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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부활을 넘어 예수의 재림으로

누가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60 추천 수 0 2021.01.19 22: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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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5:20-34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9.4.15 성암감리교회 http://sungamch.net 

그리스도의 부활을 넘어 예수의 재림으로

눅15:20-34

 

1914-1945년의 30년을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시대라고 합니다. 그 기간 동안 1,2차 세계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처참함을 체험 하고 나자 이전까지의 세대에서 묻지 않고 답하지 않았던 질문과 대답을 신학이 해야만 했습니다. 이 때 등장하는 신학자들이 불트만을 필두로 하여 칼 바르트, 폴 틸리히, 본 회퍼, 케제만등 그야말로 신학도가 아닌 사람들도 필독서로 인정하던 책들을 썼던 학자들입니다. 이 시절에는 신학이 인문학을 다시금 이끄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불트만은 우주선이 날아다니는 근대의 세계관에 맞게 인간에 대한 이야기, 즉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어떻게 신 앞에 설 수 있는가?'와 같은 시선으로 성서를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불트만이 말하는 ‘인간’은 지극히 근대적인 개념인 ‘개인’ (Individual)과 같은 개념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개인’이란 변하지 않는 어떤 에센스를 가지고 있는 인간, 이른바 영혼이나 영(Spirit)을 가지고 있는 윤리적 결단을 할 수 있는, 세상과 떨어져 생각할 수 있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케제만은 바울을 통해 인간은 개인의 영적 존재가 아니라 몸을 가진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불트만이라는 신학자는 인간을 개개인이 윤리적인 결단이 가능한 영적인 존재로 보는데, 케제만이라는 불트만의 제자는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케제만의 인간 이해는 바울을 통해서 보는 것이었는데, 인간은 개인이나 윤리적 존재가 아니라. 서로 다른 차이를 가지고 있으면서 연대를 통해 그 차이를 견디어내는 (유대인, 헬라인, 노예, 자유인, 남성, 여성) 공동체적 존재입니다. 또한 몸은 세상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결단이나 생각을 할 때 세상과 분리되어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갑과 을이 있다고 합시다. 갑과 을이 스스로의 결심을 해서 하루아침에 갑과 을의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다는 겁니다. 갑이 “그래 이제 갑질 하지 말아야지 이런 건 나쁜 일이니까”라고 생각한다고 갑이 금방 갑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을이 “그래 이제 을이 되지 말자.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살자”라고 결심한다고 을을 벗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윤리적인 능력으로 그 처지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듯 케제만이 보는 바울에게 인간은 그의 외부의 여러 조건과 관계에 뿌리박고 있는 존재입니다. 적어도 바울에게 하루하루의 노력으로 자신의 영성을 길러서 좀 더 완전한 존재로 태어난다는 생각은 인간을 너무 쉽게 보는 것입니다. 그랬다면 바울은 로마서 7장에 그리도 길게 선을 행함에 부족한 자신을 질타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을 리 만무합니다. 또한 그의 서신의 거의 절반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을 강조했을 리도 없습니다. 바울에게는 결단할 수 있는 개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인간은 세상속의 모순에 갇힌 존재입니다. 스스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죄악으로 관영하여 인간을 죄악 된 존재로 만들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풀고자 한 숙제는 죄인 된 인간을 어떻게 의롭게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이 죄악 된 세계를 변화시킬 것인가 였습니다.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세월호를 예로 들어보죠. 세월호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로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돈을 좀 더 벌기 위해 더 많은 짐을 실은 선박회사와 이를 눈감은 선장과 선원, 그리고 관계당국자들의 윤리적 문제만을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배와 승객들을 버리고 자기의 살길만을 찾은 선장과 선원들, 그리고 이상하게도 승객이 아닌 선원들을 먼저 구조한 당시의 해경대원들이나 그 명령을 내린 사람들만을 문제 삼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월호 사건은 몇몇 사람이 올바른 윤리적 판단을 했다면 없었을 수도 있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월호의 비극은 몇몇 사람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특별하게 일어났던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 2, 제 3의 세월호는 없을까요?

 

지금도 그러한 문제를 안고 출항하고 있는 선박은 없을까요? 어쩌면 세월호의 비극은 이른바 신자유주의로 설명되는 작금의 시대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으로 인한 사건은 아닐까요? 능률과 이윤을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도 무릅쓰는, 좀 더 나은 경제적 인재를 기르기 위해서는 현대 교육이 가지고 있는 어떤 위험성도 상관 않는, 인간의 존엄성이 이윤으로 치환되는 이 시대의 자화상을 가장 비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세월호가 아닐까요?

