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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의 자세 : 겸손함과 당당함]
(누가복음 10:1-16)
1. 전도는 '하는 것'일까, '되는 것'일까?
전도는 '하는 것'이라기보다 '되는 것'이다.
이 말은 영원토록 전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때가 되면 전도하게 된다는 말이다.
주께서 전도하게 하실 때가 있는데,
그 때가 되기 전에 섣불리 전도하려 하지 않는 것이 좋고,
그 때가 되기까지는 자신을 돌아보며
내면과 삶을 성숙을 도모해야 한다.
그러나 주께서 전도하라고 보내실 때가 되면
전도를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전도하는 그 때에도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전도는 내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전도해야
'되는 전도'가 될까?
2. 전도자의 두 가지 자세
전도자가 되기까지 준비가 필요한 이유가 있다.
전도자에게 꼭 필요한 두 가지 자세가 있기 때문이다.
이 자세를 충분히 인지하고 나서야 비로소
주님의 뜻을 전하는 전도자가 될 수 있다.
어떤 자세일까?
첫째, 겸손
(눅 10:4-5, 새번역) [4] 전대도 자루도 신도 가지고 가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아라. [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전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세는,
'평화를 비는 마음'이다.
전도자가 가지는 의무와 권리는 한 가지다.
'평화를 비는 것.'
즉 평화를 비는 것 외에 전도자가 할 일은 없다.
어떤 집이든 들어가 평화를 빌면 된다.
평화를 빌고 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까?
(눅 10:6, 새번역) 거기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있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사람에게 내릴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평화를 바라는 사람 즉 진리에 갈급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평화가 임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 평화는 전도자에게 돌아온다.
저주가 아니라 평화를 비는
따뜻하고 겸손한 마음이
전도자가 가져야 할 첫 번째 자세다.
둘째, 당당함
전도자는 겸손과 대비되는 두 번째 자세를 가져야 한다.
(눅 10:10-11, 새번역) [10] 그러나 어느 고을에 들어가든지, 사람들이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든, 그 고을 거리로 나가서 말하기를, [11] '우리 발에 묻은 너희 고을의 먼지를 너희에게 떨어버린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아라' 하여라.
전도자는 당당해야 한다.
겸손하되 비굴해선 안 된다.
따뜻하되 비겁해선 안 된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에게 구걸하듯 복음을 전하면 안 된다.
겸손히 평화를 빌어주지만
영접하지 않고 복음을 들을 생각이 없는 사람을 만난다면
발에 먼지를 떨어버리고 나오면 된다.
그리고 전도자에게는 전대도 없고 신발도 없는데
어떻게 의식주를 해결할까?
(눅 10:7, 새번역) 너희는 한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거기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자기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지 말아라.
전도자는 누군가 제공하는 의식주를
당당하게 받아서 먹으면 된다.
일꾼이 자기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도 겸손하되 당당해야 한다.
3. 겸손과 당당함을 말하는 다른 구절
전도자의 자세를 말하는 중요한 구절이 있다.
(벧전 3:15, 개정)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전도는 무작정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의문을 품도록 만드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 내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해서 질문을 할 때
대답을 해주는 것이 전도인데,
그 때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답해야 한다.
이 때 '온유와 두려움'은 무슨 태도일까?
첫째, 온유
성경에서 '온유'란 땅과 관계되는 단어다.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시 37:11)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한다.
전도자에게 찾아와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다면
이미 그 영혼은 주께로 돌아올 영혼이다.
그 영혼은 전도자가 얻을 땅이라는 사실을 당당함을
전도자는 가져야 한다.
'나를 보내서 당신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것 보니
당신은 주께로 돌아오기로 정해진 사람입니다.'
라는 자신감이 전도자에게 필요하다.
둘째, 두려움
그런데 그 자신감만 가지고 있다면
자신감을 넘어서서 함부로 행하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반드시 두려움을 함께 가져야 한다.
혹시 나의 실수나 허물로 인하여
상대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될까봐,
실족하게 될까봐 조심하는 두려움을 놓쳐서는 안 된다.
전도자는 당당함을 가져야 하지만
동시에 두려움을 가지고 겸손하게 행해야 한다.
4. 현대의 모습
현대 주류 기독교는 어떨까?
무례하다. 너무 무례하다.
당당함만 있고 겸손이나 두려움을 버린 것 같다.
목사들이 성범죄, 재정비리를 저지르는 이유는
전도자의 필수적인 자세인 겸손과 두려움 잃어버려서다.
자식에게 교회를 세습하고도 큰소리 치는 이유도
겸손과 두려움을 잃어서다.
현 정부를 빨갱이 정부라고
막말로 비난하고 욕하고 인신공격까지 하는 이유도
겸손과 두려움을 잃어버려서다.
당당함과 자신감이 지나쳐
무례와 교만의 인격으로 자리잡아서
막되먹은 모습을 맘껏 드러내고 있으니
통탄한 노릇이다.
온유와 두려움의 균형,
겸손과 당당함의 균형을 놓쳐버렸기 때문에
이 시대 교회와 목사와 교인들은
참으로 비참하고 슬픈 모습이 되고 말았다.
5. 나는?
이중직으로 목회를 시작했다.
주중에는 학원 운영을 했고
주일에는 학원 교실에서 주일에는 예배했다.
학원이 어려워져서 학원을 매각하고
주일에만 카페 공간을 빌려서 예배했고
평일에는 학원 강사로 일을 했다.
그 때 목회 활동비 20만원을 받았는데
참 귀하고 감사했다.
