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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5: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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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27825 설교보기 :https://youtu.be/-Hh6KIGtPhc |
생명 완성의 때
마 25:1-13, 창조절 열째 주일, 2020년 11월8일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오늘 설교 본문에 나오는 ‘천국’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 어떤 느낌이 듭니까? 우리 현실과 동떨어진 단어라는 생각이 먼저 들 겁니다. 천국은 헬라어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의 번역입니다. ‘하늘나라’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와 비슷한 뜻의 다른 단어는 하나님 나라, 즉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입니다. 이 두 표현에는 똑같이 ‘바실레이아’(kingdom)라는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바실레이아에는 나라, 통치, 다스림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공간이 아니라 운동의 성격이 강한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지구나 우주의 어느 한 공간을 차지하는 존재가 아니라 생명과 존재를 다스리는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그 다스림을 직접 묘사할 수 없기에 예수님은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그런 비유가 복음서에 많이 나옵니다. 오늘 설교 본문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마 25:1절은 하늘나라가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명의 처녀와 같다고 말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늘나라는 열 처녀가 혼인 잔치에서 당한 사건과 같다고 해야 합니다. 다섯 명은 등만 준비했지만, 다른 다섯은 등과 기름을 다 준비했습니다.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신붓집으로 오면 동네 젊은 여자들이 불을 밝히고 춤을 춥니다. 그날은 신랑 도착이 특히 늦었나 봅니다. 열 명의 여자들이 졸다가 신랑이 도착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제 불을 밝히고 춤을 춰야 합니다. 본문에는 등이라고 했지만 횃불이라고 보는 게 맞습니다. 당시 횃불은 15분 정도 타다가 꺼집니다. 춤을 출 수 있는 시간이 짧기에 모든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친구들에게 기름을 나눠주면 횃불을 밝힐 시간이 반도 안 되기에 혼인 잔치 자체가 진행될 수 없습니다. 다섯 명의 여자가 기름을 사러 나간 사이에 혼인 잔칫집의 문은 닫히고 말았습니다. 이 여자들이 와서 문을 열어 달라고 말했으나 주인은, 또는 혼인 잔치를 책임지는 집사일지 모르겠는데, 냉정하게 거절했습니다. “내가 당신들을 알지 못한다.”
이 비유에 두 가지 특이 사항이 두 가지 나옵니다. 똑똑한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제기할만한 것들입니다. 하나는 친구가 기름을 나눠달라고 했을 때 거절하는 일은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나지 않느냐라는 문제 제기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춤출 시간이 비록 반으로 준다고 하더라도 혼인 축제를 함께 준비한 친구의 요구를 들어주는 게 마땅해 보입니다. 다른 하나는 기름을 사러 나갔다가 조금 늦게 돌아온 다섯 명의 젊은 춤꾼들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 주인이 너무 야박하다는 문제 제기입니다. 비유는 메타포(은유) 방식의 글쓰기이기에 과장이나 비약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문제 제기도 그런 과장과 비약에 속합니다. 결정적이고 절대적인 사건 앞에서는 일반적인 윤리나 상식이 개입될 수 없기에 이런 과장이나 비약의 방식으로 묘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정적이고 절대적인 사건이 우리 일상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십시오. 여기 공황 장애를 앓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시시로 숨이 막힙니다. 그런 현상이 벌어지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의 숨을 대신해 줄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기름을 나눠줄 수 없다고 말한 다섯 명의 젊은 여자들도 그런 입장입니다. 여기 만취자가 운전하다가 큰 사고를 냈다고 합시다. 그의 가족이 경찰서에 가서 그가 술을 마셨으니 차를 운전하지 못하게 해야 했지 않았냐고 따져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본문에서 잔칫집 문이 닫힌 다음에는 열어주고 싶어도 열어줄 수 없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도 돌릴 수 없는 일들은 많습니다.
