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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의 언어에서 성령의 언어로

창세기 정경일 형제............... 조회 수 241 추천 수 0 2021.01.08 21:5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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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11:1-9 
설교자 : 정경일 형제 
참고 : http://www.saegilchurch.or.kr/tong/media_board/read.asp?board_idx=1&sub_idx=22&seq=897&lef=02 

바벨의 언어에서 성령의 언어로

(창세기 11:1-9, 사도행전 2:1-11)

 

2014년 8월 3일 주일예배

정경일 형제(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

 
지난해 여름 이맘때 있었던 일입니다.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떤 분을 만나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는데, 헤어질 때 그분이 말했습니다. “한국말을 참 잘 하시네요.” 그때는 그냥 웃고 말았는데, 지금 그런 소리를 듣는다면, 제 아들이 자주 쓰는 표현을 빌려 이렇게 대답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헐!”


사실, 유학 중에는 영어만 어눌한 게 아니고 한국어도 어눌했습니다. 미국인과 대화할 때만이 아니라 한국인과 대화할 때도 잠깐잠깐 말을 멈출 때가 많았습니다. 영어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고 한국어는 점점 어색해지면서, 제 생각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단어와 표현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언어의 이중적 어눌함 때문에 답답함을 느낄 때면, 『장자(莊子)』의 「추수(秋水)」편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가 떠오르곤 했습니다.


연나라의 시골마을 수릉에 살던 한 청년이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에 가서 그곳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배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단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배우기는커녕 그만 자기 걸음걸이까지 잊어버려 고향까지 기어서 돌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도 그 청년처럼 영어를 익히지 못하고 한국어까지 잊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몸서리를 치곤 했습니다. 그랬던 제가 미국에서 학위도 받았고 지금 이렇게 한국어로 말씀증거도 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두 언어를 사용하며 힘들게 살다가 한국에 돌아온 지 일 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말이 유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큰 어려움 없이 한국어로 많은 말을 하고 많은 말을 들으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도 그 연나라 젊은이가 느꼈을 당혹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한국어를 사용하고 살면서 미국에서 영어를 사용하고 살 때보다 더 말이 안 통하는 것 같은 느낌, 대화는 없고 독백만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한국의 정치와 교회 현실을 경험할 때 특히 그런 느낌을 갖게 됩니다.


한국 정치와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들은 보수우파와 근본주의자들입니다.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 만큼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더 관용을 베풀어도 될 텐데, 오히려 더 배타적이고 폭력적입니다. 한국에 돌아온 후, 보수우파가 사용하는 정치적 언어의 배타성과 폭력성이 이전보다 훨씬 더 심해진 것을 느낍니다. 자신과 다른 정치적 입장의 사람들을 무조건 ‘종북좌파’로 몰아붙이고 공격합니다. 마치 ‘주홍글씨’처럼 종북좌파라는 이름을 붙이기만 하면 기본적 인권을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교회는 교회 안과 밖의 ‘다름’에 대해 무서울 정도로 공격적입니다. 얼마 전에도 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보드가야의 마하보디 사원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큰소리로 찬송을 부르고 기도해서 큰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그렇게 바깥의 다름에 대한 폭력만이 아니라 내부의 다름에 대한 폭력도 심각합니다. 지난해 근본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세계교회협의회(WCC) 부산 총회를 방해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총회 전부터 증오 가득한 언어로 WCC를 악마화했고, 총회 기간 중에는 거의 ‘궐기대회’ 수준으로 총회를 훼방을 놓았습니다. WCC가 용공이고, 동성애를 지지하고, 혼합주의를 조장한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비난에 대해 제대로 된 신학적 성찰과 토론 없이, 군복을 입고 WCC 상징물 격파 퍼포먼스를 하고 “WCC사탄아, 물러가라!”를 외치는 모습은 “종북좌파 척결”을 외치는 정치적 극우의 그악스러움을 연상하게 했습니다. 실제로 정치적 극우와 기독교 근본주의는 서로 무척 닮았습니다. 자신들이 사용하는 언어만이 애국과 진리라고 주장하고, 다른 언어는 모두 종북좌파, 이단이라고 공격합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한국교회가 정치적 극우의 언어와 기독교 근본주의의 언어를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역사적으로 한국교회의 근본주의자들은 불의한 권력과 동맹을 맺어왔습니다. 최근 한국의 대형교회들과 근본주의자들이 세월호 참사에 책임이 있는 정부를 일관되게 변호하며 지지하고 있는 것도 그런 정치적, 종교적 동맹의 한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침몰하려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대신 세월호를 침몰시키셨다고 합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경주 불국사로 수학여행을 갈 것이지 왜 제주도로 가다가 그런 사단이 나게 했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희생자들의 가족을 “미개하다”고 한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 잔인한 말들이 집권여당의 정치인들이 아니라 소위 교회지도자들의 입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희생자가 아닌 가해자의 편입니다. 그런 교회의 언어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세상 사람들과 불통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언어가 사회의 언어와 똑같을 필요는 없지만, 사회의 언어보다 윤리적으로 훨씬 더 낮은 수준이라는 것은 안타깝고 슬픈 일입니다.


