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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잠17: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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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기석 목사 |
참고 : | 청파감리교회 http://www.chungpa.or.kr |
단련된 마음
잠17:1-5
(2020/06/14, 성령강림 후 제2주)
[마른 빵 한 조각을 먹으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진수성찬을 가득히 차린 집에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 슬기로운 종은 부끄러운 일을 하는 주인집 아들을 다스리고, 그 집 자녀들과 함께 유산을 나누어 받는다. 도가니는 은을, 화덕은 금을 단련하지만,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단련하신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사악한 말에 솔깃하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중상하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 가난한 사람을 조롱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다. 남의 재앙을 기뻐하는 사람은 형벌을 면하지 못한다.]
∙모진 세상
주님의 은혜와 평강을 기원합니다. 우리 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상한 영혼의 제사를 드리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치유해 주시기를 빕니다. 시간 속을 바장이며 사는 동안 우리는 이런저런 내상을 입으며 삽니다. 여유작작餘裕綽綽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도 차마 남에게 드러내지 못하는 아픔과 그늘이 있습니다. 그 아픔과 그늘을 자기 성숙의 계기로 승화시키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을 바늘로 만들어 주위 사람들을 콕콕 찌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내 생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고 생각할 때 원망의 마음이 찾아듭니다. 사회를 원망할 수도 있고, 특정한 집단을 원망할 때도 있습니다. 원망을 풀 곳이 없을 때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기 시작합니다. 가족들이 그 원망받이가 되는 경우가 제법 많습니다. 가정家庭은 ‘집 가‘ 자와 ‘뜰 정’ 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뜰은 여백입니다. 뜰이 사라졌기 때문일까요? 가정을 족쇄처럼 여기는 이들이 꽤 많습니다.
코로나19로 학생들이 격주로 등교하면서 가정마다 비상이 걸렸습니다. 서로 생활의 리듬을 침해할 소지가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서로 배려하며 조화를 이루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가정도 제법 많은 것 같습니다.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 우애가 돈독해질 것 같지만, 오히려 감정적으로 얽혀들어 피차 상처를 입고 또 입힙니다. 집에서는 사회가 우리에게 부여한 역할을 연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족들이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자기 기대에 어긋나는 반응이 돌아오면 짜증을 냅니다. 그건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른들에게도 누군가 자기를 토닥거려주기를 바라는 ‘어린아이‘가 숨어 있는 법입니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자기를 우선시하는 마음을 내려놓지 않는 한 갈등을 피하기는 어렵습니다. 가족일수록 섬세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 나오는 ‘아이들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들의 아이라고 해서 그대들의 아이는 아닌 것.
아이들이란 스스로 갈망하는 삶의 딸이며 아들인 것.
그대들을 거쳐 왔을 뿐 그대들에게서 온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비록 지금 그대들과 함께 있을지라도 아이들이란 그대들의 소유는 아닌 것을.”
(칼릴 지브란, <예언자>, 강은교 번역, 문예출판사, 1979, 22쪽)
모든 생명은 독립적 주체입니다. 나를 통해 왔다고 해서 내 맘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저마다 스스로 갈망하는 ‘생명’의 아들 딸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들은 나의 꿈을 실현하거나, 나의 사회적 체면을 높여주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가정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에서도 존중받기 어렵습니다.
세상을 향해 ‘숨을 쉴 수 없어요’라는 메시지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난 조지 플로이드는 인류의 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못지않게 참혹한 일들이 이 땅에서 자꾸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거짓말을 한다는 이유로 여행 가방에 가두어 죽게 하는 일이 벌어지고, 어린 아이 버릇을 고친다고 뜨겁게 달구어진 플라이 팬에 손을 짓눌러 데게 만들기도 하고 쇠줄을 목에 감아놓기도 했습니다. 그 어린 생명에게 가해진 학대가 참담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사람들의 심성이 왜 이렇게 모질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근본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욕망의 벌판에서 길을 잃고 떠돌기 때문입니다.
