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개가 토한 것을 도로 먹다]
(베드로후서 2:10-22)
1. 거짓 교사들의 실상
거짓 교사들은 문제가 심각했다.
구체적으로 많은 모습들이 있지만
그들은 본질적으로 두 가지의 큰 죄악 속에 빠져 있었다.
(벧후 2:10, 새번역) 특히 더러운 정욕에 빠져서 육체를 따라 사는 자들과, 권위를 멸시하는 자들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첫째는 '더러운 정욕에 빠져' 살아간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권위를 멸시한다는 것이었다.
순서에 맞게 말한다면, 하나님의 권위를 멸시하면
필연적으로 더러운 정욕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삶의 모습이 더러울 수밖에 없다.
(벧후 2:14, 새번역) 그들의 눈에는 간음할 상대자들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죄를 짓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들뜬 영혼들을 유혹하며, 그들의 마음은 탐욕을 채우는 데에 익숙합니다. 그들은 저주받은 자식들입니다.
이단의 우두머리들이 범하는 가장 흔한 죄가 돈과 음행이고,
타락한 목회자의 대표적인 죄도 돈과 음행이고,
타락한 교인들이 범하는 대표적 죄도 돈과 음행이다.
그들은 왜 그렇게 더러운 정욕에 빠져 살아가는 것일까?
하나님을 잘 믿는 척 하지만
그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 더러운 정욕에 빠져 살아간다면
그는 하나님의 권위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 자임을 알아야 한다.
이단의 우두머리든 교회의 목회자든 일반 교인이든 상관 없이
더러운 정욕에 빠져 살아간다면 그들에게는
캄캄한 어둠과 멸망만 준비되어 있다.
2. 거짓 교사를 따르는 자의 운명
안타깝게도 그런 거짓 교사들을 따르는 자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벧후 2:18, 새번역) 그들은 허무맹랑하게 큰소리를 칩니다. 그들은 그릇된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서 가까스로 빠져 나온 사람들을 육체의 방종한 정욕으로 유혹합니다.
교회로 들어온 사람들은 그릇된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서
가까스로 빠져 나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거짓 교사는 큰 소리를 치면서
교인들을 다시 방종한 정욕으로 끌어들인다.
세상의 정욕에서 빠져나와 교회로 가는 것만으로도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다.
그렇게 교회로 간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인 공평과 정의를 가르치고
말씀이 삶의 기준이 되어 깨끗한 삶을 살아가도록 세워가는 것이
목회자 즉 성경 교사의 역할이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세상의 타락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을
교묘하게 다시 육체의 정욕과 탐욕으로 끌어들이는 짓을
소위 목회자나 성경을 가르치는 자들이 하고 있다면 심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거짓 교사를 분별하지 못하고 따라가는 추종자는 어떻게 될까?
(벧후 2:20, 새번역) 사람들이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운 것들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거기에 말려들어서 정복을 당하면, 그런 사람들의 형편은 마지막에 더 나빠질 것입니다.
주님을 알아서 세상의 더러운 것에서 벗어났다가,
주님의 이름으로 다시 세상의 더러운 것에 정복 당한다면
그 사람의 형편은 이전보다 더 나빠지게 된다.
당연히 거짓 교사와 동일하게
멸망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상태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표현한다.
(벧후 2:22, 새번역) 다음과 같은 속담이 그들에게 사실로 들어맞았습니다. "개는 자기가 토한 것을 도로 먹는다." 그리고 "돼지는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진창에 뒹군다."
개가 토한 것을 도로 먹는 더러움,
돼지가 씻고 난 후에 다시 진창에 뒹구는 더러움이
그들의 더러움을 잘 설명하는 말이다.
3. 예수 믿는다는 것은?
그렇다면 예수를 바르게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예수를 믿어서 부자가 된다는 것,
예수를 믿어서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것,
예수를 믿었더니 자식이 좋은 대학 가고 사업이 성공하고
세상에서 승승장구해서 높은 자리로 올라가고,
크고 화려하고 유명해져서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모두 거짓이고 사기다.
예수를 믿으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은 예수 믿는 것과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예수 믿으면 가난 할 수도 있고 부자일 수도 있다.
예수 믿으면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부자가 되든 가난하게 되든
세상의 더러운 것에 다시 빠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삶이 편안하든 고난이 많든 상관 없이
여전히 깨끗하고 정결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
예수를 바르게 믿는 것이다.
