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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윤리학, 하나님 안에서 욕망하라!

창세기 백소영 교수............... 조회 수 198 추천 수 0 2021.01.08 22:08:02
.........
성경본문 : 창1:26-29 
설교자 : 백소영 교수 
참고 : http://www.saegilchurch.or.kr/tong/media_board/read.asp?board_idx=1&sub_idx=22&seq=900&lef=02 

“욕망의 윤리학, 하나님 안에서 욕망하라!”

(창세기 1:26-29, 로마서 10:12-13, 12:2)

 

2014년 8월 24일 주일예배

백소영 교수(이화여대)

 

1.

모든 설교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번 설교는 더 더욱 괴롭고 힘들고 피하고 싶었습니다. <고통의 시대, 사회적 영성>이라는 주제가 주어졌었거든요. 차라리 이십 분 동안 강단에 서서 침묵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울리는 꽹과리가 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하지만 그런 파격적인 행동도 카리스마가 있는 분이 수행해야 울림이 있지, 저는 그 침묵의 시간동안 저에게 쏟아질 각종 시선을 받으며 서 있을만한 내공도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하여 오늘 강단에서 나누는 말씀은 제 반성문 같은 겁니다. 고통의 시대에, 배운 답은 있는데 행동은 늘 지진아 같아 자괴감이 큰 한 신학도의 고백 같은 겁니다.

 

2.

어느 시대인들, 어느 인생인들 고통이 없겠습니까마는... 최근 몇 달간 우리는 숨 쉴 틈도 없이 몰아치는 비극적이고 참담한 사건 사고로 인해 나라 전체가 고통 가운데 잠겨 있습니다. 사람이 너무 고통스러우면, 너무 아프면 잠시 동안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는 법입니다. 혼이 나가고 현실감이 없고 뭘 어떻게 해야 할 지도 모르고 그저 멍한 상태가 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지난 4월 16일 이후 한 달여간이 그랬습니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단기기억상실증 환자처럼, 그 즈음의 일들은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생생한 것은 4월 18일 저녁 8시 무렵부터 느꼈던 극심한 고통과 불안함 입니다. 설마 설마 했습니다. 연안이고, 배가 급격하게 침몰한 것도 아니고, 더구나 많은 전문가들이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화면 속에서 세월호가 완전히 사라진 마당에도 에어포켓 운운하던 말을 또 믿으며 소망을 가져 보았었습니다. 그러던 3일째,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돌아서서 설거지를 하는데, 속이 막 답답했습니다. 먹었던 것들을 다 비워냈습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습니다. 숨이 막혔습니다. 그리고 추웠습니다. 귀도 멍멍하고... 밤이 늦어 잠을 청했음에도 엄청난 압박감과 두려움, 고통 속에서 저는 나서 처음으로 밤을 하얗게 샜습니다. 그리고 제 몸이 먼저 알아버렸습니다. 어떻게... 아이들이 죽나보다, 다 죽다보다...

 

저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예민한 편이기는 하지만 미리 무엇을 본다든가 멀리서 벌어지는 일을 느낀다던가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4월 18일 저녁의 경험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때 처음으로,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아니라, 제 몸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결국 생명은... 하나로 통하는구나! 연결되어 있구나!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결국 하나의 커다란 유기적 생명으로 살아가는 거라더니, 정말 그렇구나. 너무나 어린 생명들이라, 너무나 많은 생명들이라, 너무나 간절한 외침이라... 그래서 그 아이들이 온 몸으로 전하는 고통이, 아이들의 애통하는 영이 전해진 거구나. 그 아픔이 내 안으로 비집고 들어온 거구나.

