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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수3:7-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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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9.6.3 성암감리교회 http://sungamch.net |
우리는 원초적 신학과 신앙의 바탕에 서 있다.
수3:7-13
서울의 성북교회 안희찬 목사는 선배목사가 되십니다. 내가 자주 만나던 10여 년 전에 오래된 예배당을 허물고 새로 지었습니다. 그런데 동네가 재계발이 되면서 다시 또 건물 하나를 지었다는 겁니다. 지난주일 오후에 ‘예배당 봉헌’을 한다는 초청장이 왔기에 전화를 드렸더니 알려준 이야기입니다.
형처럼 친한 감정을 갖고 있는 선배인지라 초청장을 여러 차례 만지작거리며 보고 읽고를 거듭하다가 단어 하나가 눈과 마음으로 쑥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예배당’이라는 단어입니다. 왜 선배는 남들같이 ‘성전’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처럼 ‘예배당’이라고 한 걸까? 저는 이 기회를 빌어 우리가 결코 ‘성전’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예배당’이라 하면서 건물의 앞에도 ‘예배당’이라고 붙였는지를 알려드려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교회당을 흔히 ‘성전’이라 부르죠. 어느 목사는 설교에서 ‘구약성경은 성전이야기고, 신약성경은 교회이야기’라고 하면서 ‘구약 시대의 성전이 오늘날 교회’라고 말하는 것을 읽었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목사가 이리 생각하고 있는 것 같고, 교인들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사람들의 신앙에서 성전이 ‘하나님이 계신 집’이라면,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계신 곳은 ‘교회’라는 말이니 곧 [교회=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많은 목사들이나 교회에 충성하는 교인들은 성서의 성전에 관한 이야기에서 곧잘 교회에 관한 상상력을 발동합니다.
다윗왕은 성전 짓기를 갈망했으나 짓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지은 사람은 솔로몬인데, 7년 반 동안(열상6:37-38) 연인원 20만 명의 노동자를 동원했습니다(열상5:13-18). 준공식 때는 소와 양 14만 마리 이상을 도축 합니다(열상8:63).
많은 목회자들이 이를 바탕으로 ‘초대형 교회’의 당위성을 얻곤 합니다. 여하튼, 이게 옳던지 그르던지 간에 성전이 온전한 건물이 되려면 그 안, 가장 깊숙한 곳에 ‘법궤’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성전이 아니죠? 그러면 교회는 건물 안에 뭐가 있어야 교회가 되는 겁니까? 그렇죠. 십자가입니다. 교회가 성전이 되는 데는 법궤가 십자가로 대체되어 있는 겁니다. 교회에서 법궤는 십자가입니다.
그러면 이제 물어야 하죠. 성전을 성전 되게 하고 교회를 교회 되게 한다는 법궤와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간단히 설명하기 쉽지 않으니 영화와 소설 한편씩을 예로 들겠습니다. 우선 영화로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레이더스]라는 영화입니다. 소설은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입니다. 장르가 다른 두 개의 작품에서 레이더스에서는 법궤가 등장하고, 드라큘라에서는 십자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두 작품에 나타나는 물건은 다르지만 각기 그 물건들이 나타내는 영향력은 동일합니다. ‘마술적 힘을 가진 신령한 물체’라는 것입니다. 대중의 상상속에서 법궤와 십자가 그 자체가 의미를 갖는 게 아니라 그것이 갖고 있는 능력이 의미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의 핵심은 뭐죠? ‘그 마술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가 누구인가’입니다. 누가 법궤가 갖고 있는 마술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누가 십자가가 지니고 있는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요? 법궤나 십자가가 마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능력을 과연 누가 슬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영화 레이더스에서는 누구든지 ‘법궤’를 차지하는 사람이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드라큘라에서는 성직자가 십자가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주체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법궤나 십자가는 교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이 그 능력을 독점하거나 조절하는 주체가 됩니다. 우리가 경험한 그동안의 신앙양태를 보더라도 이는 거의 현실적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강력한 마술적 능력인 십자가와 법궤가 가장 불꽃을 피우는 정점이 어딥니까? ‘성전 건축’혹은 ‘교회 건축’입니다. 솔로몬이 지은 성전만큼이나 교회의 대형 건조물은 그곳을 가득 채울 목사들의 상상(실제 우리지방의 A교회도 그런 의미라고 담임목사가 말했다), 그리고 육체와 금고를 가득 채울 축복에 관한 교인들의 꿈이 맞물려 있습니다. 또한 솔로몬 성전에 안치된 법궤는 그러한 교회적 욕망을 마술적으로 채워줄 십자가에 관한 하나의 은유입니다. 그래서 목사들이나 교인들이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부득부득 부르는 까닭이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서에서 과연 법궤는 마술적인 능력이 있는 것일까요? 구약성서에 나오는 ‘법궤’를 둘러싼 이야기들은 굉장히 복잡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추적해 보면 다음과 같은 네 단계로 전개되어 있습니다.
우선 법궤가 예루살렘에 안치(고정)되었고, 다윗 왕조의 왕권을 정당화하는 야훼의 징표로서 받아들여졌다는 데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시132:8은 “주님의 권능이 깃들인 법궤와 함께 그곳으로 들어가십시오.”합니다. 하나님을 고전시키고 있습니다. 다시 17절을 보면 “여기에서 나는,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한 사람을 뽑아 큰 왕이 되게 하고, 내가 기름 부어 세운 왕의 통치가 지속되게 하겠다”합니다. 뭐죠? 결국 유다국의 중앙 성소인 예루살렘 성전과 그 성소의 주인인 다윗 왕조, 그 집안의 사적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다른 사람에게나 장소로는 가지 않는 신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법궤이야기의 한 축입니다.
