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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가 하나님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결정한다]
(누가복음 4:31-44)
비슷한 일을 하는 것 같고
심지어 똑같은 일을 하는 것 같아도,
목표가 무엇인지에 따라 그 일을 행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인지 아닌지가 결정된다.
주님은 어떤 일을 하셨으며 왜 하셨을까?
그리고 그 일을 하신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1.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심
주님이 하신 일 중에 두드러진 일이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을 고치신 일이었다.
(눅 4:35, 새번역) 예수께서 그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입을 닥치고,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그러자 귀신이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다가 쓰러뜨려 놓고 그에게서 떠나갔는데, 그에게 상처는 입히지 않았다.
(눅 4:39, 새번역)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다가서서 굽어보시고, 열병을 꾸짖으셨다. 그러자 열병이 물러가고, 그 여자는 곧 일어나서 그들에게 시중을 들었다.
이렇게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신 주님의 사역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주님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셨으니
신자는 모두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사역을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일까?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사역을 하는 사람이
올바른 하나님의 사람일까?
그럴 리가 없다.
주님이 그 사역을 하신 이유와 목표를 알아야 한다.
주님은 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셨을까?
귀신 들리고 중병에 걸린 사람은 관계가 깨뜨려진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뜨려지고 사람과의 관계도 깨뜨려진다.
심지어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깨뜨려진다.
주님이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을 고치신 것은
단순히 '신기한' 일을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관계를 회복시키신 것이다.
귀신이 나가고 병이 고쳐진 사람은 비로소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자신에 대한 이미지도 건강해져 갈 것이다.
주님의 사역의 목표는 '신기한 일'에 있지 않았고
단순히 귀신을 쫓아내는 행위 자체에도 있지 않았고
병을 고치는 의사가 되는 것에도 있지 않았다.
주님의 사역의 목표는 '회복'이었다.
2. 주님의 목표가 아닌 것
주님이 사역하실 때 결코 그 목표로 하지 않으신 것이 있었다.
(눅 4:41, 새번역) 또 귀신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떠나가며,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꾸짖으시며, 귀신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그가 그리스도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어
유명해지고자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자신의 신분을 아는 귀신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주님은 절대 유명해지지 않으려 하신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주님은 사역을 하지 않으셔야 했다.
사역을 안 하면 유명해질 가능성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하지는 않으셨다.
(눅 4:43, 새번역)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나는 이 일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주님은 계속 사역을 하셨는데,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니며 사역을 하셨다.
남들이 할 수 없는 사역을 이곳 저곳에서 하셨으니
주님은 유명해질 수밖에 없으셨을 것이다.
주님은 유명해지는 것을 전혀 목표로 삼지 않으셨다.
오히려 유명해지지 않는 것이 목표가 아닐까 싶은 태도셨다.
그런데 사람을 회복시키는 것이 주님의 사명이셨기에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사역을 계속 하셔야 했다.
올바른 사역을 하셨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알려지고 유명해질 수밖에 없으셨던 주님이었다.
3. 유명이 아니라 회복
주님의 가르침의 특징이 있었다.
(눅 4:32, 새번역) 그런데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랐으니, 그의 말씀이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말씀이 권위가 있었다는 특징이다.
'권위'란 무엇일까?
잘 가르치는 것일까? 말을 잘하는 것일까?
논리가 탁월한 것일까? 흡인력이 있는 가르침일까?
그 모든 것은 '형식'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인데,
주님의 가르치심의 '권위'는 형식의 관점은 아닌 것 같다.
그럼 무엇이었을까?
주님의 가르침의 '권위'는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을 고치신 것과 관련이 있다.
주님의 가르치심은 사람을 '회복'시키는 권위였다.
주님이 말을 잘 하셨는지, 논리가 탁월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주님의 가르치심을 들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사실이다.
신앙적인 가르침의 '권위'는
말을 잘 하는 것이나 감동을 주는 말을 하는 것이나
마음에 흥분을 만들어내는 것 등이 아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지와도 상관이 없다.
신앙의 관점에서 가르침의 '권위'는 언제나
그 가르침을 통해 사람이 회복되느냐에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사람과의 관계도 회복되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회복되게 하는 가르침이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유명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회복만이 사역의 목표가 되어야 하고
신앙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신자라면 누구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하고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하고
자신과의 관계도 회복되어야 한다.
그리고 타인들이 하나님과, 이웃과, 자기 자신과 관계가 회복되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한다.
4. 나는?
신학 공부를 하면서 받은 충격이 있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타락한 목사들이 많은 것인지,
그리고 타락을 향해 달려가는 목사들은 또 왜 그렇게 많은 것인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일반신자였을 때는 목사에 대해서 대부분 좋게 보았기 때문에
그런 현실을 직면한 것이 나에게는 너무 큰 충격이었다.
그래서 신대원 2학년 때 교회를 개척하면서
교회의 목표를 '목회자의 야망이 아니라
성도의 행복을 추구하는 교회',
'대형화를 추구하지 않는 교회'로 잡았고,
매주 재정을 주보에 공개하여 재정의 투명성을 확보했다.
그렇게 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내가 유명해지지 않는 것,
그래서 타락하지 않는 것이었다.
커지고 높아지고 유명해지는 것과 타락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를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유명해지고 싶지 않았고 타락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러니가 있었다.
복음을 전해야 했고 말씀의 가치를 전해야 했고
말씀에 삶을 거는 것이 생명임을 알려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혀 유명하지 않은 내가
조금은 알려져야 했다.
그 모순에 직면해서 많은 고민을 했다.
지금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유명해지기 싫지만 말씀을 스스로 묵상하는 신자를 세우려면
어느 정도는 알려져야 하는 모순된 논리 속에서
하루하루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
이 모순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감사하게도 균형이 잘 잡아지고 있는 것 같다.
유명해질 만큼 능력은 없고,
말씀에 삶을 건다는 것이 생각보다는 쉽지 않아서
교인들의 숫자가 급속도록 늘어나지 않고 있다.
만약 목사로서 게으르게 사역을 해서
교인들의 숫자가 늘지 않는 것이라면
나는 게으른 종으로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정도로 게으른 것 같지는 않다.
최선을 다해 사역을 하고 있고
사역의 열매도 작지만 계속 나오는 것 같다.
말씀으로 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회복되고 있음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오고 있어서 감사하다.
감사하게도 너무 유명해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급속도로 교인들이 늘어나지도 않고 있고
메스컴을 타고 있지도 않고 있다.
결코 너무 유명해지는 길로 가고 싶지 않다.
물론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서 회복될 수 있는 사람들,
말씀을 통해서 회복되고자 하는 갈망을 가진 분들과는
어떻게든 만나고 싶다.
유명함이 아니라 사람의 회복만을 사역의 목표로 삼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 말씀을 통해 회복되는 과정을
멈추지 않는 신자의 삶을 잘 살아가기만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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