아신다. 가까이 가서 예수님의 옷이라도 만지면 낫겠다는 그 마음도 예수님이 아신다.
오늘날 이 자리에서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예수님은 다 아신다. 그래서 진리이치를 밝히 알면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이게 어느 라인에 있는 건지를 안다. 중심라인에 있는 건지, 바깥 라인에 있는 건지, 이게 헤매 돌고 도는 건지 나오는 거다. 무슨 마음을 보고 그런 게 아니라 말씀의 이치에 의해서 그게 나온다. 진리이치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다 귀신노릇이다.
가까이 가서 예수님의 옷이라도 만지면 낫겠다고 생각을 하고 가까이 가려고 하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나 둘러싸고 있는지? 창세 이후 마지막까지의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둘러싸고 있는지? 그러던 말든 여자는 사람들 틈으로 비집고 들어간다. 말하자면 여자의 심정이 지금 그렇다 그 말이다.
사람들 틈으로 비집고 들어가서 예수님의 옷가를 만진 그 노력 그 마음을 생각을 해 봐라. 그리고 만지는 즉시, 접촉 즉시 혈루증 고통이 고쳐졌다. 멈췄다. 그러니 여자 스스로 얼마나 날나갈 듯이 상쾌했을까?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45절-46절: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몰라서 묻는 것이냐? 아신다. 여자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도둑질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마음속에서 얼마나 콩닥거렸을까? 이 때 베드로의 말이 ‘무리들이 옹위하여 몰려드니까 그렇습니다’ 라고 했다. 여자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베드로의 말을 듣고 ‘그냥 그렇거니’ 하고 넘어갔으면 좋겠는데 그게 아니다.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내게서 능력이 나갔도다’ 한다. 그런데 여자가 예수님을 능력을 빼 가려고 한 것은 아니다.
이 여자가 자기 병이 나으려고 손을 ‘딱’ 하고 예수님께 댔겠느냐? 만지려면 옷가를 만지지 옷 속으로 손을 넣고 몸을 만졌겠느냐? 옷가를 살짝 스쳤을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살짝 스친 그것도 아시는구나.
오늘날 자기의 생각이 예수님과 정면으로 맞닥뜨리지 않고 살짝 스쳐가도 예수님은 그것을 아실까? 아신다. 대립되는 것만 아느냐? 아니다. 인격 대 인격이 통할 때만이 아니라 살짝 스쳐가는 것도 아신다. 예수님은 바람이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로 가는 지도 아신다.
47절-48절: 여자가 스스로 숨길 수 없음을 알고 떨며 손 댄 연고와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한다. 그러니까 ‘내 능력이 나갔다’고 한다. 그러면 이것이 마치 돈의 동전이 하나 둘 빠져나간 것처럼 예수님의 능력이 빠져 나갈수록 예수님의 힘이 없어지는 것이냐? 그건 아니다. ‘내게서 능력이 나갔도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나간 능력은 무슨 역사를 일으키며, 그 능력의 결과가 어떤 것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당신의 능력은 어떤 능력이냐? 생명적 능력이요 영생으로 일으키는 역사가 들어있다. 그걸 아시기 때문에 그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어느 누가 진짜 거룩한 예수님의 능력을 도적질할 수 있겠느냐?
아무렴 예수님이 당신의 능력을 도적맞은 줄도 모르는 분일까? 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신의 이름을 가지고 누가 어디에 써먹는지도 아신다. 공갈 협박에 써먹는지, 무당 짓을 하는데 써먹는지, 세상 소원 목적에다 써먹는지, 누가 마귀 짓을 하는지 예수님은 아신다.
인간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써먹어도 예수님이 좋아하실까? 성경에 보니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했다. 누구든지 당신의 이름을 가지고 장난을 하면 당신의 이름이 전도가 되니까 예수님이 좋아하실까? 그건 아니다.
그리고 혈루증 여자를 두고 자기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무엇이 얼마나 생명계로 이전이 되었으며, 또 무엇이 얼마나 사망계로 빠져나갔는지 잘 봐라. 밥을 먹어도 헛 밥을 먹는 게 있느냐? 노력을 해서 재산을 쌓아놨는데 불이 나서 다 타버리면 헛 노력이 된 거다. 세상에는 헛 밥 먹은 것도 있고 헛 나이 먹은 것도 있다. 헛 사는 것도 있다.
우리 입장에서는 무엇이 얼마나 생명계로 이전이 되었고, 자기 일생을 놓고 이때까지 무엇이 얼마나 사망계로 빠져나갔는지 본문을 보면서 생각을 하라. 그리고 신앙 양심적으로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사람을 다 몰라도 자기의 일생이 얼마나 생명계로 이전이 되었고, 얼마나 사명계로 빠져나갔는지 이런 면을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지은 목적에 대해 수치스러움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이건 영감이 아니면 못 느낀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은 졸업할 때 선물이나 상을 잔뜩 받는데 제 멋대로 논 사람은 부끄럽느냐? 부끄러우면 졸업식장에 가지도 않는다. 공부를 잘 했고 상도 많고 자랑스럽다면 다른 일을 뒤로 미루고 상을 타러 간다.
