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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욥39: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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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기석 목사 |
참고 : | 청파감리교회 http://www.chungpa.or.kr |
너는 아느냐?
욥39:1-8
(2020/06/07, 삼위일체 주일, 환경선교주일)
[너는 산에 사는 염소가 언제 새끼를 치는지 아느냐? 들사슴이 새끼를 낳는 것을 지켜 본 일이 있느냐? 들사슴이 몇 달 만에 만삭이 되는지 아느냐? 언제 새끼를 낳는지 아느냐? 언제 구푸려서 새끼를 낳는지를 아느냐? 낳은 새끼를 언제 광야에다가 풀어 놓는지를 아느냐? 그 새끼들은 튼튼하게 자라나면, 어미 곁을 떠나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누가 들나귀를 놓아 주어서 자유롭게 해주었느냐? 누가 날쌘 나귀에게 매인 줄을 풀어 주어서, 마음대로 뛰놀게 하였느냐? 들판을 집으로 삼게 하고 소금기 있는 땅을 살 곳으로 삼게 한 것은, 바로 나다. 들나귀가 시끄러운 성읍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아무도 들나귀를 길들이지 못하고, 일을 시키지도 못한다. 산은 들나귀가 마음껏 풀을 뜯는 초장이다. 푸른 풀은 들나귀가 찾는 먹이다.]
∙기후 위기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예배에 임하는 모든 교우님들께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6월 5일은 환경 보호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UN이 제정한 ‘세계 환경의 날’이었습니다. 환경(environment)이라는 말 속에 이미 인간 중심주의가 숨어 있다 하여 ‘생태계’(biosphere)라는 용어를 사용하자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 되었건 지금 우리는 매우 심각한 상황에 놓인 것이 분명합니다. 얼마 전부터 ‘기후 변화‘(climate change)라는 말보다 ‘기후 위기’(climate crisis)라는 말이 훨씬 더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녹아내리는 빙하, 해수면 상승, 잦은 폭염과 가뭄, 홍수, 토네이도, 세계를 위협하는 감염병, 식량 위기 등이 지구촌에 사는 모든 이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작년 9월부터 시작되어 근 6개월 지속된 호주의 대형 산불을 기억하시지요? 그 산불로 무력 12억 5천 마리의 야생동물들이 죽었고, 남한 면적보다 훨씬 넓은 약12만km²의 삼림이 소실되었습니다. 산불로 인한 피해 및 복구비용은 80조원이 넘을 전망이라 합니다.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우리는 코로나19 사태를 맞이했습니다. 그렇게 작은 바이러스가 이렇게 짧은 시간에 세상 전체를 멈춰 세울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많은 학자들은 이 사태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착취와 개발이 빚어낸 참극으로 보고 있습니다. 1900년만 해도 인간이 사는 땅은 지구의 14%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77%에 이른다고 합니다. 개발로 인해 동물 세계와 인간 세계를 구별하던 점이지대가 사라지자, 동물들 속에 기생하고 있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로 넘어왔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 영국 신문인 가디언에 침팬지 연구로 유명한 제인 구달 박사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습니다. 제인 구달은 동물들의 서식지 파괴가 계속되고 공장식 축산이 지속된다면 인간의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지나치게 비관적 전망인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그런 선구자들의 경종을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코로나19는 폭주를 거듭하던 인간 문명에 대한 일종의 멈춤 신호입니다. 파국의 예보입니다. 폭염, 미세먼지, 가뭄, 산불, 생물 다양성의 파괴가 결국은 인간의 파괴를 낳으리라는 사실을 섬뜩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제6의 멸종을 말합니다. 인간의 활동이 지구 환경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는 의미에서 사람들은 이 시대를 인류세(Anthropocene)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희망의 조짐을 보았습니다. 코로나19로 인간의 생산 활동과 이동이 줄어들자 대기가 맑아지고, 수질이 향상되고, 자연 생태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습니다. 겨울부터 봄까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던 미세먼지가 줄어든 것을 실감합니다. 기후 위기라는 거대한 흐름을 되돌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것은 거대한 문명사적 도전인 동시에 기독교인들의 소명입니다.
