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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5:1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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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기성 목사 |
참고 : | 말씀의 숲 교회 네이버- 말씀의 숲 교회(서울 은평) |
하나님 앞에 다시서다
(눅15:11-24)
예수님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목적들은 각각 달랐는데, 어떤 사람은 병을 고치기 위하여 또 어떤 사람은 먹을 것을 얻기 위하여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에수님을 따랐어요.
특별히 많은 사람 들이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병을 고쳐주신 후에 '아무에게도 가서 말하지 말라'는 부탁을 자주하셨어요.
예수님이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겸손하셔서만 그러신 것이 아니지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중요한 이유는, 병 고치는 것이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이 아닌데, 잘 못하면 병 고치는 것이 예수를 믿고 따르는 중요한 이유가 될 것을 생각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던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누가 뭐라해도,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도, 정작 중요한 구원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러한 일들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해요. 그러나 정말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믿는 궁극적인 이유와 목적이 구원이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구원을 바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가장 궁극적이고도, 구체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거지요.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궁극적이고도 구체적인 이유는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세상 적입니다. 병을 고치기 위하여, 돈을 벌기 위하여,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하여 입니다.
물론 예수를 믿으면 병이 낫고요.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이도 살 수 있고요,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예수를 믿는 목적이 될 수 없지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은 구원입니다.
구원이란 한마디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거예요. 우리가 죽으면 가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인데, 아무리 좋은 교회, 좋은 성도들과 예배를 드리고 즐거운 교제를 해도, 결국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고, 이 땅에서 교회 다녔어도, 모든 일들이 무용지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꼭 인생의 마지막처럼, 한 해를 마감하는 마지막 끝자락에 와 있을 때,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하고, 따져보고, 점검하고, 생각해 보고, 두드려 보아야 할 것이 있는데,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꼭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점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를 보고,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집 나간 탕자이야기입니다. 성경은 탕자가 하나님을 떠났던 우리 자신이라고 말하고, 탕자의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비유를 하지요. 그래서 집나간 아들이 결국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와 아버지 품에 안기는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어요.
믿는 이들에게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주어졌다 말해요. 또 우리는 그 구원을 지금도 이루어간다고 말을 해요. 우리는 탕자 이야기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어 가는 과정을 볼 수 있어요. 구원을 얻는 모습에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돌아온 탕자를 통해서 어쩌면 구원을 얻는데, 중요한 것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집나간 탕자에서 발견하는 것이 있어요. 17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지금 집 나간 아들 탕자가 깨닫는 장면 이예요. 아버지에게 재산을 얻어 내 마음대로 살려고 나갔지만, 허랑방탕하게 살아 모든 재산을 다 탕진하고 먹을 것이 없게 되었지요. 그리고 돼지가 먹는 것을 먹으면서 깨닫게 되요. ‘이렇게 살다가는 죽겠다’ 하고 깨닫고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 돼지우리에서 살 때에 '이렇게 살다 가는 죽겠구나'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과 같이, 정말 우리의 시작은 깨달음이라는 거예요. 깨달음인데 그냥 깨달음이 아니라 ‘이러다가 죽겠다’ 라는 깨달음이지요.
그러나 그러한 깨달음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영적으로 보면 틀림없이 돼지우리와 같지만, 세상적으로 보면 꼭 돼지우리와 같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 살면, 여기가 천국처럼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살다가는 죽겠구나'를 깨닫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깨달음의 시작은 하나님을 ‘바라봄’ 이구요. 그와 같은 깨달음이 없이는 구원이라는 길로 갈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살다가 죽는다!!” 교회가 그리고 예배가, 그 말을 해 줘야 하는데, 교회까지 와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부담스러워하고 싫어해요. 그래서 교회는 그런 말을 잘 하지 못하고, 그리고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점점 깨닫는 것이 드문 것이지요.