∙슬기로운 종
요즘은 좀 보기 어렵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편액이 집집마다 걸려 있었습니다. 집안이 화목해야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가정이야말로 받아들여짐을 경험하는 현장, 언제라도 자기답게 존재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표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의 지혜자는 “마른 빵 한 조각을 먹으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진수성찬을 가득히 차린 집에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17:1)고 가르칩니다. 바로 앞에서 그는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잠16:32)고 했습니다. 이것이 수신修身에 관련된 가르침이라면 가족끼리 화목하게 지내는 것은 제가齊家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마른 빵 한 조각은 최소한의 거친 음식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런 음식을 먹으면서도 서로 측은히 여기고 고맙게 여기는 것이 호화로운 식탁 앞에서 다투는 가정보다 낫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진수성찬’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제배흐 zebach’는 기본적으로 ‘희생‘ 혹은 ‘의의 제사’, ‘감사의 제물’을 뜻합니다. 결국 종교행위는 열심히 하면서도 다투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화해자, 혹은 생명의 향기가 되지 못한 이들이 많습니다. 신앙생활이 혹은 물질적 풍요로움이 정신적인 넉넉함으로 연결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마른 빵 한 조각이라도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야말로 예배에 가까운 마음이라 하겠습니다.
다음 구절을 볼까요? "슬기로운 종은 부끄러운 일을 하는 주인집 아들을 다스리고, 그 집 자녀들과 함께 유산을 나누어 받는다."(2) ‘슬기롭다‘(사핼sakal)는 말은 ‘신중하다, 사려 깊다, 통찰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슬기로운 종은 일과 자기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할당량을 채우는 데 급급하지 않고, 일의 전모를 이해하고 거기에 맞는 역할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주인집 아들이 어리석어 제 역할을 못할 때 주인은 슬기로운 종에게도 유산을 나눠주어 재산의 소실을 막으려 했습니다. 적절한 예가 있습니다. 아브람은 아직 약속의 유업을 받지 못했을 때 다마스쿠스 사람 엘리에셀이 자기 상속인이라고 말합니다(창15:2).
부끄러운 일을 하는 주인집 아들이 예전에도 많았던 모양입니다. 풍요로움 속에 살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모두 누린 사람들 가운데는 공감의 능력이 좀 부족한 이들이 많습니다. 공감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말은 타자를 이해하거나 배려할 줄 모른다는 말입니다. 갑질하는 사람들이 그 한 예입니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다 이기적인 데가 있습니다. 자기를 중심에 놓으려는 습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설익은 사람일수록 목소리가 큽니다. 앙앙怏怏(불평·불만이 있어 마음이 시뜻함)거리는 이들이 있는 곳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인격의 향내가 묻어나는 사람, 무르익은 사람을 만나야 우리 삶이 가지런해집니다. 그런데 살면서 경험하는 것이지만 그런 분들은 대개 고난의 시간을 잘 겪어낸 분들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고난을 좋아할 사람은 없지만 고난이 유익이 될 때가 있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자각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나의 지식이, 나의 입장이, 나의 세계관이, 나의 생각이 참된 인식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편견에 찬 것임을 알 때 성숙함이 시작됩니다.