 

아직은 모릅니다. 외신에서도, 엄마 아빠들도... 자는 듯 돌아온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배 안에서 오래 견뎠던 것 같다고... 아직 조사가 진행된 것도 아니고, 어이없게도 제대로 조사하자는 법 만들기조차 이렇게 지지부진한 마당이니 4월 18일 저녁에 제가 느꼈던 그 고통을 실체적으로 입증할 증거는 아직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 몸은 스러져간 아이들의 고통을 느꼈다고 믿습니다. 상당히 이성적인 저였고, 당시 아이들이 그렇게나 많이 죽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상황이라, 그래서 그 고통이 저는 더 낯설고 그래서 그만큼 더 생생했습니다.

 

그렇게 몸으로 함께 느끼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영성이란 본디 공동체적이라는 것을요. 결코 개인적 영성, 사적 영성이란 존재치 않는다는 것을요. 우리의 영성이 만약 개인에 머물고 사적 범주에 갇힌다면 그것은 영성이 본디 그러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전제들이 영성을 개인 안에, 사적 범주 안에 가두었을 뿐이라는 것을요.

 

그날의 경험 이후 저는 ‘기공성(porosity)’이라는, 공학이나 생물학에서나 논의할 단어를 묵상 중입니다. 개인적 성향으로 미루어 신비주의적인 존재론에 빠지기에 가장 마지막 사람일 것 같았던 저였는데... 저는 2014년 4월 18일 저녁의 경험으로 인해 존재의 신비함, 인간 영성의 공동체성을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영성은 결코 고립될 수 없다는 것, 우리 존재의 기공을 통해 흘러 들어오고 흘러 나간다는 것, 다만 우리 개인의 아집이나 전제, 신념이나 태도에 따라 그 ‘통로’가 좁아들 수도 혼탁하게 걸러질 수도 혹은 아예 막혀버릴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갓난아기나 수련이 길고 깊은 수도자들은 ‘존재의 숨구멍’이 맑고 커서 타인의 고통, 만물의 고통, 하나님의 고통을 즉각적으로 함께 느끼나 봅니다.

 

3.

영성을 어떻게 정의할까요 저는 ‘영성(靈性)’을 ‘하나님-닮은-성’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영성은 신성이 아닙니다. 그러나 영성은 인성도 아닙니다. 저는 영성을,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의 교통을 통해 한 인격 안에 생성되는 거룩한 특성(性)’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영성은 하나님께로부터 기원했으니 인간에게는 자기초월의 ‘성’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이해하는 한 ‘하나님의 영’인 성령과는 다릅니다. 물론 성령과 교통하나 ‘영성’은 분명히 인간 안에서 생성된 ‘특성’입니다. 한 인간이 통전적 몸과 영과 혼으로 하나님의 영과 호흡하며, 또한 이웃과 세계와 호흡하며 만들어낸 ‘성’입니다. 때문에 개별 인간의 영성은 깊이도 폭도 다를 수 있습니다. 인간이 가꾸어가는 ‘성’이요 인격과 영혼의 자람과 함께 자라나는 ‘성’이니까요.

 

영성이 하나님의 영과 동일하다면 개인의 영성에 차이가 없을 겁니다. 우리는 우리 존재 안에 하나님의 영을 받는 그 즉시 모두 클론(복제생명체)처럼 생각하고 클론처럼 행동하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영성이 그저 개별 자아가 계발한 인성에 불과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 안에 ‘존재의 숨구멍’을 통해 들어온 하나님의 영이라는 공통의 영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영성은 필연적으로 사회적이고 공공의 것입니다. 우리가 개별자로 존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전체 그림으로 보자면 우주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은 결국 하나로 연결된 겁니다.

