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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묵상] 어찌 낙망하지 않을까?

묵상나눔 윤용 목사............... 조회 수 105 추천 수 0 2020.12.29 09:52: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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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낙망하지 않을까?]

(시편 42편)

1. 낙망하는 시인

시인은 크게 낙망했다.

(시 42:3, 새번역) 사람들은 날이면 날마다 나를 보고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고 비웃으니, 밤낮으로 흘리는 눈물이 나의 음식이 되었구나.

낙망한 이유는 사람들이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라고 비웃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시인을 비웃었을까?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힌트가 있다.

(시 42:4, 새번역) 기쁜 감사의 노래 소리와 축제의 함성과 함께 내가 무리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면서 그 장막으로 들어가곤 했던 일들을 지금 내가 기억하고 내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시인은 과거에 무리들과 함께 성전으로 올라갔는데
그때 시인의 위치는 무리들을 '이끄는' 위치였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위치가 된 것이다.

무리들을 이끌고 성전으로 올라갈 정도로
그렇게 인정받았던 위치에서
어떤 사건으로 인하여 추락해서
이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성전에 올라가지도 못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재정적인 파산을 경험했든지
몸에 심각한 병이 생겼든지
가족 중 누군가가 심각하게 어려워졌든지
부부 사이에 문제가 생겼든지
자식에게 큰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자신의 죄가 드러나서
사람들에게 심각하게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있지만 시인은 사람들에게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는 조롱을 받을 만큼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한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라도 낙망하지 않는 것이 신앙인일까?
그럴 리가 없다.
이 정도로 심각한 어려움에 처했다면
낙심하고 낙망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2. 낙망이 끝이 아니다.

신자와 비신자의 차이점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비신자는 낙망할 상황이 되면 낙망으로 인해
끝없이 마음이 추락하고 삶도 추락할 수밖에 없지만,
신자는 낙망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낙망할 때 어떻게 해야 끝이 아니게 될까?
자신에게, 자신의 영혼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시 42:5, 새번역)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

처음부터 하나님을 찬양하면 된다고 말하면
그건 도달할 수 없는 목표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데 억지로
하나님을 찬양하기만 하려 한다면
어쩌면 심각한 정신 불균형에 빠져서 위선자가 되기 쉽다.

단계가 있는데, 첫 단계가 자신의 영혼을 향해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고 괴로워하느냐?
저는 하나님을 기다려라.' 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에게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상황이 처절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래서 자신의 마음과 영혼이 낙심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인정'이 중요하다.

그렇게 인정해야 자신의 영혼에게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고 괴로워하느냐?'
라고 말할 수가 있다.

상황은 절망적이고 마음은 낙심했는데
자신의 상황과 마음을 정직하게 직면하지 않고
거룩한 척 행동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척 하다가는
몸과 정신이 분열될 수 있고,
심각한 위선자가 되고 만다.

마음이 낙심했고 영혼조차 낙망한 것에 대해서
자신을 진지하게 성찰해야 하고
신앙이 좋은 줄 알았던 자신이 전혀 그렇지 않음을,
작은 어려움만 찾아와도 무너져 낙망하는
유치하고 치졸한 신앙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알아야 자신의 영혼을 향해서
'네가 어찌 낙망하느냐?'라고 말할 수 있고,
'너는 하나님만 바라라'라고 말할 수 있다.

낙망과 낙심과 좌절과 무너짐을,
다시 말해서 영혼과 신앙마처 파산한 자신을
정직하게 인정하지 않고서는
'하나님만 바라라.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라고
아무리 말해본들 헛된 말에 불과할 것이다.

자신의 처절한 상황을 인정하고
그래서 자신의 영혼이 좌절하고 낙망한 것을 인정하는 것은
결코 끝이 아니고 망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걸 제대로 인정해야
하나님을 바랄 수 있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찬양하게 될 수 있다.

3. 그래서 회복되었을까?

그렇게 자신의 상황을 인정하고
자신의 영혼을 향해
'어찌하여 낙망하느냐?'라고 외치고나면
곧바로 회복되는 것일까?

시편 42편은 다소 당황스럽게 끝이 난다.

(시 42:10, 11, 새번역) [10] 원수들이 날마다 나를 보고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하고 빈정대니, 그 조롱 소리가 나의 뼈를 부수는구나. [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

상황이 해결되고 정리되어서
원수들이 더이상 조롱하지 않게 되고
마음의 낙심이 해결되어서
완전히 회복된 모습을 시인은 말하지 않는다.

아무 해결도 되지 못해서 원수를 여전히 자신을 조롱하고
그 조롱소리에 자신의 뼈가 부서지는 듯 아픈 상황이다.
그리고 첫 부분과 똑같은 소리로
'어찌하여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기다려라.'
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으로 시편이 끝나는데,
마치 이것은 열린 결말을 보여주는 영화와 같이 느껴진다.

왜 이렇게 시편을 끝내는 것일까?
이 시편의 열린 결말이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4. 열린 결말의 이유

이렇게 열린 결말처럼 보이는 구절로
시편을 끝맺는 것은 이유가 분명해 보인다.

신자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잘 되고 부자 되고 성공하고 유명해지고 높아져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잘 될 수 있고 부자 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된 것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는 않는다.
그저 하나님이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에게 부와 성공을 주셨을 뿐이다.