그러나 본시 법궤는 한 곳에 머물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항구적인 곳에 안치(고정)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옮겨 다니기 위한 야훼의 자리였습니다. 법궤는 수레에 실어서도 안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수레로 옮긴다는 말은 옮기는 자가 수레와 소를 소유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누가 수레나 소나 말을 가지고 있습니까? 권력자입니다. 왕입니다. 그래서 오직 법궤는 메고 다녀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 멥니까? 왕은 그런 고된 일을 하지 않습니다. 보통 시민들이 법궤를 멥니다.
신10:12-15을 보면, “금 고리 네 개를 만들어서 그 밑의 네 모퉁이에....달아라. 그리고 아카시 나무로 채를 만들어서...궤의 양쪽 고리에 끼워서 궤를 멜 수 있게 하고, ...거기서 빼내지 말아라.”
이는 언제나 옮겨 다닐 준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리저리 유랑하는 자, 여기서 쫓겨나고 저기서 추방당하는 자들의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 법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리가 금이었다는 말은 요시아 왕 때 왕실 신학의 영향으로 그렇게 고쳐진 것이지 쫓겨 다니던 사람들이 메던 법궤의 고리가 금 일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법궤가 지닌 그것의 원초적인 유랑성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한 왕을, 왕의 씨족들을 영구히 축복하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난민들의 야훼’라는 듯이 그 법궤에 담겨진 진실인 것입니다.
법궤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BC12-11)한 뒤 성막에 언약궤를 보관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다가 에벤에셀(위치를 알 수 없음)에서 블레셋인들과 싸울 때 언약궤를 빼앗긴 BC1050년경 이후 곧 파괴되었죠. 이것도 상징성이 있지 않습니까? 독점할 수 없고, 고정화 할 수 없고, 모셔둘 수 없는 것이 법궤인데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성전에 십자가 모시듯 그리하자 이방민족에게 빼앗기고 그걸 안치하던 건물이 파괴되었다는 게 말입니다. 여하는 실로의 신학자들은 난민의 신학, 떠돌이들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울을 통해 원시국가적 형태를 만들게 되자 난민의 신학, 떠돌이들의 신앙이 지배자의 신학, 정착해서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의 신앙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위해 실로에 있던 지도자들이 사울을 지지하게 됩니다. 아니, 사울을 지지하게 될 대부터 난민의 신학이 권력자와 정착민의 신앙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실로에 있던 지도자들은 ‘하나님은 언제든지 이동하여 다른 왕을 뽑을 수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이동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동하는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비아달은 사울에게서 하나님이 떠나 다윗을 택했다고 선언합니다. 이게 가능한 것이 ‘이동하는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비아달이 솔로몬에 의해 숙청(열상2:26-35)이 됩니다. 아마 숙청을 했을 겁니다. 그러면서 모든 제사장들이 말하길 이제는 법궤가 이동을 멈추었다고 했습니다. 야훼는 이제 항구적으로 다윗의 집안을 선택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솔로몬 성전에 법궤가 안치되는, 성전이 솔로몬 대에 완성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솔로몬의 성전건축은 장한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궤를 가두는’못된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요약해 보겠습니다.
실로의 아웃사이더적인 법궤신앙(제1단계/원초적 법궤 신앙)이?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일시적으로 택했다는 신탁과 함께 주류의 신학으로 전환되고(제2단계/사울과 법궤)-- 그것이 한 왕조의 집에 항구적으로 안착하게 되는 왕조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전환되며(제3단계/다윗과 법궤)--그 왕조의 왕들 가운데 신실한 왕을 선별하여 함께 하는 야휘의 신학으로(제4단계/요시아와 법궤)이어지는 네 단계 과정으로 전개된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유랑하는 하나님, 곧 아부도 독점할 수 없는 야훼에 관한 공공적인 신앙이 한 개인, 한 가문의 사적 점유물로 전환 혹은 변질되어 왔던 것입니다.
원초적인 법궤신앙은 본래 난민들이었던 히브리들, 그들의 야훼를 가장 잘 담아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가나안 일대에 살게 된 난민들을 위한 ‘공공성의 궤’를 담은 신학이고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을 거쳐 다윗 왕조에 이르면서 점차 난민(가난한 사람들)의 공공성은 사라지고 통치자와 권력자, 가진자들에 의해 사유화 되는 과정을 겪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이동하는 존재인 ‘궤 안의 야훼’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법궤는 난민의 신학이고 신앙이었습니다. 그것은 이동하는 야훼의 표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히브리의 신앙사상이 실종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차츰 모든 것을 사유화 하려는 권력과 독점의 욕구가 야훼의 역사와 신앙 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예배당 혹은 교회가 여전히 ‘성전’이 되어 있고, 법궤는 ‘십자가’로 대체되어 공공성의 하나님을 지배자들(그렇게 되고 싶은)의 사유화 욕구를 반영하고 해결하는 하나님으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이를 ‘권력화 된 기독교’ ‘권력이 판치는 교회’라 하는 것이고, 이런 불량한 것들의 거부가 ‘성암 예배당’이라는 교회 정문의 정수리에 붙은 교회 팻말에 담겨진 의미라 하겠습니다. 이는 실로(Shiloh-가나안의 옛 도시)의 신학과 신앙적 원형을 갖는다는 엄숙함이고, 동시에 성암교회의 신앙은 욕망과 권력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은 원초적 신앙의 바탕에 서 있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성북교회 안희찬 목사님이 ‘성전’이라 하지 않고, 실내에 구태여 십자가를 정면에 걸지 않은 이유도 그런 속뜻이 있다 싶어서 마냥 기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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