 

우리가 존재의 숨구멍을 통해 하나님의 영과 소통하며 우리의 영성을 계속 자라게 하려면 어찌 해야 할까요 이는 마치 호흡과도 같이, 존재의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 가능하지 싶습니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종교적 신비주의 전통의 선배들이 비슷한 말을 많이 했습니다. 들숨을 쉴 때 하나님의 영을 우리 안에 가득 담고 하나님의 우주적 뜻을 들으며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우리 영성의 가장 핵심적인 원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각자가 소유하고 길러내고 있는 영성을 서로 교통하는 가운데 ‘너의 영성’도 들이 마십니다. 슬프고 애통하는 영성이면 그 영성 그대로, 밝고 살리는 영성이면 그 영성 그대로, 그렇게 이웃의 영성과 교통합니다.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의 기운을 부여받은 이 땅의 모든 생명체들과 관계하는 가운데 그들의 ‘생기(生氣)’도 들이 마십니다. 소나무가 우거진 산림 한가운데 서 있으면 우리 몸도 상쾌해지잖아요 하나님의 영성, 이웃의 영성, 우주만물의 생기를 내 안에 들이마시면서 나의 영성은 풍부해질 뿐만 아니라 구체적 내용을 가지게 됩니다.

 

매연 가득한 공간에 가 있으면 매연이 몸속으로 들어오고, 꽃내음 가득한 꽃밭 한가운데 서 있으면 꽃향기가 내 몸 속으로 들어오듯이... 우리가 어디에 서 있고 누구와 가까이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 존재 안에서 들이마셔지는 하나님의 영, 이웃의 영, 우주만물의 생기는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이웃의 영이, 우주만물의 생기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면 그 고통은 고스란히 내 안으로 흘러들어오겠지요. 그래서 ‘공감’은 생명체의 고귀한 능력인가 봅니다. 광화문 시청 광장 모퉁이에만 서도 울컥하고 가슴이 미어지는 것, 그건 거기서 사십 일 동안 애끓는 부정으로 곡기를 끊은 한 생명의 고통의 영이 내 존재 안으로 흘러들어오기 때문이겠지요.

 

물론 존재의 숨구멍을 꽉 닫아버린 사람들도 있기는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영이 들고 날지 못 할 만큼 완악하게 마음을 굳게 하여 자기 안에서 자기만을 위해 만들어낸 것들을 밖으로 내어놓게 되는 건 그런 까닭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제 안에 있는 것만을 자꾸 밖으로 뱉어 냅니다. 들어오는 것은 없고 나오는 것만 있습니다. 이미 답을 가진 사람들. 하여 하나님과 이웃과 세상과 열린 소통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 어쩌면 그 능력을 이미 상실한 사람들. 그들 안에서 발현되는 욕망은 지극히 개인적입니다. 혹은 집단 이기주의이거나요. 한마디로 특수한 생명에만 우선순위를 두는 편파주의입니다. 그들의 욕망은 오직 자기 자신, 그리고 자기 집단만을 위한 이기주의의 발로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들이 밖으로 쏟아낸 자기 욕망의 언어들을 ‘더럽다’ ‘속되다’고 하셨습니다.

 

4.

오늘 설교의 제목이 ‘욕망의 윤리학’이어서 아마 많이 걱정을 하셨을 줄 압니다. 그 어느 때보다 개신교 목회자와 평신도들의 사적 욕망, 물질적 욕망, 세상적 욕망들이 수면 위로 떠올라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는 마당이니까요. 하필 이럴 때 ‘욕망’이라니... 차라리 다른 단어를 쓰지... 하지만 제도권에서 길들여지고 내면화된 문명적 욕망이 아니라, 존재와 실재에 충실한 본연의 욕망이 가진 ‘전복적’ 힘에 대해서 말한 라캉이라는 정신분석학자의 개념어를 차용하여 오늘 설교 제목을 정했습니다. 라캉은 아주 난해하고 어렵습니다. 하여 한 은사님께서는 라캉이 한국 신학계에 유행하기 전에 은퇴한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까지 말씀하신 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저도 라캉을 원어로 읽어낼 정도는 못됩니다. 번역서에 의존하고 2차 자료에 도움을 받지요. 이런 마당에 설교 강단에서 라캉의 이론을 설명할 게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의 윤리학적 명제가 가진 핵심 메시지가 오늘 고통의 시대, 사회적 영성의 가능성과 역할을 고민하는 우리에게, 일종의 열쇠를 던져준다고 생각되어 잠시 나누려 합니다.