∙당연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이 말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숨결로부터 나왔다고 믿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우리의 고백이 진실하다면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몸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연은 인간의 통치에 맡겨진 피조물일 뿐이라고, 자연을 신비화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단순히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이 아니라 중세의 교권 질서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자연의 작동 원리를 깊이 이해하지 못했던 중세 사람들은 자연의 파괴적 움직임을 신의 노여움으로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렇기에 신에게 가까이 있다고 믿어졌던 사제들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신의 노여움을 진정시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번개가 치는 것을 보면서 신의 노여움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번개란 수증기를 머금은 구름에서 생기는 전기적 현상임을 알게 될 때 더 이상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겁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은 제대로 알아야 부당하게 휘둘리지 않는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연 세계를 지배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인간의 오만입니다. 생명은 하나의 그물망으로 엮여 있습니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삽니다. 동물과 식물, 곤충이나 미생물이 없다면 우리도 살 수 없습니다. 동물들은 식물이 광합성을 통해 만들어낸 잎과 열매를 먹고 삽니다. 육식동물과 인간은 식물과 동물을 먹이로 삼고 살다가 세상을 떠납니다. 미생물들은 남겨진 사체들을 분해하여 양분으로 만듭니다. 생산자-소비자-분해자가 저마다의 역할을 잘 감당할 때 세상은 유지됩니다.
저만 잘나고 영리한 체 하지만 꼭 알아야 할 것은 알지 못하는 사람을 일러 윤똑똑이라 합니다. 베이컨 이후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임을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오늘의 현실입니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모를 때 삶은 빈곤해집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고백하면서도 우리는 주변 세계에 참 무관심합니다. 오늘 본문은 욥기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 구절들입니다. 그러나 지금 제게 이 본문은 매우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영문 모를 고난의 현실 앞에서 비틀거리며 절망의 심연으로 끌려 들어가던 욥은 하나님이 자기 앞에 나타나서 시원한 답을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내 구원자가 살아 계신다. 나를 돌보시는 그가 땅 위에 우뚝 서실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내 살갗이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내 육체가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나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다”(욥19:25-26).
욥은 주님을 뵙는 순간 인생의 모든 수수께끼가 풀릴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마침내 주님이 폭풍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이 겪는 고난의 원인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단지 그를 장엄한 우주의 신비 앞에 세우실 뿐입니다. 주님은 네가 세상의 이치를 다 아느냐고 다그쳐 물으십니다. 유한한 인간이 어찌 그 이치를 다 알겠습니까? 이건 마치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휴대전화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 작동 원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사용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주어진 이 세상에서 살뿐입니다. 하나님의 질문이 거듭될수록 욥은 점점 더 깊은 침묵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삶은 그저 신비였습니다. 우리 삶은 그 세계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장엄한 세계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산에 사는 염소가 언제 새끼를 치는지 아느냐? 들사슴이 새끼를 낳는 것을 지켜 본 일이 있느냐?” 물으십니다. 이후에 이어지는 질문도 유사합니다. 생태학자가 아니라도 자연 다큐멘터리를 많이 본 분들은 이런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자연 다큐멘터리를 즐겨 봅니다. 동물 혹은 식물 세계의 번식과 생존 전략을 보노라면 생명의 신비 앞에 그저 말문이 막힐 뿐입니다. 저절로 경외심이 듭니다.
