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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당한 신들
그리스 신들의 제왕 제우스, 제우스도 두려워하는 그의 아내 헤라, 태양의 신이면서 음악의 신이고 예언의신 아폴론, 바다를 지배하는 포세이돈, 사후 세계의 제왕 하이데스, 전쟁의 신이며 지혜의 신인 아테나,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곡식의 신인 데미테르, 새벽의 여신 에오스, 술의 신 디오니소스, 사랑의 신 에로스 등등 이렇게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신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제 아무도 그들을 경배하지 않고 그들의 제단에 분향하지 않는다. 그들의 제단은 허물어졌고 그 유적지에는 관광객들만 스쳐갈 뿐이다. 그들의 신탁도 중단되었다. 누군가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묻고 대답을 요구해도 그들은 더 이상 응답을 하지 않는다.
왜일까? 언제부터일까? 로마황제 데오도시우스1세(379~395) 즉위 후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었고(392년) 흩어져 있던 기독교의 여러 갈래들은 강제로 통일되었다. 그리고 기독교가 아닌 타종교는 단죄되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에게는 사도신경 암송이 강요되었다. 이교의 신전 제단에 희생제물은 금지됨은 물론 폐쇄되었다. 이에 대한 신화적 해석은 이러하다.
“천사들이 베들레헴의 양치기들에게 그리스도의 降誕(강탄)을 알리자, 갑자가 신음소리가 그리스 全島(전도)에 울려 퍼져 위대한 판은 죽었다. 올림포스의 신들은 모두 그 지위를 잃었다. 그리고 몇 신들은 차갑고 어두운 세계로 쫓겨났다. 그 후로 그리스 로마 신들의 신탁도 끊겼다.”
밀턴은 시로 표현했다.
“신탁은 침묵했다.
목소리도, 듣기 싫은 신음 소리도
활 같은 지붕에, 거짓말이 되어 울리지는 않는다.
아폴론은 그 신전에서 이제 예언을 줄 수 없고,
다만 공허한 소리를 외치며 텔포이의 언덕을 떠나간다.
……”
인류는 신을 섬기기도 하지만 신들에게 도전한 이들도 있고 신들을 속인이도 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는 인간으로 신의 반열에 오른 이들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가 된 이후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올림푸스의 신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그동안 신들을 힘들게 섬겨온 것이 억울하기라도 한 듯, 원수 갚기라도 하듯 과감하게, 아무런 갈등 없이, 그것이 사명이듯이 일거에 날려 버렸다. 그리고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섬겼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하나님께도 도전한다. 어떤 이는 과감히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또 어떤 이는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고 선언한다. 또 어떤 이는 “종교는 아편이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감히 자신이 신이라고, 자신이 메시야라고 선언한다. 이렇게 신의 자리에 인간 스스로를 올려놓는다. 일부 소수의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다. 아주 많은 이들이 너무도 많은 이들이 공공연하게 혹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하고 있다. 큰 권력의 소유자, 큰 재물의 소유자, 자의식이 너무 강한 천재적인 인물들뿐만 아니라 신을 섬긴다는 성직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들을 비난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인간이 그렇다는 말이다.
서양인들이 올림푸스의 신들을 제거했듯이 우리나라 선교 초기 기독교인들은 무수히 많은 토착 신들을 제거하였다. 신뿐만이 아니라 공자도 죽이고 석가도 죽였다. 기독교로 개종한 유학자들이 어떻게 공자를 죽였을까? 유교의 목표가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라면 공맹은 평천하하지 못했지만 기독교는 평천하했다는 것이다. 기독교 국가들의 제국주의 침략을 평천하로 착각한 것이다. 초기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믿은 이유는 예수가 공자보다 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 국가들이 중국보다 강하고 일본보다 강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불교는 유교의 박해를 받았다. 그것이 은연중에 석가는 공자보다 약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공자보다도 약한 석가이니 석가는 예수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처음부터 무기력한 석가는 예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렇게 토착 신 들을 제거하고 공자도 석가도 제거한 한국기독교인들은 이제 하나님께 도전한다. 하늘에 까지 올라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바벨탑이야기는 아주 옛날 성서 속의 설화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이 땅 에서도 계속된다.
“믿음”이란 무엇일까? 일전에 나는 “믿음”이란 “밑힘”에서 왔다고 했다. 무엇을 밑힘으로 하는 것이 믿음이다. 돈을 밑힘으로 하는 것이 자본주의다. 자신을 밑힘으로 하는 것이 인본주의다. 신을 밑힘으로 하는 것이 종교다.
자본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공산주의와 사유재산주의로 나뉜다. 공산주의와 사유재산주의는 둘 다 분명한 자본주의이다. 거기에 사람은 없다. 신도 없다. 신과 인간은 믿을 수 없다. 오직 믿을 수 있는 것은 자본이다. 자본주의가 신을 제거했고 신에게 도전한다.
인본주의도 역시 신에게 도전한다. 한때 미국과 우리나라의 기독교계에 유행했던 말이 있다. “적극적 사고방식”이다. 거기에 군부독재의 군인정신 “하면 된다.”가 힘을 보탰다. “안되면 되게 하라”는 억지까지 가세했다. 이러한 말들이 오늘날에는 “긍정의 힘”이라는 말로 이어진다. 그 말 이 그 말 이다.
이러한 생각들이 인간의 능력을 무한으로 끌어올린다. “적극적 사고방식”, “긍정의 힘” 이런 말들은 인간에 대한 신뢰에서 나온다. 인간을 너무 신뢰하다 보니 자기반성이 없다. 회개가 없다. 인간을 너무 신뢰하다보니 인간이 신이 된다. 신이 설 자리가 없다.
이러한 말이 나쁜 말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이 진리 인 냥 보편화 될 때 그 말은 악마 성을 띤다. 비단 이러한 말 뿐만 아니라 무슨 말이던지 크게 강조되고 절대화되면 악마적이 된다.
힘 있는 자가 말을 하고 거기에 대다수가 따른다. “아니오.”라는 말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럴 때 그 말은 악마 성을 띤다. 중국의 석학 이탁오는 말했다.
“나는 쉰 이전엔 정말 한 마리 개였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따라서 짖을 뿐이었다. 왜 짖느냐고 물으면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냥 실실 웃을 뿐이었다.”
나도 그랬다.
나는 나의 연약함과 무지함을 너무나도 절절히 깨닫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자신의 능력을 신의 위치에 올려놓는 “적극적 사고방식”, “긍정의 힘”을 숭상하는 이들의 위험성을 안다. 저들은 성서를 믿지 않는다. 성서 속의 인간승리만 인용할 뿐이다. 저들에게 신학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 인간 심리학이 신학을 대신한다.
나는 저들이 죽여 버린 그리스 로마의 신들 이야기에 흥미가 있고 저들이 무시하는 공자와 석가의 가르침에 감동한다. 저들은 예수의 이름은 부르되 그분의 가르침은 무시하지만 나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뼈가 저린다.
김홍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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