신자는 누구나 세상의 타락과 방종과 더러움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사람이다.
자신의 능력으로 쉽게 세상의 더러움에서 빠져나온 사람은 없다.
그렇게 힘들게 빠져나온 그 더러움으로
신속하게 돌아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도 예수와 신앙의 이름을 가지고
그 더러움으로 돌아간다면 그 나중의 형편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더러워지고 강퍅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4. 분별
그렇다면 예수를 믿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분별'이다.
거짓 교사들이 득세하고 있어서
바른 교사를 찾기가 너무 어려운 시절이다.
목사가 거짓 교사가 아닌 바른 교회를 찾기 위해서
주일마다 교회들을 탐방해서 예배를 드려보았는데
몇 개월을 매주 다른 교회를 갔음에도
올바른 말씀을 전하는 교회를 만나지 못했다고 하소연하는 분을
너무나 많이 만나보았다.
이 시대는 거짓 교사가 너무 많아서
제대로 분별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짓 교사의 가르침에 넘어가
가까스로 빠져나온 그 더러움으로
순식간에 빠져들고 말 것이다.
개가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그 더러움에 빠지지 않으려면
분별력을 키워야 한다.
분별력은 오직 말씀에서 나온다.
옳고 그름의 기준은 오직 말씀이기 때문이다.
신자는 누구나 '말씀의 사람'이어야 한다.
말씀을 바르게 알아가고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말씀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소홀하게 생각하고도 올바른 신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군가, 특히 목사에게만 의존하는 신앙을 가지고서도
올바른 신앙의 길을 갈 수 있다고 믿는다면
너무 심각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운이 좋아서 올바른 목사를 만났다 하더라도
목사만 의존하는 그 신앙은 유아적이고 미련하고 유치한
어린 아이 신앙에서 결코 자랄 수가 없다.
거짓 교사를 분별하고 올바른 교훈을 가르치는
건전하고 건강한 목회자를 만나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한 분별력을 말씀을 통해 키워야 하고,
그런 목회자를 만난다면 그 목회자와 함께
말씀을 스스로 묵상하고 나누는 성숙한 신자로 자라가야 한다.
목사만 신앙이 좋고, 그 목사만 자랑하는 교회라면
문제가 심각한 교회다.
자랑할 것이 있다면 예수와 십자가 뿐이요,
자신의 연약함 뿐임을 말씀을 통해 신자 스스로 알아가야 한다.
말씀을 읽을 필요도, 묵상할 필요도 없고,
더더욱 목사의 해석 없이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니
그저 목사 말만 잘 들으면 된다고 말한다면
그는 확실한 거짓 교사다.
신자의 스승은 목사가 아니라 주님이요 성령이다.
당연히 성령께서 신자 각자에게 역사하셔서
말씀을 묵상할 때 깨닫게 해주신다.
참된 스승, 참된 보혜사이신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과정이 없이도 성숙한 신자가 될 방법은 없다.
물론 스스로 말씀을 묵상하면서 깨달은 것들로 인해
목사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다른 교인들을 깔본다면
그것은 교만이라는 가장 무서운 죄에 빠진 것이다.
묵상은 언제나 '공동체가 함께' 해야 한다.
공동체 구성원 전체가 말씀을 묵상하고 그 묵상을 나누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관점이나 깨달음이 잘못되었던 부분을 발견하고
고쳐나갈 수 있어야 신자는 올바르게 성숙해 갈 수 있다.
그렇게 말씀 안에 거하기를 포기하지 않을 때
저절로 분별력이 생겨서
거짓 교사를 분별하는 눈이 생길 것이다.
5. 나는?
목사의 위치나 역할에 대해서
너무나 잘못 배우면서 자랐다.
'목사 말을 듣지 않으면 삶이 어려워진다.'
'목사를 비판하면 저주받는다.'
'목사 잘 섬기면 복 받는다.' 등의 말을
어릴 때부터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
말씀을 묵상하면서도 이 말들에 대해서 바로 알지 못했고
신학을 공부하면서 비로소 바르게 알게 되었다.
이 말들은 중세시대보다 더 타락한 말들이다.
목사가 아니라 '사람'을 비난하고 저주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기 어려운 것이지,
목사라고 특별히 그런 것이 아니다.
목사든 다른 사람이든 상관 없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정당한 비판을 받아야 한다.