올해는 정말 코로나 때문에 힘든 예배를 드렸어요. 그리고 언제까지 마스크를 써야 하는지 정해 놓은 시간이 없어요. 우리의 불안은 언제까지 마스크를 써야 하는지 모른다는 거예요. 어쩌면 계속 마스크를 벗지 못하는 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이지요.
요즘 우리교회 하윤이 때문에, 카톡 사진에 얼굴만 봐도 힘이나고, 기분이 좋아져요. 그런데 하윤이가 본 첫 번째 세상은, 모두 마스크 쓴 사람들이지요. 얼굴 전체를 보는 세상이 아니라, 눈만 보는 세상이 되었지요. 어떻게 보면 하윤이 에게 미안하지요. 그리고 마음속으로 마스크를 벗고, 온전한 얼굴을 보여 줄 날이 속히 오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지요.
여러분, 보이는 현상들을 보면서 깨닫는 거예요. 세상을 보면서도 그렇고, 자신을 보면서도 자신에게 말해 주는 거예요. ‘이러다가 큰일 나겠구나!’ 그러면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런 깨달음의 시작이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한해를 보내면서, 여러분은 말씀을 읽고,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들으면서 얼마나 깨달았는지요? 여러분, 그런 깨달음이 있을 때 마다, 우리는 한걸음 더 하나님께 다가가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은, 더욱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는 것! 꼭 기억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누가복음의 탕자는 '이렇게 살다가는 죽겠구나' 라는 깨달음이 있은 후, 우리는 그의 고백을 들어야 해요. 18절 말씀이에요.(시작) 즉시 '아버지께로 돌아가자'라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결심 이예요.
자기가 죽게 된 궁극적인 이유가 아버지를 떠나 아버지의 뜻과 말씀을 거역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였던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집에 일꾼조차도 풍족히 먹고 사는데!! 깨닫고 그리고 거기서 머문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결심을 하지요. 돌아가자!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이지요. 예수를 믿어도 우리는 얼마나 마음에서 하나님을 떠나 있는지요? 마음의 결정이라는 것은, 매 순간 하나님을 떠나 내 마음대로 했던 것들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순종하려는 결심이 필요하지요. 그래서, 결심은 깨닫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거예요. ‘이렇게 살다가 죽겠구나’ 깨달았다면, 이렇게 살지 말자가, 결심이지요.
우리는 한해를 뒤돌아보면서, 우리는 마음에 결심이 얼마나 있었는지요? 깨닫고 좀 더 잘 살아보자는 결심이 있는지요? 말씀을 듣고 그 결심이 얼마나 있었는지요? 그저 교회에서나 어디서나 하나님 말씀이, 들리는 것으로 끝나 버리지 않았는지요.
예를 들어 병원에서 여러분이 진단을 받아요. 의사가 말해요. 혈압이 너무 높고, 고 지혈까지 있어서 혈압 약을 먹어야 된다고 하고요. 그리고 “매일 혈압 약을 먹지 아니하면, 어느 날 머리 잡고 뒤로 쓰러질 수 있습니다. 특히 겨울에는 더욱 조심하셔야 합니다” 라고 의사가 당부했다면요.
그때 깨닫는 것이지요. 이러다가 정말 죽을 수 도 있겠구나 깨닫고, 혈압 약을 먹기 전에, 결심을 해요. ‘혈압 약 하루라도 걸지 말고, 꼭 챙겨 먹어야 겠다’ 라는 결심이 서게 되지요. 왜냐하면 그 결심이 없으면, 절대로 혈압 약을 챙기지 않겠지요.
하물며 혈압 약 먹는 것도 그런데, 정말 생명과도 같은 것이라면, 우리는 단호하게 결심을 해야 하는데, 결심을 하지 못하지요. 왜요? 구원, 하나님의 나라, 천국! 그것이 정말 약 먹는 것보다도, 내 안에 현실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깨닫고 그리고 결심이 있어야 해요. 예를 들어 말씀을 읽거나, 말씀을 듣게 되면, ‘믿음’이라는 말이 주제라면, 정말 그 주제에 대한 마음의 결심을 만들어야 하는데 간단합니다. 한 문장을 마음속에 집어넣으면 돼요.
