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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그때의 그들이 ‘기다렸던’사람이다

마태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180 추천 수 0 2021.01.19 22: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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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2:16-18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9.4.23 성암감리교회 http://sungamch.net 

지금 ‘나’는 그때의 그들이 ‘기다렸던’사람이다.

마2:16-18, 눅23:27-29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발터 벤야민이라는 분(유대계 독일 비평가?철학자)의 글에서 차용했습니다. 벤야민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과거는 그것을 구원으로 지시하는 어떤 은밀한 지침(指針)을 지니고 있다. 우리 스스로에게 예전 사람들을 맴돌던 바람 한 줄기가 스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귀를 기울여 듣는 목소리들 속에는 이제는 침묵해버린 목소리들의 메아리가 울리고 있지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과거 세대의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는 은밀한 약속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세대와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함께 주어져 있는 것이고, 과거는 이 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요구는 값싸게 처리해버릴 수 없다.”

 

벤야민은 여기서 메시아적 구원사건을 과거의 희생자들을 현재 세대에 속한 이들이 역사적으로 회상하고 기억하는 것, 즉 회억(回憶)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회억으로 옮겨진 벤야민의 용어는 ‘기억하다, 명심하다, 잊지 않다’를 뜻합니다. 중요한 것은 벤야민에게 신학이란 곧 메시아적 구원이자, 그것을 가능케 하는 ‘회억’의 행위라는 사실입니다. “회억은 미 완결된 것(행복)을 완결된 것으로, 완결된 것(고통)을 미완결 된 것으로 바꿀 수 있다. 이것이 신학이다”

 

벤야민에게 회억이란 돌이킬 수 없이 완전히 끝난 듯이 보이는 과거 희생자들의 고통이 ‘미종결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현재 고통스럽고 비참한 조건에 놓여 있는 우리가 이 세계에서 구원을 얻기 위해선, 그러한 조건이 만들어진 과거를 우리가 회상하고 기억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보다 앞서서 지배와 억압의 조건들에 맞서 싸우다가 패배당한 세대의 고통 및 비탄을 지금 여기의 세대가 복구하고 과거의 세대가 투쟁의 대상으로 삼았거나 도달하지 못했던 목표를 현재의 세대가 완수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과거의 그들이 쓰러져 가면서 미래에 자신들의 목표를 완수해주기를 “기다렸던 사람들”인 것입니다. 과거 세대의 입장에서, 오늘의 나는 과거의 그들이 “이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사람들”인 거죠.

 

그러니까 벤야민이란 분은 ‘과거에 못다 이룬 일들을 오늘을 사는 내가 마주 이루고, 그래서 오늘에야 이루어진 일들을 이루지 못했던 과거와 자리 바꿔 놓는 일’이 신학이고 신앙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 과거의 그 사람이 이루지 못한 일은 오늘 내가 하는 것이죠. 그걸 하려고 신앙을 한다는 겁니다. 이런 전제하에서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의 유아살해 이야기가 마태복음에만 등장하듯이, 오늘 읽은 두 번째 본문 역시 누가복음에만 등장합니다. 이 본문이 누가복음만의 특수한 자료인 이유는 23장 26절까지는 마가복음 및 마태복음과 동일한 상황을 공유하고 있지만, 27절에서 다른 복음서에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군사들이 예수님을 처형지로 끌고 가던 중에 시몬이라는 이름의 구레네 출신 사람을 만나게 되고, 예수를 대신하여 그에게 십자가를 지우게 했다는 것까지는 누가복음도 마가 및 마태와 동일하게 묘사하지만, 그 뒤에 큰 무리가 예수님을 뒤따랐다고 기술한다는 점에서 누가복음은 특별한 것입니다. 마가와 마태에는 그런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누가가 예수님을 뒤따랐던 큰 무리들 가운데서도 일단의 여성들을 구별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 여인들은 서서 구경하다가 예수님이 운명하시고 나서야 애도를 표했던 무리나 백성들과 달리, 처음부터 “그를 생각하며,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토록 애절하게 통곡했던 여인들은 대체 누구일까요? 누가복음 23장 49절과 55절의 서술에 근거하여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이 여인들을 갈릴리에서부터 예수운동에 동참했던 막달라 마리아로 대표되는 여성 제자들이라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오늘 누가복음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뒤따라오던 여성들을 “예루살렘의 딸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여기서 “예루살렘의 딸들”은 실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성들을 가리키기보다는, 여성이라는 존재를 기쁨이나 슬픔에 대한 신의 계시에서 국가나 도시를 나타내는 단어로 호칭하는 구약성서적 양식의 일환이라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어서 예수님이 그 여성들에게 전하고 있는 예언은 실제로 이후에 유대-로마전쟁에서 예루살렘이 파괴되는 상황, 그래서 예루살렘의 여성들이 겪게 될 고통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들에 관한 예언을 굳이 갈릴리에서 와서 갈릴리로 다시 돌아갈 여성 제자들에게 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 여성들을 실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성들이 아니라고 단정짓는 것도 충분히 만족스럽진 않습니다.