어떤 사람을 보면서도 올바르게 '분별'은 해야 하는데,
목사는 특히 더 잘 분별해야 한다.
그의 가르침을 통해서 자신의 영혼이 살거나 죽을 수 있고,
목사의 설교를 통해 올바르게 자라거나 망하거나
둘 중의 한 가지 길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목사가 되었다.
내가 본 목사의 모델은 모두 '샤먼'(무당)의 역할이었다.
그래서 목사 역할을 샤먼처럼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때부터 바르게 목회하는 목사님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감사하게도 구석구석 바르게 목회하는 목사님들이 계셨다.
학원을 운영하고 카페를 운영하면서 목회하는 목사님을 만나서
한참 대화를 나누면서 받은 충격이 컸고,
트럭을 운전하면서 목회하는 목사님도 계셨고,
택배 알바를 하면서 목회하는 목사님도 계셨다.
물론 이중직을 하지 않는 좋은 목사님들도 만났다.
그분들을 한분 한분 만나서 대화를 나누면서
'샤먼'이 아닌 '목사'로서 어떻게 목회를 할 수 있는지
조금씩 감을 잡아가기 시작했고,
천천히 나만의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내린 결론은 목사는 신자의 손에 말씀을
다시 들려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말씀을 바르게 묵상하고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과정에서 어려움도 겪었다.
여전히 '샤먼'이 되어주길 원하시는 분들을
말씀으로 열심히 섬기면서
그분들이 스스로 말씀을 묵상할 수 있도록
도전을 드리고 묵상 방법을 가르치기도 했고
밴드를 만들어 묵상 나눔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길은 결코 쉽지 않아서 실패하고 말할 수 있는 결과도 만났다.
교인들 대부분이 교회를 떠나버린 것이다.
'이런 방식의 목회는 안 되는 것인가?'
하고 절망을 했고,
'샤먼적인 목회를 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고민을 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이미 그 길이 틀렸음을 알았기에
그 길은 역겨운 일로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
교회를 다시 시작하다시피 하면서
여전히 말씀 하나로만 교회를 세우려 했다.
'이렇게 해서 목회를 실패하고 교회가 세워지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염려가 생기기도 했으나
마음에 내린 결론은 심플했다.
그렇게 해서 안 된다면 그만 하면 된다 싶었다.
목회 안 한다고 해서 신앙생활 못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신앙인이 아닌 것도 아니니
말씀 하나만 붙들고 살아가는 성도를 세우지 못할 바엔
목회 하지 않는 것이 맞겠다 싶기도 했다.
여전히 거짓 교사들이 차고 넘치는 시대다.
그러나 반대로 참 교사들도 구석구석 많다.
문제는 참 교사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예배당 건물도 변변치 않아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잘 드러나지 않는 참 교사인 목사들을
애써서 찾는 성도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제법 오랫동안 후원을 해주신 분이 계신다.
후원해드릴 다른 목사님을 소개해 달라고 하셔서
어려운 목사님께 후원 연결을 해드린 적도 있었다.
어제 그 분이 연락을 하셨다.
1년 단위로 후원을 하시는 분이어서
나와 그 목사님의 형편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참 감사한 분이시다.
교회는 언제나 '우주적 교회'여야 한다.
개교회만 살아 남으면 된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하다.
바르게 목회하려고 발버둥치는 모든 목사는
'우주적 교회'의 일원으로서 목회를 하는 것이다.
우주적 교회의 소속인 모든 성도들이
자신의 교회가 재정적으로 크게 어렵지 않다면
외부로 눈을 돌려 바르게 사역하지만 가난으로 어려움 당하는
개척교회나 시골교회를 섬기는 목사님들을 살피면 좋겠다 싶다.
그래서 모든 지역 교회들이 '우주적 교회'의 일부임을
성도도 목사들도 알아가면 좋겠다.
그 안에서 모든 성도와 목사 개개인은
말씀을 스스로 묵상하고 말씀 속에서
자신을 향한 주의 음성을 만나고,
교회 공동에 안에서는 말씀 속에서 받은 은혜를 통해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들이 되길 소원한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더러움에 빠지지 않고,
빠져나온 더러움으로 돌아가지 않고,
날마다 말씀 안에서 거룩을 향해 자라가는
나와 성도들과 우주적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되길 간절히 소망하는 아침이다.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