연어가 어떻게 그 먼 바닷길을 건너 모천으로 회귀하는지, 도요새와 물떼새는 어떻게 호주에서 시베리아까지 긴 비행을 하는지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단단한 껍질을 가진 씨앗들은 짐승에게 먹혀 배설물이 되어 나올 때 발아될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국화는 산불이 지나가야 꽃을 피울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너는 ∼을 아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은 세상이 신비임을 인정하라는 말일 겁니다. 거듭되는 질문 앞에서 점점 침묵의 강에 빠져들던 욥은 겨우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비천한 사람입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주님께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손으로 입을 막을 뿐입니다. 이미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더 할 말이 없습니다.”(욥40:4-5)
생명의 장엄함을 경험한 사람의 말입니다. 그 장엄함을 아는 사람은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그 귀한 하나님의 작품을 훼손하는 일을 두려워합니다. 저는 가끔 무료한 시간이면 홀로 서재에 앉아 <포토 아크the Photo Ark>라는 책을 봅니다. ‘사진으로 엮은 생명의 방주‘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조엘 사토리의 사진과 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는 동물원에서 만날 수 있는 각종 동물들의 초상화를 찍고 그들의 생태를 아주 간결하게 글로 적었습니다. 파충류, 양서류, 어류, 조류, 포유류를 모델로 하여 마치 사진관에서처럼 검은 배경막을 두고 찍은 사진들이 진기합니다. 국제 보전 협회 이사회 부회장인 해리슨 포드는 그 책의 추천의 글에서 호랑이, 나비, 해달, 코뿔소 같은 야생 동물이 없는 세상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는 곧 이어 “하지만 우리는 그런 세상에 대해 상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치 1962년에 레이첼 카슨이 <침묵의 봄>이라는 책을 통해 새의 지저귐 같은 봄의 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을 수도 있는 묵시문학적 미래를 경고했던 것과도 같습니다. 인간의 경제 활동으로 인해 생물다양성이 무너지고 있는 현실을 해리슨 포드는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생태계는 생물 종이 사라지면 변한다. 꽃가루 매개 생물을 없애면 수확량이 줄어들고, 포식 동물들을 몰살시키고 나면 먹이 사슬이 무너진다. 원숭이, 새, 거북을 숲에서 제거하면 나무도 숲에서 사라지기 시작한다. 씨앗을 흩뿌리고 싹틔우는 일을 돕던 그들이 사라지면 공기와 물을 정화하면서 기후의 균형을 잡아 주는 나무가 생장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우리 행성의 숲과 바다, 습지와 사바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동물들만의 서식지가 아니다. 그곳은 우리와 그들의 공동 안식처이기도 하다.”(조엘 사토리 글·사진 <포토 아크>, 권기호 옮김, 사이언스북스, 2019, p. 11)
∙탐욕에서 녹색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생명들이 상부상조하는 곳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생명의 본질은 ‘너 없이는 나도 없다’는 말 속에 다 담겨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목을 눌러 숨을 못 쉬게 하는 일이 도처에서 벌어집니다. 다른 이들에게 돌아갈 몫까지 다 누리며 사는 것은 죄입니다. 미래 세대가 누릴 것을 앞당겨 탕진하는 것도 죄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지배했던 탐욕스러운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아끼고, 귀히 여기고, 돌보는 삶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이건 선택이 아니라 당연한 일입니다. ‘탐욕greed’에서 ‘녹색green’으로 전환할 때 하나님도 우리를 기쁘게 여기실 것입니다. 우리 삶은 빚임을 잊지 마십시오. 정현종 시인은 ‘한 숟가락 흙 속에’라는 시에게 이렇게 노래합니다.
“한 숟가락 흙 속에미생물이 1억 5천만 마리래왜 아니겠는가, 흙 한 술,삼천대천세계가 거기인 것을!알겠네 내가 더러 개미도 밟으며 훍길을 갈 때발바닥에 기막히게 오는 그 탄력이 실은수십억 마리의 미생물이 밀어 올리는바로 그 힘이었다는 걸!“
한 숟가락 흙 속에 깃든 신비를 볼 눈이 있습니까? ‘너는 ∼을 아느냐?’는 질문에 그저 입을 다물 뿐입니다만, 이 놀라운 생명의 사슬에 감사할 줄 아는 이들이 늘어날 때 숨 막히는 세상은 숨 쉴만한 세상으로 변할 겁니다. 지금 곁에 있는 이들이야말로 우리의 설 땅이 되어주는 이들입니다. ‘네가 있어 내가 있다’. 이 말이 우리 인생관이 될 때 우리는 생명의 보호자,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창조의 신비에 눈을 뜬 사람, 피조물에 깃든 하나님의 숨에 경탄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참 사람입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이들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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