이제 그가 받은 부와 성공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 된다.
자신이 받은 부와 성공은 하나님을 찬양할 제목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해야 할 일을 부여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때부터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열심히 찾아서 행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과 힘 없는 사람들과 슬픔을 당한 사람들,
그리고 고아와 과부와 기업이 없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찾아서
자신이 가진 것으로 돕고 섬기고 나누어야 한다.

그래서 부유하게 되고 성공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고 만족하며 거기서 멈추어 버린다면
그건 사명을 저버린 것이 되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은 모두 허사가 될 뿐이다.

신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중요한 때가 있다.
자신의 마음과 영혼이 낙망할 때다.
삶에 고난과 어려움이 찾아와 견디기 어려울 때다.
죽을 것 같이 아프고 슬플 때다.

그런 때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때다.
물론 순서를 따라 찬양해야 한다.

먼저 자신의 상황을 인정해야 한다.
자신이 심각한 어려움에 빠졌다는 사실,
자신의 마음과 영혼이 파산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다음에는 자신의 영혼을 향해 말해야 한다.
'어찌하여 낙망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라고.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너는 하나님을 기다려라.'라고 말할 수 있고,
'나는 하나남을 찬양하련다.'라는 고백이 나올 수 있다.

그 찬양이 가장 진실한 찬양이기 때문에
결말이 없는 것 같은,
열린 결말 같은 분위기로 시편 42편이 맺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5. 나는?

평신도 때 나는 성공하고 싶었고 부자가 되고 싶었다.
큰 돈을 벌어 하나님을 크게 찬양하고
헌금도 많이 하고 가난한 사람들도 많이 돕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의 진짜 갈망은
내가 부자 되어서 스스로 만족하려는 것,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려는 것,
마음껏 잘 먹고 잘 살은 것이었다.

그것을 목표로 죽도록 열심히 일했다.
나의 마음에는 평안이 없었고 안식도 없었다.
주일에 교회에 가면 졸기 일쑤였다.
형식적인 찬양만 부를 뿐
마음에서 진정한 찬양이 나오지 않았다.

대조적인 사건이 있었다.
신대원에 입학하고 나서 교회를 개척했다.
개척한지 2년 반쯤 되었을 때 교인들이 거의 다 떠났다.

죽을 듯 괴로웠다. 파산한 것 같았다.
이중직 목회를 하고 있었으니
재정적으로 어려워진 것은 없었는데
목회자가 2년 이상 최선을 다해서 사심 없이 목회했는데
교회가 갑자기 없어질 정도로 교인들이 다 떠나버린 것이다.

재정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육신이 아니라 나의 영혼이,
직업적으로가 아니라 목회적으로
나는 완전히 파산한 것 같았다.

그런 절망과 낙망과 좌절 속에서
죽을 듯 아픈 마음을 부여잡고
내가 한 일이 있다.

아침이면 변함없이 말씀을 묵상한 것이었다.
사실 말씀 묵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말씀을 묵상하는 그 시간은
내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이다.

나의 상황에 대해서 하나님과 변론하지 않고서는
죽을 것 같은 마음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말씀을 묵상하는 그 시간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구멍난 나의 가슴이었다.
파산이 나버린 나의 목회였다.
어쩌면 신앙 마저도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위태로움이
나의 마음과 영혼을 엄습해왔다.

그래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울고 또 울었다.
나의 처절한 상황에 대해서 하나님께 따졌다.
이런 상황을 보게 하시려고 나에게 신학 공부하게 하셨냐고,
교회 개척하게 하셨냐고 따지고 또 따졌다.

그렇게 따지다가 문득 깨닫게 되었다.
그 따짐은 결국 나 자신을 향한 따짐이었음을.

그렇게 따지면서 비로서 나는
상황에 대해 절망하고 좌절하고 낙심하고 있는
나의 영혼의 상태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울었다.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여전히 한쪽 가슴은 구멍이 나있는데
다른 한쪽 가슴에는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오랜 시간 말씀을 묵상하면서
말씀 한 구절 붙들고 울며 하나님께 기도했던 때,
그 한구절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감격하고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했던 때,
차 안에서 그 은혜를 누리는 시간이 너무 소중해서
출근시간이 되었음에도 차 안에서 나가기 싫었던 때 등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제서야 나는 너의 영혼을 향해서 따뜻하게 말할 수 있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느냐?
네 하나님과의 따뜻한 추억들이 있지 않느냐?
너는 하나님만 바라라.'라고.

살 것 같았다.
교회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아서
교회에 가면 썰렁함을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살 것 같았다.
내 영혼을 향해서 그렇게 말할 수 있었기에
나는 살아나고 있었다.

회복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돌보셨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이미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다.

부자 되고 성공하고 유명해져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님을,
실패한 듯 하고 무너진 것 같고 파산한 것 같을 때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고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느냐?
너의 하나님을 바라라.'라고 말하는 바로 그때
이미 회복은 임하고 있는 것임을,
아니 이미 회복이 임한 것임을 깊이 경험한 시간이었다.

이런 참된 회복을 누려가는
나와 성도들의 삶이 되길 간절히 기도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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