 

우리는 그 여성들이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전후 문맥으로 볼 때나 다른 복음서와의 비교 대조를 통해서나 이 여성들을 갈릴리의 여성 제자들과 무관한 것으로 보기도 어렵지만, 그렇다고 누가복음만의 이 특별한 서술을 완전히 무시하기도 어렵다는 것입니다. 마가와 마태의 평행본문과 비교할 때도 그렇고, 누가복음 내부의 서사 세계에서 볼 때조차도 너무나 ‘갑툭튀’ 같은 이 예루살렘 여성들의 정체를 확정지을 수 있는 분명한 단서가 우리에겐 없습니다. 결국 이 본문 역시 헤롯의 유아학살 이야기처럼 우리에게 해석적 개입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비평적 독법을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며 애통해하던 그 여성들의 정체에 관한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관점을 뒤집어서 탈근대적 독법에 입각하여 애초부터 진실은 사후의 해석적 개입을 계속해서 재구성되어진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무한히 열려 있는 진실에 하나의 해석적 상상으로 다가가 보려 합니다.

 

예수는 자신을 따라오던 여인들을 “예루살렘의 딸들”이라 부르면서, 그녀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과, 아기를 낳아 보지 못한 태와, 젖을 먹여 본 적이 없는 가슴이 복되다.” 많은 학자들이 해석하듯이, 확실히 이는 약 40년 뒤인 유대-로마전쟁에서 예루살렘이 파괴될 때 겪게 될 상황에 관한 예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헤롯의 유아학살 당시에 갓난아기를 죽임당한 어머니들이 느꼈을 심정에 대한 회고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내친 김에, 저는 우리가 앞서 살펴본 마태복음 예수탄생 설화 가운데 등장하는 베들레헴과 그 인근지역에서 헤롯에 의해 갓 태어난 자식들이 죽임당하여 “울부짖으며, 크게 애곡하는 소리”를 냈던, “자식들을 잃고 우는” 라헬에 비유되었던 그 여성들과 누가복음 이 본문의 “예루살렘의 딸들”이 모종의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예수님 탄생 무렵에 베들레헴과 예루살렘을 포함하는 그 인근 지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 우리로선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더욱이 그것이 마리와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와 연관된 일인지도 알 수 없지만, 헤롯왕이 자신의 죽음과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려 했고, 또한 그것이 실행되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따라 오던 여인들을 예루살렘의 딸들이라고 부르며 그 여인들에게 마치 그녀들이 겪었던 심정을 묘사하는 것처럼 말씀하고 있다고 본다면, 우리는 지금 예수님이 헤롯의 대량학살이라는 어떤 비밀스러운 사건에 사후적으로 개입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중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시종일관 예루살렘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마가복음과 달리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운동 초기부터 이미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 가운데 예루살렘 사람들이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특히 누가복음에만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가르치시면서 각 성읍과 마을을 지나가셨다”(17:11)고 나오며,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에는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21:37) “모든 백성이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부터 성전으로 모여들었다”(21:38)고 전합니다.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갔던 대제사자들과 무리들에 따르자면, 예수는 “갈릴리에서 시작해서 여기[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온 유대를 누비며 가르치면서, 백성을 선동”했습니다(23:5). 이렇듯 누가복음은 마가복음과 달리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이 예루살렘에도 다수 존재했을 가능성을 도처에서 강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의 딸들”이라 불릴 수 있을만한 예루살렘이나 그 인근 지역에서 거주하는 여성 제자들의 존재를 상상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 여성들 가운데 헤롯왕이 죽을 무렵, 그러니까 예수님이 태어날 즈음에 일어난 학살사건을 몸소 겪은 여성들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정확히 언제 그 여성들이 예수님과 조우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서 다른 이들에게 품고 있었던 원한과 분노를 극복하는 길을 찾았을 것입니다. 헤롯의 유아학살 이야기가 마태복음에는 신화의 색채를 띤 전승으로 남아 있지만, 다른 복음서에서 그리고 성서 바깥의 역사 기록에서는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지 안 일어났는지를 명확히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연유도 저는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헤롯이 죽으면서 내린 대량학살 명령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따라서 오늘의 두 본문도 두 가지 방향으로 해석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대량학살 명령에 관한 요세푸스의 두 가지 언급 중에서 좀 더 뒤에 나오지만 진짜 실행되었는지 여부는 밝히지 않고 있는 명령, 즉 “각 집에 한 명씩 무조건 처형하라는 명령”에 무게를 둘 경우 우리는 예수와 관계없이 정말로 유대 지역에서 대량학살이 벌어졌고, 그래서 그 피해자들 가운데 “예루살렘의 딸들”로 불리는 일부 여성들이 훗날 예수의 제자나 지지자가 되었다고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을 마태복음 앞에 놓는 것인데요.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예수와 무관한 대량학살이 예수 때문에 일어난 대량학살로 예수운동의 지지자들에겐 기억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와 무관하게 일어났던 사건을 예수와 관련된 사건으로 기억했고, 그러한 기억이 담긴 전승을 마태공동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남겨주었다는 것은 자신들이 겪은 그 무의미한 고통을 예수 탓으로 돌린 것이 아니라, 메시아적 구원사 안에서 메시아의 탄생과 더불어 일어난 ‘고난(苦難)’으로 의미화해 나갔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것은 고통의 기억에 대한 의도적인 왜곡이 아니라 성찰적 극복의 과정을 보여줍니다. 적어도 살아 있는 동안에 자신들이 겪은 고통스러운 과거들이 무효화되고 죄와 벌, 원한과 복수의 악순환이 파괴될 수 있는 가능성 쪽으로 그들이 믿고 나갔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서 헤롯에 의해 자식을 잃은 여성들이 그 사건을 메시아의 탄생과 관련지음으로써 고통스러운 기억을 극복했거나, 아니면 정말로 시간의 뒤틀림과도 같은 ‘기적’이 일어나서 그런 비극적 사건 자체가 역사에서 깨끗이 지워져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러한 시간의 구원 가능성, 소급적 반전 가능성에 내기를 거는 것이 오늘날 신학에서 너무나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예수가 복음을 통해 그들에게 다가갔고, 그들이 예수가 전하는 복음,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우리의 삶과 세계에 초래한 결정적인 ‘단절’을 깨닫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유아학살을 포함하여 예수사건이라는 본질을 이루는 다양한 이야기들은 그렇게 사후적인 개입과 만남을 통해 그 진리가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완성되어 왔고, 조금씩 그 진실을 우리에게 드러내 왔습니다.