 

여기서 모순이라는 말을 ‘죄’라는 표현으로 바꾸면 바로 정확하게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죄의 문제에 대한 현실적 접근이 가능해집니다. 바로 세계가 죄의 악마적인 순환으로 이루진다는 것이 바울의 이해였기에 이 세계 속에서 어떤 해결책을 찾는 것이 참으로 불가능해 보이기에, 세계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정수를 깨닫지 못하고 여타의 다른 어떤 가치를 우상으로 삼았기에 벌어지는 비극의 현장이 바로 인간이 살아가는 장소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인식을 근대의 교회와 신학은 인식하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죽은 자를 위한 신학’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죽음을 자연스러운 인간 존재의 현상으로 해석하고 그 죽음 뒤의 구원(천국가기)을 이 모든 모순을 해결하는 도구로 삼아버렸기에 일어난 현상인 것입니다. 이를 케제만의 표현으로 하면 좁디좁은 개인적 인간이해를 통해 바울의 인간론, 교회론, 묵시론, 칭의론을 우르르 담아버린 결과입니다. 케제만은 이를 반대로 뒤집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그중에 현대교회가 잃어버린 묵시론, 즉 종말론을 필두로 바울의 신학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두개의 서로 다른 종말론(현재적종말론, 미래적 종말론)을 그의 신학안에서 극복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이란 무엇인가를 길게 논의하는 데, 바로 바울의 종말론이 종합되는 부분입니다. 즉 부활이란 카드를 꺼냄으로써 현재적 종말론의 허구성을 고발합니다. 현재적 종말론의 입장 또는 열광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미래의 부활은 중요하지도 않고 더 나아가 거부될 수밖에 없습니다. 현시대에서 영적 체험을 통해 한순간의 변화를 말한다거나 영적인 사람이 되었으므로 마치 죄악과는 단절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식의 생각이 현재적 종말론과 그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가진 가장 큰 문제는 현시대의 엄연히 존재하는 모순을 무시함으로써 하나님의 사역을 일개 개인의 정신적 영역으로 한정하는 데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현재적 종말론이 강조되면 될수록, 그리스도안의 새로운 피조물이 겪어야하는 세상의 모순과 죄에 대한 질문은 늘어만 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왜 세월호와 같은 비극이 이 시대, 또한 신자에게도 일어나는가?'에 대한 질문을 영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해소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결국 영혼은 중요하고 몸은 세계에 속하여 중요하지 않다는 헬레니즘적 사고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헬레니즘적, 또는 신플라톤주의에 교회가 젖어 들어가게 되면, 실제로 현실이 그러한데, 예수의 재림이나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등은 그 의미를 점점 잃어가고 구원받은 자와 멸망 받을 자의 구분만이 남아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항하는 바울은 부활의 그 어떤 현재적 의미도 부정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의 내용이 그러합니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였으나 그 부활 사건은 현재의 신자들에게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현시대를 살아가는 신자에게 하나님의 의는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요?

 

부활을 미래의 사건으로 미루어 놓은 바울은 부활에 대한 희망으로 ‘새로운 복종’을 제시했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참여함이 바로 부활에 참여함을 말하지만 부활은 미래의 사건으로 세계의 모든 권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게 옮겨갔을 때에야 비로소 이루어질 것이었습니다(고전 15:23-24). 이 새로운 관점이 바로 바울의 종말론을 그 이전의 묵시적 종말론과 현재적 종말론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게 만들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아직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 시작은 이미 시작되었으나 그 완성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완성은 오로지 이 세계의 죽음이 완전히 사라질 때에, 죽음의 권력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정복될 때만이 일어날 것입니다.

 

바울에게 구원이란 개인의 영적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낼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몸을 통하여 세상과 소통합니다. 몸을 통해 먹고, 마시고, 울고, 웃고, 슬퍼하고, 자신의 꿈을 이루고 사랑을 합니다. 또한 몸은 언제나 타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타인에 의해 우리의 몸은 또한 몸으로 기능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합니다. 더 나아가 세계 속에 속한 우리의 몸은 또한 세계의 권력에 노출되어 끊임없이 유혹받으며 조종당합니다. 바울은 개인의 몸은 너무나 연약하기에 언제나 공동체로서의 몸을 강조합니다(고전 12:14-26). 서로의 차이를 넘어 연대함으로 '한 몸'이 된 공동체는 세상의 불의와 대적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기에 바울의 구원은 매우 정치적입니다. 우리의 공동체에 누군가가 슬픔에 빠져 있을 때 그 공동체가 기뻐할 수 있을까요? 한 몸의 아픔의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이의 아픔이 될 때라야만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세월호와 같은 사회적 비극이 자신의 비극이 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저 슬퍼하며 위로하는 것으로 교회는 그 역할을 감당했다 할 수 없습니다. 몸은 세계의 한 부분이기에 그 비극이 일상이 되는 현장에서 몸 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낼 수 없는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나는 세월호의 아이들이 부활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꽃과 같은 나이에 죽어간 그들이 아름다운 육신으로 다시 부활하여 그 몸을 가지고 기쁨과 행복을 다시금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케제만의 바울에 의하면 그들의 부활은 바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타내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정의에 복종하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가는 교회에 오로지 달렸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일생을 진정한 교회를 세우는데 바쳤습니다. 주님의 공동체가 그 빛을 잃는다면 그리스도의 소망도 빛을 잃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다시 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비추는 것이야말로 그들에게 부활과 소망을 안겨다 주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소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현대의 교회에 준엄한 비판을 가하며 신자유주의로 물들어 새로운 희생자를 찾는 현실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시키는 길이 바로 그들의 부활을 이루어내는 일일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우리의 부활을 약속하며 종래는 언제 오시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의 승리를 소망하는 유일한 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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