 

라캉의 윤리학을 한마디로 하자면 이렇습니다. “너의 욕망을 결코 포기하지 마라!” “내 안에서 용솟음쳐 나오는 그 욕망에 따라 행동하기를 멈추지 마라!” 이게 무슨 윤리냐 싶죠.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고, 모든 개인이 제멋대로 제가 욕망하는 대로 행동하면 윤리 도덕이 무슨 소용이냐 싶고요. 하지만 라캉이 말한 ‘욕망’은 결코 문명적 옷을 덧입은 그런 욕망이 아니었습니다. 자본주의 문명의 옷을 덧입은 개인은 부자가 되는 욕망을 꿈꾸겠죠. 더 높은 연봉, 더 높은 수익을 욕망하면서요. 소비자본주의가 상품화한 육체 문화 안에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바비 인형을 끌어안고 살았던 개인은 44 사이즈의 몸을 욕망할 겁니다. 경쟁력 있는 몸으로 멋진 연애, 트로피 같이 얻게 되는 풍요로운 삶을 욕망하면서요. 폭력적으로 제압하는 것이 권위요 위계라고 배워온 문화권[예를 들어 군대문화] 안에서 학습 받은 개인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보면 짓밟고 모욕을 주고 가학하고 싶은 욕망이 불끈불끈 올라오겠지요.

 

하지만, 라캉이 말한 욕망은 이런 욕망이 아닙니다. 라캉의 욕망은 제도나 사상, 이데올로기나 법률이 제한하지 못하는 근원적인 욕망을 말합니다. 라캉은 이런 욕망이 가진 순수성과 전복적 힘의 사례로 ‘안티고네’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왕위계승권을 놓고 가족 간 권력다툼에서 패한 오빠 폴리네이케스는 죽임을 당합니다. 승자인 숙부 크레온에게 폴리네이케스의 주검은 반역자의 주검이죠. 하여 크레온은 그의 주검을 벌거벗기고 모욕을 주고 참혹하게 유린하여 성 밖에 버렸습니다. 이것은 크레온의 법체계 안에서는 ‘합법적’인 행위였습니다. 누구나 나의 왕권에 도전을 하고 공동체적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는 이리 된다는 경고를 담아, 크레온은 폴리네이케스의 주검을 묻는 행위를 ‘불법’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러한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요. 하지만 폴리케이케스의 여동생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법을 저버립니다. 라캉은 안티고네가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기 때문에 기존 질서의 체계 너머로 걸어 나갈 수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안티고네는 특정한 신념이나 윤리적 덕목에 이끌려 오빠를 묻으려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오빠, 내가 진정으로 아꼈던 생명이 저기 주검의 상태로 실재합니다. 그를 살릴 수는 없으나 애통하는 마음으로 그를 수습하고 고이 묻어줄 수는 있습니다. 그를 묻어주고 싶습니다. 내 마음이 원합니다. 나는 그를 묻어주기를 욕망합니다. 그런데 크레온의 법은 이를 ‘불법’이라고 합니다. 내가 나의 오빠를 묻는 행위를 막으려 합니다. 나는 어찌해야할까요 안테고네는 자신의 본연의 욕망에 충실했고, 진심을 다해 오빠를 묻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불법’행위를 했다 하여 잡히고 지하 동굴에 갇히고 결국 자살을 하고 말죠.

 

라캉은 안티고네의 욕망이 소위 아버지들의 법, 현행법[그의 표현으로는 상징적 규범들]에 대항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고 했습니다. 자신들의 권력과 부를 유지하기 위한 방식으로 현행법을 제정하고 그 법에 따라 사회적 행동을 규제하고 공동체 구성원을 처벌하는 권한을 가진 사람들의 세상에서, 본연의 욕망대로 행동하는 사람은 언제나 죽을 수밖에 없다고요.