 

나아가 그러한 소급적/사후적인 본질의 재구성을 통해서 예수사건과 연루되어 고통을 당했던 과거 세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과거의 기억과 상처에 묶어놓는 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장으로 끌려가던 예수와 “예루살렘의 딸들”의 마지막 만남은 그렇게 죄가 용서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전으로 소급되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말소될 수 있다는 것,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저는 해석합니다. 가해자를 그리고 관련된 책임자들을 무조건 용서했거나 자신들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체념 속에 망각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모든 원한과 상처를 극복할 수 있는 근본적인 단절의 가능성을 복음 안에서 찾아 나갔다는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그것은 그냥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후속 세대가 과거 세대의 피해자들의 고통을 기억하고 진심으로 애도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헤롯의 대량학살 사건에서 죽어갔던 이들의 편에서 기다려졌던 사람으로 “예루살렘의 딸들”과 만났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 앞선 세대의 사람들에게 “기다려졌던 사람들”로 그들 앞에 서야할 것입니다. 그들에 대한 우리의 회억이 과거에 그들이 시도했지만 끝내 목표를 완수하지 못한 실패, 더 나아가 그들이 행동하지 못해서 역사 속에서 잊혀져버린 패배, 이웃들과의 연대를 방해하는 권력을 파괴하지 못해서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는 그런 적폐들까지도 소급적으로 청산할 수 있는 혁명적 개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과거의 그들이 이루지 못한 해방은 현재의 우리를 행위를 통해 소급적으로 완성되며, 그들의 구원이 완성되는 순간, 우리의 현재를 조건 짓고 있는 과거가 완전히 바뀌는 것이기에 우리의 현재도 미래도 바뀔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믿는 예수사건의 본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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