3년 가까이 20만원의 목회활동비만 받았는데
그것으로도 감사했는데
어떤 사건이 생겼다.
말씀의빛교회는 교회 재정을 주보에 매주 공개하는데
새로 오신 성도 한 분이 교회 재정을 몇달간 지켜보다가
목회자 사례를 올려드리고 싶다고 제안했고
내가 없는 상태에서 교인들만 회의를 했다.
회의 결과 30만원으로 목회활동비가 인상되었다.
그 결과는 괜찮았다.
이중직 목회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회의 중에 나온 말을 듣고
그 성도가 마음이 상했다고 하시면서
나에게 말씀해주셨다.
그 내용들이 다 괜찮았는데,
한 분의 말에 나도 마음이 조금 상했다.
"전도사님은 주일에 설교 한 번만 하지 않습니까?
예배시간을 다 계산해도 90분 정도입니다.
최저시급으로 계산하면 20만원도 충분한 것 같은데요?"
라는 말이었다.
교인 중에서는 핵심인물 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분인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든'이라는 표현이 생각났다.
그러나 마음을 추스리고 잊어버리려 했다.
얼마 지나자 않아서 작은 오해가 일어났고
그 성도와 다른 성도가 함께 나를 찾아와서 따졌다.
따지는 내용의 핵심은
'처음과 달리 변질되었다.'였다.
'성도의 행복을 추구하는 교회'를 하겠다더니,
때가 되면 알아서 사례를 줄 건데
왜 사례에 욕심을 내느냐는 내용이었다.
억울했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웃으면서 그런 욕심 부린 적 없다고,
사례를 위한 회의도 나의 의사가 아니라
새로 오신 성도님의 의사로 열린 것이었다고
간단하게 설명을 드렸다.
그러나 그분들은 나를 향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서 점점 나를 향한 의심을 키워가셨다.
목회 활동비 30만원 외에 받는 것 없는 나에게
무얼 그렇게 의심할 것이 많았는지
지금 생각해도 의아하기만 하다.
그분들은 결국 교회를 다 떠나셨고
그분들이 데리고 왔던 분들도 교회를 다 떠나셨다.
그래서 교인 3명이 남았다.
교회가 없어질 뻔 했고
제법 큰 상처를 받긴 했지만,
감사하게도 매일 말씀을 묵상하는 과정을 통해,
내가 부족하니 이런 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마음에 정리를 할 수 있었다.
즉 나의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3명의 성도들과 함께 새로 교회를 시작했고
지금의 교회를 이루었다.
지금의 성도들에게는 너무 감사하다.
학원 강의를 그만두었고
과외를 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과외가 끊어졌을 때였다.
주일 오후에 다른 교회에 말씀묵상 세미나를 하러 갔다.
잠시 쉬는 시간에 핸드폰을 보니
집사님 한 분에게서 전화가 와있었다.
전화를 드리니
"교인들이 회의를 해서 목사님 사례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라고 하셨는데,
그 금액이 교회 재정으로는 너무 많은 금액이었다.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 주일에 가서 사례를 깎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교회 재정이 어렵게 되면
목사님이 헌금을 많이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냥 받으시죠?"라고 말씀하셨다.
감사해서 눈물이 나려 했다.
성도 20명 정도가 모여 예배하는 작은 교회이지만
나는 성도들을 배려하려 애쓰면서
겸손과 당당함의 균형을 생각하며 말씀을 전한다.
그리고 말씀을 스스로 묵상하는 성숙한 성도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 도우려 한다.
그런데 성도들은 이런 나를 존중해주신다.
교회 재정 안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나를 지원해주신다.
서로 견재하고 눈치 보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되어감을 느낀다.
이전에 받았던 상처가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과분한 사람을 성도들로부터 받고 있다.
몇주전 설교 내용 중에 '목사 사용법'이 있었다.
목사 높이지 말고, 목사를 추켜세우지 말고
목사를 잘 사용해서 성도 자신의 신앙을 세워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내용을 설교했는데
실시간 유튜브 채팅창에 남자 집사님께서
뜬금없이 '목사님. 사랑합니다.'라고 쓰셨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런 말 쉽게 하는 분이 아니셨고
빈말이 아니라 진심임이 너무 잘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른 성도들과도 비슷하다.
말씀을 하지 않아도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 것 같다.
코로나 때문에 자주 뵙지 못하는데도
가끔 만나서 대화할 때면 눈물이 나려 할 때가 많다.
교회 생활에만 집중하던 과거의 삶에서 벗어나
말씀에 삶을 걸고 살아가시면서
행복해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감사한데,
그저 말씀을 섬길 뿐인 나를 존중해주시는
겸손한 마음이 보여서다.
허물 투성이인데다 2%부족한 모습을 시시때때로 보이는
모자라는 목사인 내가 비는 평화가
성도들에게 임하고 있는 것 같아서 감사하다.
왜 나는 교회에 성도가 너무 많아지는 것에 관심이 없을까?
많은 성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 속에 있는 놀라운 평화를 누리는 분들이 세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곳곳으로 가서 사람을 만나고
그분들에게 말씀의 평화를 빌어드릴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성도들이 응원해주고 계시니,
그렇게 곳곳에 말씀의 사람들이 세워지는 일에
나와 우리 교회가 헌신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계시니,
이런 성도들을 만나서 함께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꿈만 같다.
그저 말씀 하나에 살을 걸고 살아가는,
그래서 말씀이 주는 평화를 서로에게 빌고
그 평화를 서로 누려가는 나와 성도들이 되길 간절히 소망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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