재림 신앙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이 전하려는 메시지의 핵심은 13절에 나옵니다. 이 구절만 정확하게 안다면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안다고 해도 잘못이 아닙니다. 제가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상투적인 경구로 여기지 말고 처음 접하는 말씀으로 들어보십시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날’과 ‘때’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날과 때는 신랑이 신붓집에 도착하는 그 순간을 가리킵니다. 그 순간에 혼인을 축하하는 축제가 시작합니다. 어두웠던 신붓집에 횃불이 밝혀집니다. 풍악을 울리고 춤도 춥니다. 본문이 말하는 날과 때는 생명이 완성되는 때를,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되는 때를, 궁극의 비밀이 드러나는 때를 가리킵니다. 철학적인 방식으로 말해서 “왜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고, 무는 도대체 왜 없는가?”라는 질문의 답이 주어지는 순간입니다. 구원의 실체가 드러나는 예수 재림의 순간입니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의 예수 재림 신앙을 유치하다고 여깁니다. 지금 사는 이 세상이 중요하지, 왜 종말과 생명 완성 운운하느냐고 말입니다. 그것보다는 여기서 열심히 사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기독교의 재림 신앙은 오늘의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다 일리가 있는 비판입니다. 일리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세계를 그들이 오해하기에 이런 비판이 나옵니다. 이런 주장과 비판과 논란에서 관건은 생명 완성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생명 완성을 행복한 삶이라고 바꿔서 생각해도 됩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기독교를 비판하거나 냉소적으로 바라보거나 무관심한 이들도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열심히 일합니다. 그 시대가 제시하는 행복한 삶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특별하게 욕심이 많은 사람을 제외하고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한 삶은 돈과 건강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여러분도 주변에서 흔히 들을 겁니다. 부자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을 정도의 돈과 자기 몸을 추스를 수 있는 건강만 있으면 남부러울 게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정치가 추구하는 복지사회도 이 두 가지를 기본으로 합니다.
돈과 건강이라는 행복한 조건만으로 행복을 얻은 사람은 없습니다. 행복하다고 여길 뿐입니다. 좋게 보면 순진한 생각이고, 냉정하게 보면 자기를 속이는 겁니다. 어린아이들은 군것질거리와 장난감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여깁니다. 어른이 되었는데도 군것질거리와 장난감만 찾는다면 정상이 아닙니다. 현대인은 지식인으로 살지만 실제로는 어린아이처럼 삽니다. 그렇게 살아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다행입니다. 다행이기는 하지만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계속해서 군것질거리를 찾으면서 목말라 하기 때문입니다. 죽을 때까지 그런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반면에 영적으로 어른이 된 사람은 그런 삶에 머물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행복이 무엇인지를 계속 찾습니다. 기독교 교부 중에서 어떤 이들이 사막으로 나간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군것질거리와 건강만으로 행복할 수 있다면 불교 창시자인 싯다르타가 왕자의 신분을 포기하고 구도의 길에 나서지 않았을 겁니다.
순진하기는 하나 삶을 전체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사는 사람에게 돈과 건강에만 매달리지 말고 참된 생명을 바라보라고 아무리 말해야 소용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어른이 되지 않으면 참된 생명의 완성이라는 말은 헛소리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미 말한 것처럼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어른으로 산다는 뜻입니다(고전 13:11). 초등학문, 즉 세상의 지식 아래서 종노릇 하지 않는 것입니다(갈 4:3).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구원, 즉 생명 완성에 마음을 두고 삽니다. 그 생명 완성의 순간을 가리켜서 오늘 본문은 그 ‘날’과 그 ‘때’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말 성경인 개역개정과 달리 KJV과 루터 성경은 그 ‘날’과 그 ‘때’에 관계절을 하나 덧붙였습니다. “인자가 온다.”라는 관계절입니다. “너희는 인자가 오실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어떤 사본을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 겁니다. 우리말 ‘인자’는 영어 성경의 son of man에 해당합니다. 마 24:44절에 마 25:13절과 비슷한 내용의 표현이 나옵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구약에 나오는 인자는 세상 마지막 때에 이 세상에 와서 심판을 통해서 생명을 완성할 어떤 특별한 존재를 가리킵니다. 초기 기독교에 의해서 그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구원이 실행되고 완성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은 그 날과 그 때를 기다립니다.
숨겨진 날과 때
13절은 인자가 올 날과 때를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날과 때를 우리가 결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에서 신랑이 언제 올지 예측할 수 없는 경우와 같습니다. 이런 표현이 우리 삶과 거리가 먼 동화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선승 불교에서 예를 들어야겠습니다. 선승 전통에서 사는 구도자들은 화두를 붙들고 용맹정진합니다. 어느 순간에 돈오(頓悟)를 경험합니다. 돈오는 삶의 본질과 이치를 크게 깨치는 것입니다. 득도를 가리킵니다. 언제 그런 일이 벌어질지는 본인도 모르고 그의 스승도 모릅니다. 기다리다가 경험할 뿐입니다. 그 과정이 답답해서 많은 구도자는 화두 잡기를 포기합니다. 세상살이와 비슷합니다. 삶의 충만함이 언제 경험될지 몰라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일상에 파묻혀서 삽니다. 그것으로 만족이 안 되니 그 일상에 더 몰두합니다. 일상의 과잉 현상입니다. 일상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기에 소중하지만 그것의 과잉은 우리 영혼을 과부하에 걸리게 합니다. 대한민국의 정치 과잉도 이런 현상의 하나가 아닐는지요.