 

이 대목에서 여러분은 우리가 아는 한 사람이 얼른 떠오르실 것 같습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아버지의 법이었던 ‘안식법’을 어기면서까지,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던 한 사람 말입니다. 손이 곱은 병자를 보고도, “아! 기적을 행하는 예수와 저이가 만났으니 저이가 곧 고침을 받겠구나!” 그리 기뻐하는 대신에 “오호라, 잘 걸렸다. 저 사람은 아픈 이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이이니 안식법을 어기는 모습을 현장에서 잡겠구나!” 그리 생각했던 율법학자들, 바리새인들을 보며 예수는 애통해하고 분노했습니다. 그들의 반(反)생명적인 사악한 기운이 예수에게 고스란히 흘러들어와 예수를 아프게 했던 것이겠지요. 배고픈 사람들이 밀이삭 좀 까불러 먹었다고 안식법 위반, 하루종일 치유사역에 바빴던 예수와 제자들이 손 안 씻고 떡 먹었다고 핀잔, 온통 법, 법, 법 노래를 부르며 예수를 비난했던 그들을 향해 예수는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자”라고 날 선 비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라캉의 말처럼, 본연의 욕망 즉 눈앞에서 생명의 스러짐을 도저히 볼 수 없어 살리는 선택을 했던 예수의 욕망은 상징계, 즉 아버지 법을 도전하였고 결국 그 법이 힘을 가지고 있었던 세계에서 ‘신성모독’의 죄명으로 살해당했습니다.

 

5.

오늘 읽은 성경본문은 도대체 언제 쓰일까 욕망의 윤리학과는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나 새길 교회 교인들처럼 기승전결을 잘 이해하시는 분들이시라면 이쯤에서 충분히 궁금해지실 법도 합니다. 생뚱맞게 웬 창세기 더구나 생육하고 번성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이 말 때문에 자기보다 힘없는 인간과 자연을 마구 짓밟았던 역사가 긴데, 하필 이 본문이람 한국 개신교 대형교회 목회자들이나 세속 질서를 따라 피고용인들을 착취(갑질)하는 평신도 직업인들이 두드러진 요즘에

 

사실 ‘다스리다’라는 동사는 히브리어 ‘라다radah’인데, 이 동사의 해석을 놓고 학자들 간에 이런 저런 견해가 분분합니다. 혹자는 이 동사가 ‘포도를 포도즙 틀에서 짓이기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서, 인간의 필요에 따라 통치하는 권한이라 풀기도 하고, 혹자는 같은 어원을 가진 아카드어 ‘라두’가 ‘양떼를 이끌고 돌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데 착안하여, 어리고 어설프고 힘없는 생명을 보살피고 살리고 보듬는 행위를 의미한다고 하기도 합니다. 성서학자들도 합의를 못 보는 마당에, 저희는 마음 가는 대로 동조해도 될 듯합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어느 해석에 더 마음이 가세요


창세기 1장 28절-30절

<개역개정>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타락 이전의 인간이 존재하게 되면서 받는 사명은 1) 그 자신은 생육하고 번성할 것, 즉 살 것! 2)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릴 것! 살게 할 것! 3) 내가 준 먹거리를 잘 먹을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존재하기, 돌보기, 잘 먹기의 사명입니다. 아주 기본적인 사명! 이러고만 살아도 되는 것이 ‘에덴’이었습니다. 물론 탱자탱자 놀면서 먹기만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씨 있는 식물이라는 말을 묵상하며 저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씨가 있다는 것은 다음 소산에 대한 약속이구나! 심고 가꾸고 열매를 먹고, 그 노동은 타락 이전에도 있었겠구나! 다만 땅과 인간이 화목한 관계에 있던 ‘에덴 시절’에의 노동은 고통스런 것이 아니었겠구나! 엉겅퀴를 내고(아담) 밭은 갈아도 효력이 없게 된(가인), 범죄 이전의 상태에서 노동은 즐겁고 쉽고 행복한 것이었겠구나!