나는 아버지가 중풍 병이 들어서 초등학교 졸업도 못했다. 그러니 졸업 때도 안 갔다. 어떻게 가느냐? 무슨 얼굴로 가느냐? 지금 말하자면 이런 게 자랑이 아니라 그런 거는 세상에 대해서 따지는 거고,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가서 ‘너 초등학교 졸업장이 있느냐, 없느냐?’ 그걸 가지고 따지겠느냐?
그러니까 가정 상황이든지 자기의 일생에서 여의치 못해서 공부를 못했다든지 상황이 안됐다든지 그런 걸 가지고 부끄러워하지를 말아라. 우리에게는 성경이 있다. 성경에서 희망을 걸고 뛰어나가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들어 쓰시기도 하고 한다. 그래서 성경에 ‘먼저 된 자가 나중이 되고’, 또 ‘세상의 지식인들을 부끄럽게 한다’는 게 있느냐? 그게 바로 그런 면이다.
하나님 앞에서 ‘그래도요’ 이거는 없다. 그 외의 것은 자기가 지혜롭게 할 탓이다. 어쨌든 예수 믿는 사람이란다면 하나님 앞에서 영광과 부끄러움을 찾을 줄 알아야 한다. 인간 앞에서 찾으려고 하면 믿음이 안 들어간다. 성령님의 역사는 없다.
내가 초등학교 졸업을 못했는데,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으나 경상도 통영에는 자개사들이 많았는데 그곳의 자개제품은 세계적인 것인데 그 때 내가 워낙 못 살아서 거기에 들어갔는데 거기에서 일을 하려면 영어는 기본이고 댓상도 해야 했다. 그리고 꽃이 필 때가 되면 꽃을 갖다가 그대로 정물화도 그리고 했다. 어쨌든 그림을 내가 제일 잘 그렸다.
정물화를 그릴 줄을 알아야 자개도안을 할 수가 있는데, 내가 도안을 해 가지고 자개사들에게 주면 자개사들이 도안대로 자개를 썰어서 상에도 붙이고 농에도 붙이고 꽃병에도 붙이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또 옷칠도 했는데 군함 밑에 옷칠을 해 놓으면 안 썩고 조개 같은 게 안 달라붙는다.
내가 그림을 잘 그리니까 가르쳐 주는 선생들이 세계적인 그림을 그리고 공예도 하는 그런 사람들인데 나를 데리고 일본에 같이 가자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일을 하면서 궂은일을 한다고 ‘에이, 못 해 먹겠다’ 그런 건 안 된다. 남의 집에서 월급 타먹고 일을 하려면 이런 저런 소리를 다 들을 줄 알아야 하고 그걸 다 소화시킬 줄 알아야 한다. 한 편으로는 그런 것을 밑거름으로 하고 ‘그래,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다’ 하고 솟구쳐서 올라오는 생산적인 사상 정신이 돼야 한다. 안 그런다면 세상 어디를 간들 자기를 용상에 앉혀주고 그런 세상은 없다.
예수 믿는 것은 개척이고 정복이고 그래야 한다. 배짱 가지고는 안 된다. 이게 안 되면 자기 평생 고난이요 고통이요 남에게 좋은 소리 못 듣는다. 우리교회에 다니는 분들은 빌빌거리면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자기 마음을 궂히고 세워야 한다. 인생 금방 간다. 말씀 속에서 자기의 인생이 꽃이 피어야 한다. 주님의 약속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 라고 한 말이 상황이 그러니 그렇게 보통으로 한 말이지만 그러나 베드로의 그 말에 대해 ‘예수님께서 능력이 나갈 줄 앎이로다’ 라고 하셨는데, 주님으로부터 능력이 나간다는 것은 보통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말하자면 교회에 앉아서 설교를 듣는 건 어느 교회에 가나 보통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에게 와서 역사가 된다는 것은 보통의 역사가 아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하는 게 그냥 교회에 와서 시간 땜하고, 보통으로 교회에 왔다 갔다 하는 거냐 ? 그건 희망이 없다.
여자의 혈루증이 나음을 받는다는 게 어떻게 보통으로 되는 것이냐? 자기의 일생이, 자기의 소원 목적이 정신이 바뀌는 게 어떻게 보통으로 되는 것이냐?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 예수 믿는 일을 흔해빠진 보통 일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러면 너는 보통밖에 안 된다. 하나님 앞에 나온다는 게 보통 생각이냐? 학교에서 선생님이 자기 이름을 부른다든지, 선생님이 자기 부모님을 오라고 한다든지, 아니면 법정에서 자기를 오라고 한다면 그게 보통 일이냐?