어떻게요? 아주 간단하게요. ‘믿음으로 살기 위해, 예배에 꼭 참석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라는 결심을 내 마음 안에, 문장을 만들어 넣으면 되지요. 또는 ‘기도’ 라는 말이 들리면, ‘정말 조금이라도 하루에 꼭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이런 결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왜 그런지 아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실 때는, 우리가 이 땅을 살 때,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죠. 죄인인 우리가 죄를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되어가며 살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그 하나님의 마음에 나의 결심을 올려 드려야 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러한 결심들이 구원을 이루어 간다는 것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하지요. 다 연결되어있는데, 깨달음과 결심 그리고 세 번째는 18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서 이르기를’ 탕자는 깨닫고, 결심한 후에, 즉시 그곳을 떠났습니다. '떠남'이 있어야 만합니다. 떠남이 없다면 아무리 깨닫고, 결심을 해도 물거품이 될 수 있어요.
아무리 깨닫고 결심을 하였다고 하여도, 그것을 실행에 옮겨 떠나지 않는다면, 그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도 구원을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늘 떠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오늘도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을 떠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해요. 하나는 '죽음'으로 떠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싸움'으로 떠난다고 해요. 우리는 죽음으로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주로 믿고 영접한 후 세 상을 떠나면 누구든지,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으로서만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있을 때는 떠날 수 없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음으로 부르시기 전 까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 수 밖 에 없습니다. 문제는 죽기 전까지입니다. 죽지 않고 떠나는 방법은 있을까요?
죽기 전에 세상을 떠나는 방법은요, 세상과 맞서 싸우는 거예요. 세상 방법과 싸우는 것이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세상을 떠날 수 있고, 죽음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에도 구원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운동을 요란스럽게 해요. 지난번에도 탁구를 치다가 다리를 다쳤잖아요. 저는 엑티브한 운동을 좋아해서, 권투도 배워 보았지요. 싸움 잘하려고 한 것은 아니고, 운동하려고 한거예요.
운동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에요. 링 안에 들어가서 상대하고 스파링을 시켜요. 많이 맞았어요. 1라운드가 끝나고 쉬고 있는데, 관장이 저에게 ‘목사님 맞기 싫지요?’ ‘네’ 그랬더니 살려면, 목사님도 펀치를 날려야 해요. 그래야 ‘덜 맞아요’ 라고 말해요.
그때 깨달았어요. 살기 위해서 싸워야 하는구나! 가만히 있으면 더 맞는구나! 를 알게 되었지요. 맞아도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2라운드부터는 계속 싸웠어요. 그랬더니 정말 덜 맞아요.
여러분, 우리가 죽으면 천국 가는데, 죽지 않으면 살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그러한 싸움이 없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동 안 구원의 삶을 누릴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과 싸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죽기 전의 구원은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싸움요? 먼저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잘못된 성품과 습관과 싸워야 하지요. 다시 말해서 죄와 싸워야만 합니다.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죄 된 욕심을 거부하고, 이미 길들여져 있는 죄에 대항하여 싸움을 벌여야만 합니다.
우리 자신도 살기 위해 싸워야 하고, 교회도 세상에서 살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바른 교회를 세우기 위해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세상적인 것과 싸워야 합니다. 여러분, 그것이 구원을 이루어 가는 삶이 되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한해를 마감하는 마지막 주에 와 있습니다. 올 한 해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힘든 한 해였지만, 하나님 앞에 다시서서,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궁극적인 목적을 다시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입니다. 교회 오는 목적은 구원입니다. 그 밖에 다른 어떤 것보다,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오늘도 나는 그 구원을 이루어 가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여러분, ‘깨달음’ 그리고 ‘결심’ 그리고 ‘떠남’이 우리 안에 기억되어 매일같이 연습 되어질 때, 우리는 진정한 구원을 이루어 가는 사람이 되는 줄 믿습니다.
그 은혜로 한해를 잘 마감하실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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