 

예수가 욕망했던 것은 이미 잃어버린 그 에덴의 상태, 폴 틸리히가 ‘꿈꾸는 순수’라 불렀던 그 창조질서였지 싶습니다. 예수는 살고, 살려내고, 기쁘게 노동하며, 먹거리를 먹는 세상을 욕망했습니다. 로마 지배자들만, 성전 제사장들만 잘 살고, 잘 먹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모든 인간이 동등하게, 평등하게, 모두 다 말입니다. 소수만 살고, 다수가 죽게 된 제도라면, 누군가는 배불리 먹는데 누군가는 먹거리가 끊인 [심지어 극심한 고통으로 스스로 곡기를 끊는] 그런 세상이라면, 그 제도와 그런 세상에 저항하고 그 법을 어기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욕망하겠다는 것이었지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0장 12-13, 12: 2)

 

그리스도인들이 욕망해야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입니다. 그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욕망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느 한 사람도 배제하지 않는 우주적 보편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존재의 숨구멍이 맑고 크고 선명하다면 멀리서도 하나님의 고통, 이웃의 고통, 만물의 고통을 느끼고 공감하고 공명하게 함께 울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느덧 훌쩍 어른이 된 저희는 세상 문화, 세상 제도, 세상 법들이 만들어놓은 필터, 칸막이, 두터운 장벽들을 만들어 놓아 우리 존재의 숨구멍은 잘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예 막혀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적어도 아직 막히지는 않았음에 감사하며, 신음하는 이웃 곁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할 것 같습니다.

 
기도를 대신하여 함석헌 선생님의 글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사람은 사람에 의해서만 사람이 됩니다.

사람은 서로 감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아, 자아 하지만 자아는 결코 홀로가 아닙니다.

나는 수없는 내가 모여서 된 것입니다.

...

그러므로 나들은 서로 알아보는 것이고, 알아봄으로 사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가만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만날 때 나는 한 치 높아지고, 네가 그 나를 볼 때 너는

또 한 치 높아집니다.

...

생명, 더구나 인격적인 생명은 결국 에스컬레이션입니다.

계단적으로 높아감입니다.

서로 에스컬레이션을 일으키지 못하는 나나 너는 죽을 것입니다.

그래서 만나자는 것입니다. 만나면 산다. 여의면 죽는다. <함석헌 전집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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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71 누가복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 눅9:1-2  김경형목사  2020-12-30 132
16970 로마서 구원의 사역이 영원토록 롬16:25-27  강승호목사  2020-12-29 123
16969 갈라디아 종에서 아들로! (from servant to son) 갈4:4-7  최용우 전도  2020-12-27 238
16968 갈라디아 행위에서 존재로! 갈4:4-7  정용섭 목사  2020-12-27 208
16967 누가복음 하나님 앞에 다시 서다 눅15:11-24  김기성 목사  2020-12-27 344
16966 마태복음 내 안에 있는 헤롯을 밀어내라 마2:1-12  김기성 목사  2020-12-25 319
16965 누가복음 하나님의 구원 계획 눅2:22-40  강승호목사  2020-12-25 241
16964 시편 말씀을 보내시는 하나님 시107:19-20  김남준 목사  2020-12-24 308
16963 디모데후 주께서 하실 수 있나이다 딤후2:9  김남준 목사  2020-12-24 213
16962 시편 길 찾게 하는 연단 시119:67  김남준 목사  2020-12-24 271
16961 욥기 나의 믿음, 순금 같이 되어 욥23:10  김남준 목사  2020-12-24 275
16960 욥기 죄인을 건지심 욥22:30  김남준 목사  2020-12-24 83
16959 욥기 하나님이 낮추실 때 욥22:29  김남준 목사  2020-12-24 185
16958 욥기 화목을 이룬 자의 행복 욥22:28  김남준 목사  2020-12-24 177
16957 욥기 네 기도를 들으실 때 욥22:27  김남준 목사  2020-12-24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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