그런 정치적, 종교적 언어불통을 경험하면서 성서의 두 이야기를 떠올리게 됩니다. 하나는 바벨탑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입니다.


바벨탑 이야기에는 절대권력을 욕망하는 인간에 대한 정치적, 종교적 비판이 담겨 있습니다. 학자들은 바벨탑이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발달한 계단식 피라미드인 지구라트의 하나일 거라고 추정합니다. 그런 거대한 탑을 쌓기 위해서는 강제노동이 필요했고, 그것을 가능하게 할 강력한 정치권력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창세기에 따르면 바벨탑을 쌓은 이는 노아의 아들 함의 손자 니므롯입니다. 창세기는 니므롯을 “세상에 처음 나타난 장사”라고 표현합니다. (창 10:8) 그가 권력자였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표현입니다. 실제로 창세기는 니므롯이 통치하던 지역이 시날 지방의 바벨로부터 앗시리아 지역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의 권력은 거의 ‘준 제국’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권력이 있었기에 바벨의 탑을 “하늘에 닿게” 쌓을 수 있었겠지요.


니므롯은 땅 위의 인간을 지배하는 지상적 권력만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에도 맞서는 천상적 권력까지 욕망했습니다. 그의 이름 ‘니므롯’은 “반란을 일으키다”라는 뜻입니다. 바벨탑과 관련된 유대의 한 전설에 따르면, 니므롯은 노아 시대에 홍수로 인간을 심판한 하나님에게 보복하자며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그리고 궁수들에게 바벨의 탑 꼭대기에서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쏘아 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천사들이 그 화살들을 손으로 모두 잡아내고, 대신 화살에 맞은 것처럼 속이기 위해 붉은 피를 비처럼 떨어뜨립니다. 니므롯과 바벨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죽였다고 믿으며 환호합니다. 이야기의 결말은 성서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언어를 다르게 하셔서 뿔뿔이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게 하십니다.


바벨의 언어는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하는 언어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을 대신 올려놓는 ‘반란’의 언어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권력을, 물질을, 교리를, 이념을, 그리고 종교를 대신 올려놓는 우상의 언어입니다. 그런 바벨의 언어는 천상의 하나님에게 반란하고 지상의 인간을 억압합니다. 바벨의 거대한 탑은 하나님에 대한 반란의 상징이면서 인간에 대한 억압과 착취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란하게 만드신 것은 권력의 억압에 신음하던 이들에게는 저주가 아니라 구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으로 인해 인간은 바벨의 절대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인류 역사의 비극은 그렇게 흩어져 자유로워진 사람들이 다시 바벨의 언어를 욕망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큰 바벨의 언어’가 사라지자 ‘작은 바벨의 언어들’이 생겨났습니다. 그 중의 일부는 니므롯 시대의 바벨의 언어보다 더 강력해졌습니다. 예수 당시에도 그런 바벨의 거대 언어들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지배언어는 ‘정치적 바벨의 언어’였고, 유대 성전의 율법언어는 ‘종교적 바벨의 언어’였습니다. 예수는 정치적, 종교적 바벨의 언어 모두에 도전했습니다. 두 언어는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을 고통에 빠뜨리는 지배와 배제의 언어였기 때문입니다. 대신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언어’를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지배 없는 해방의 언어, 차별 없는 사랑의 언어였습니다. 예수가 사용하는 새 언어에 로마 정치권력과 유대 종교권력은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 둘이 공모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하지만 로마 정치권력과 유대 종교권력은 예수의 몸을 파괴할 수는 있었지만 예수의 언어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스승 예수를 기억하고 따르는 제자들과 교회를 통해 예수의 언어가 부활하고, 성령의 도움으로 지속되고 확산되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사도행전 본문은 성령의 언어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 줍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예수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합니다. 성령을 받은 갈릴래아 출신의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합니다. 그래서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의 말로” 복음을 듣고 이해합니다. 하나의 언어만을 절대화하는 종교적 바벨의 언어와 달리 성령의 언어는 다양한 언어를 통해 진리를 전합니다.