언제부터인가 인류 사회에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정치와 경제와 문화의 세계화를 실감합니다. 인터넷 시대가 이런 세계화를 더 촉진했습니다. 너무 많은 정보가 우리의 삶을 지배합니다. 미국 대통령 선거를 실시간으로 우리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대통령 선거가 우리에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거기에 매달립니까. 연예인이나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뭐하러 그렇게 자세하게 알아야 하는지요. 우리가 생명을 얻는 데에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방해됩니다. 저는 마음 같아서는 국내외 모든 뉴스를 안 보며 살고 싶습니다. 물론 지금도 일반 뉴스는 안 보고 인터넷에서 중요한 뉴스만 챙겨보지만, 그것도 다 끊고 싶습니다. 설교자로 살기에 세상 돌아가는 걸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하기에 최소한으로 보고 있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범유행은 이런 세계화 현상에 제동을 걸어준다는 점에서 좋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더는 몰려다니지 않게 되었습니다. 국내외 여행이 크게 줄었다고 합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불행해지지 않았습니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이 늘어나니까 생명의 근본에 대해 질문하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늘어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을 빌리면 신랑이 도착할 날과 때에 관해서 더 집중하는 것입니다.
열 명의 젊은 여자들은 신랑이 올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신랑이 도착해서 혼인 잔치를 시작하면 춤을 춰야 합니다. 정말 즐거운 순간입니다. 하나님 경험이 이와 같습니다. 저는 몸치라서 거룩한 혼인 잔치에 어울리지 않긴 합니다. 제가 직접 춤을 추지 않더라도 춤을 추는 사람을 보고 함께 즐거워할 수는 있습니다. 어쩌면 제가 알지 못하는 춤을 추게 될지 모릅니다. 기쁨으로 충만한 사람은 춤을 추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신랑을 기다리던 젊은 여성들은 신랑의 도착이 늦어져서 졸았습니다. 예수 재림의 지연으로 인해서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이 나태해진 상황을 마태복음 기자가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춤을 추는 생명의 축제를 절실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면 아무리 피곤해도 졸지는 않았을 겁니다. 우리 일상의 삶이 지루하고 피곤해서 잠시 졸 수는 있으나 기름 준비는 게을리하지 않을 겁니다.
깨어 있으라
그래서 13절은 “깨어 있으라.”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자주 들었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체포당하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깨어서 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밤잠을 줄이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현재 자기 인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제정신을 차리는 게 생각보다는 쉽지 않습니다.
몇 주 전에 저는 설교하면서 산티아고 순례를 한번 다녀오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날 상황이 여러 가지로 좋지 않습니다. 순례길을 떠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이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체력이 닿는 국내 순례길을 찾아봐야겠습니다. 실제로 순례를 다녀오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남은 인생은 더욱더 그런 태도로 살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젊은 교우들도 미리 그런 태도로 살면 좋겠지요. 그게 바로 깨어 있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순례에 나선 사람은 걷는 과정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천천히 걷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리기에 급하게 서두르다가는 중간에 낙오합니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산티아고라는 목표에 대한 집중력입니다. 다른 것은 다 지나갑니다. 중간에 만나는 사람들과도 다 헤어집니다. 좋은 일도 지나가고 나쁜 일도 지나갑니다. 산티아고로 가는 그 과정만 남습니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앞으로 어떤 일이 저에게 벌어질지가 기대됩니다. 가난해져도 좋습니다. 지금처럼 넓은 집이 아니라 원룸에 살게 되더라도 괜찮을 겁니다. 건강을 잃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물론 이런 일들이 불편하고 힘든 건 분명하겠으나 모든 일이 지나가는 과정이니 보기에 따라서 다 새로운 경험이 아니겠습니까. 마지막에는 산티아고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기에 집중하는 삶이야말로 깨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지금 저는 저의 설교가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에게 너무 한가한 말로 들릴지 모른다는 걱정이 듭니다. 월세나 전세로 사는 사람들이 폭등하는 아파트 소식을 들을 때 얼마나 낙심이 크겠습니까. 어린 자녀가 어려운 병으로 수술을 받은 부모에게 그런 일 역시 다 지나가는 과정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이 귀에 들리겠습니까. 그 어려움이 간단히 해결될 수 있다고 설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문제는 각자, 또는 서로 연대해서 투쟁해나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삶이 힘든 분들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힘을 주실 터이니 버텨낼 수 있을 때까지 버텨내고, 일이 잘 풀려서 삶이 즐거운 분들은 그것도 곧 끝나고 말 터이니 거기에 안주하지 마십시오. 어떤 형편에서 살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축제가 혼인 잔치처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뿐 아니라 이미 지금 여기 우리의 인생살이에 은폐의 방식으로 혼인 잔치가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춤출 순간이 눈앞에 닥쳤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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