∙삶의 연금술
다음 구절입니다. “도가니는 은을, 화덕은 금을 단련하지만,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단련하신다.”(17:3) 어린 시절 시골에서 학교에 다닐 때 면사무소 근처에 있었던 대장간 앞을 서성거리곤 했습니다. 너무 낯설고 신기한 광경이 펼쳐졌기 때문입니다. 대장장이 아저씨가 풀무에 공기를 주입하면 불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모습을 경외심을 품고 바라보곤 했습니다. 불이 쉭쉭 소리를 내며 솟아오르던 그 모습과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합니다. 아저씨가 집게로 벌겋게 달아오른 쇠붙이를 꺼내 모루 위에 놓고 두들길 때 나는 그 리드미컬한 망치소리가 참 매혹적이었습니다. 아저씨의 팔뚝에 불끈 일어난 근육과 힘줄도 멋졌습니다. 쇠가 열이 식어 검게 바뀔 무렵 그 쇠를 물속에 푹 담그면 푸시식 소리와 함께 수증기가 피어오르던 광경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풀무불, 모루, 망치질, 물 속을 오가는 담금질 과정을 반복하면서 마침내 거칠던 쇳덩이는 칼이나 호미 괭이 따위의 도구로 바뀌었습니다. 어쩌면 삶에 꼭 필요한 것들은 이런 과정을 거쳐 얻어지는 것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시련과 고통의 풀무와 망치질, 그리고 절망의 심연을 거치면서 더 깊고 성숙한 심성을 얻습니다. 그러나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과 시련을 겪는다고 하여 사람들이 다 맑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거칠어지고, 다른 이들을 원망하면서 사는 이들도 많습니다. 고난이 닥쳐올 때 그것을 유익으로 바꾸는 일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앙을 연금술이라고 말합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지향은 분명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바로 고난을 생의 보화로 승화시킨 사람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롬5:3-4)
물론 바울이 말하는 환난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다가 겪는 환난을 말합니다. 누가는 복음을 전하던 사도들이 공의회에 끌려가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위협과 함께 채찍질을 당하고 풀려났을 때의 반응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공의회에서 물러나왔다”(행5:41).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단력된 인격을 낳는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것일 겁니다. 그리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습니다. 절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앙앙불락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일생에 몇 번은 한계 상황 앞에 섭니다. 스스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일들이 느닷없이 닥쳐와 우리 삶을 뒤흔듭니다. 질병, 죽음의 위기, 실패, 무의미성의 자각, 허무 의식, 견딜 수 없는 슬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이 찾아올 때 우리는 참 무력해집니다. 하지만 그런 인생의 위기는 우리 인생에서 정말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시급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놓치고 살았던 중요한 일들을 다시 붙들게 만듭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때로는 무겁게 여겨졌던 가족들이 더없이 고맙게 여겨지고, 어려운 시기에 내 곁에 다가오는 이들이 얼마나 귀한 이들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고난은 돈과 명예와 권세를 좇던 삶이 허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모든 고난이 유익한 것은 아니지만 고난을 유익하게 만든 사람들이 지혜자입니다.
∙악과 결별하는 용기
“악을 행하는 사람은 사악한 말에 솔깃하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중상하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17:4). 어거스틴은 악은 선의 부재라고 말했습니다. 악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겠지만, 세상에는 정말 악인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말이 있습니다. 샤덴은 상처를 준다는 말이고 프로이데는 기쁨, 환희를 뜻합니다. 강상중 교수는 이 단어를 ‘타인의 불행은 꿀맛’이라고 옮깁니다. 우리 마음에는 이런 게 없습니까? 악에 사로잡힌 이들은 참된 말을 멀리합니다. 이런저런 음모론에 휘둘립니다. 자기들만이 세상의 이면을 다 보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 어리석은 믿음이 그들을 더욱 어리석게 만듭니다. 그런 태도는 결국 타인에 대한 의심, 조롱, 멸시, 폭력을 낳습니다. 자기 속에 있는 어둠이 또 다른 어둠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잠언의 지혜자는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조롱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다. 남의 재앙을 기뻐하는 사람은 형벌을 면하지 못한다“(17:5). 누군가를 조롱한다는 것은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부인한다는 말입니다. 이웃 사랑의 기초는 선한 의지가 아니라, 이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이 마음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 영혼의 전락이 시작됩니다. 우리 원양어선에서 일하는 이주어선원에 대한 노동 착취와 인권 침해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정말 속상합니다. 돈 때문에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마비되는 이 현실을 극복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선진국이 될 수 있습니다.
말씀 앞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사회 구석구석에서 그리스도의 향내를 풍겨야 합니다. 십자가 목걸이를 달고 다니고, 식사할 때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다른 이들을 존중하고 아끼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어려운 시대일수록 근본에 충실한 사람들이 등장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이 머무는 삶의 자리 한 구석이라도 밝히는 작은 등불이 되십시오. 여러분 주위에 따뜻하고 상쾌한 분위기를 만들고, 서로 아끼는 마음이 쉽게 자리잡을 수 있도록 만드십시오. 바로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이들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한 주간 동안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말고, 할 수 있는 모든 선한 일을 다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 머무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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