이렇게 불통하는 바벨의 언어와 소통하는 성령의 언어를 대조해 보면서 저는 현대 그리스도교의 언어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오랫동안 화두처럼 붙들고 고심해온 것은 탈종교적, 탈그리스도교적 현대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증거할 것인가입니다. 종교적 바벨의 언어는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종교다원시대, 탈종교시대의 비그리스도인들도 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증거하려면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바벨의 언어와 같은 하나의 절대적 언어, 자폐적 언어가 아니라, 성령을 받은 초대교회 사도들처럼 여러 언어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성령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언어는 아마도 이웃종교의 언어, 과학의 언어, 예술의 언어, 자연의 언어, 침묵의 언어, 고통의 언어, 연대의 언어, 행동의 언어 등일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하나의 종교언어만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근본주의 대형교회들은 예수를 죽인 이들의 정치적, 종교적 바벨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현대 세계 속에서 성령의 언어를 배우고 사용하는 열린 그리스도인들도 있지만, 아직 전통적 교회언어의 문법과 어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그리스도교의 언어에 대한 고심이 더 깊어집니다. 얼마 전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과 함께 하는 기도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 모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언자의 뜨거운 가슴으로 정의를 외쳤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언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도 ‘교회적’이었습니다. 마치 교회 기도회를 그대로 거리로 옮겨 놓은 것 같았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메시지에 공감했지만, 한편으로는 혹시라도 유가족 분들이 불편해하지 않을까 염려했습니다. 그분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분들도 분명히 계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제 옆에 앉아 계시던 유가족 한 분이 우리의 연대에 고마워하시면서도 우리가 사용하는 교회적 언어를 불편해하셨습니다. 교회의 언어가 참 무력하게 들리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시인들과 음악가들이 준비한 〈세월호 참사 100일 추모 시낭송 그리고 음악회: 네 눈물을 기억하라〉에 참석했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한 우리 모두는 슬퍼하고, 아파하고,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마음 깊이 다짐했습니다. 100일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그렇게 우리가 흘렸던 눈물을 기억하게 하고, 100일 이후 101일을 시작할 의지와 용기를 낼 수 있게 해 준 것은 ‘종교’가 아니라 ‘시’와 ‘음악’이었습니다. 종교가 고통에 대한 응답이라면, 구원이 인간을 이기적 존재에서 이타적 존재로 변화시키는 것이라면, 그날 시와 음악의 언어가 종교의 언어보다 더 종교적으로 들렸습니다. 그 경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근본적인 물음을 갖게 합니다. 고통의 시대, 삶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이들은 누구인가 세상 속에서 우는 자와 함께 울며 행동하는 사람들인가, 고통의 감수성을 잃어버린 채 교회라는 방주 안에 가만히 있는 그리스도인들인가


그 물음은 새길의 사명과 나아갈 길을 알려 주는 나침반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새길에게 주시는 사명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여러 언어로 전하라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사명을 위해 새길은 세상과 불통하는 정치적, 종교적 바벨의 언어를 버리고 이 시대 성령의 언어인 ‘고통 받는 이웃의 언어’, ‘종교적 이웃의 언어’, ‘종교 없는 이웃의 언어’를 배우려고 애써 왔습니다. 그 언어들은 우리에게 새롭고 낯설지만, 그래서 더욱 호기심과 설레임을 갖게 합니다. 새로운 언어가 우리를 더 깊고 풍요롭게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새길 안에는 다양한 삶의 언어를 사용하는 자매형제들이 서로 공명하며 공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가 다양할수록 우리는 세상과 더 깊고 넓게 소통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눌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아직도 우리의 삶은 부끄럽고 말은 어눌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우리의 마음이 “성령으로 가득” 차야 하는 것이겠지요.


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바벨의 언어들은 서로 대립하고 미워하고 충돌합니다. 그 언어들의 충돌은 소음이 됩니다. 불협화음이 됩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여러 나라 말로 복음을 전했지만, 그것이 하나의 “소리”로 들렸다고 합니다. 화음입니다! 성령의 언어는 다양한 언어를 억압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아름다운 화음의 구성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 새길이 아름다운 화음의 공동체, 성령의 언어 공동체가 되어 세상과 소통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음악’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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