무리의 정신을 가진 자들은 보통으로 예수를 따르겠으나 여자의 정신과 마음과 소원 목적은 보통이 아닌 거다. 계시적으로 보면 특별한 수준 높은 마음이요 믿음이다. 무리의 정신을 가지면 흔해빠진 믿음이요 믿는 효력을 못 보지만 특수한 정신 사상을 가진다면 그 사람은 믿는 효력을 보게 된다.
주님으로부터는 항상 능력이 나오고 있다. 주님은 그걸 아신다. 항상 능력이 나오고 있는데 이것을 무리들도 몰랐고, 45절에 보면 제자들도 몰랐고, 46절에 보면 여자도 몰랐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알고 있어서 그 효력을 보고 있느냐? 성령님은 지금도 계신다. 마귀도 지금도 옆으로 왔다 갔다 한다.
여자는 무리들 틈에 있었다. 하지만 소원 목적은 무리들과는 달랐다. 여자의 소원성은 예수님의 소원성에 적중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주님의 능력에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주님의 그 능력의 효력을 입게 된 것이다. 적중성이라야 그게 되는 거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여자를 무시했느냐? 무시 안 했다.
예수님의 능력을 입은 자는 예수님을 속일 수 없고 사람들 앞에서도 속일 수 없는 거다. 왜? 그 효력성을 증거해야 한다. 여자는 숨어 있으려고 했으나 예수님은 기어코 찾아내어서 무리들 앞에 낱낱이 증거하게 한 것은 창피를 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만사람 앞에 여자의 믿음을 자랑시키려고 한 것이다.
여자는 생명이 값없이 사망으로 흐르는 이것을 멈추는 것이 구원인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 이 구원이란 하나님과 의사 일치되는 삶을 큰 축복으로 받은 것을 말한다. 그래서 평안히 가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의사 일치되는 삶을 큰 축복으로 받는 이것이 평안히 가라이다. 이게 축복이다. 평안은 하나님과 의사 일치성에서 온 삶이다. 하나님과 의사 일치성으로 살아가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사망으로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분이다. 구약에 법궤를 메고 요단강물에 들어서니 죽음의 바다 사해로 흐르는 강물이 멈추어 선 것과 같은 이치다. 이게 기독교요 신앙 믿음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할 때 항상 기본구원을 깔고 이룰구원의 차원에서 교훈이 들어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기본구원은 당신의 주권에 매인 것이니까 그냥 ‘지옥에서 천국으로 가는구나’ 하는 기본구원으로만 붙이지 말고 말씀이 받아들여지고 믿어진다는 것은 벌써 이룰구원 차원으로 들어가는 거다. 그 차원에서의 말이 되는 거다. 그러지 않고 그걸 기본구원에 붙이면 교리적으로 문제가 생긴다. 이치가 안 맞는다.
49절: 여자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시간이 얼마나 지연이 됐을까? 회당장 야이로는 얼마나 마음이 탔을까? 하나 밖에 없는 우리 외동딸이 죽으면 안 되는데! 예수님이 아버지의 그 마음을 모르실까? 아니나 나를까? 집에서 전갈이 왔다. 딸이 죽었다고. 이 소리를 듣자마자 눈앞이 캄캄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통곡을 하면서 예수님을 떠나가지 않겠느냐? 그리고 떠나가서 하는 말이 ‘그 여자만 아니었다면 우리 딸이 살았을 텐데’ 할 것이다. ‘예수만 믿으면 뭔가 세상 일이 잘 될 줄 알았는데 믿는 것도 헛 것이구나. 예수님을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 이제는 내 마음대로 살다 가자.’ 현재 자기가 그런 무리들 중의 하나인가?
부모가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 뭐가 잘 된다’ 하고 믿고 자식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는데 부모가 그렇게 믿었어도 별 효력을 못 보니까 자식들에게 ‘너희들은 예수 믿건 말건 마음대로 하라’ 하고 죽으면 그 후의 자자손손이 좋은 일이 나오겠느냐?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이게 무슨 말이냐? 말 표현은 그런 것이지만 주님의 입장에서 야이로의 아버지를 봤을 때 ‘그런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하는 게 들어있다. 그런 사람들의 소리를 듣지 말라는 주님의 무음을 느낄 수 있는 거다. 왜? 그 뒤에 당신이 하신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주님의 역사는 인간의 말에 따르는 게 아니다. 당신의 역사는 당신 스스로에게 들어있다. 인간의 사고방식에 들어있는 게 아니다. 이것만큼은 믿어라. 이룰구원의 차원에서 보는 신앙의 삶은 당신의 역사요 당신이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적중된 진리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면 되는 것이다. 만들어져 나가면 당신이 다 하신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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