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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9:1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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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9장 12절-17절: 날이 저물어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 있는 여기가 빈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삽나이다 하였으니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쯤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시니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 열두 바구니를 거두니라.
12절: 열두 사도가 하나같이 예수님께 나아와 ‘무리를 마을로 보내서 먹을 것을 얻게 합시다’ 라고 했다. 사도들이 예수님께 하는 이 말이 일반적으로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시는 하늘의 일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상식을 따르지 않는다. 또 사람들이 봤을 때 상식처럼 보여지는 경우도 있으나 사실은 그 안에 구원이치가 들어있는 상식이다.
예수님께서 날이 저물도록 설교를 하신 것은? 1. 예수님이 빈들에서 수많은 무리들에게 설교를 신나게 하다 보니 시간이 가는 줄을 몰랐던 것이냐? 마치 아이들이 친구들과 놀다 보면 해가 지는 것을 모르듯이. 2. 해가 지는 것을 모르시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로서 너무나도 잘 아신다. 해가 뜨고 지고 것과 ‘지금 몇 시다. 사람들의 배가 고프겠다 부르겠다’ 하는 걸 다 아신다. 하지만 그렇게 하심에는 백성의 구원을 위한 계획이 들어있다? 맞느냐, 틀리느냐? 2번이 정답이다.
앞에서 보면 제자들에게 전도를 보내실 때도 아무 것도 갖지 말라고 하셨고, 양식이 없이 보내셨고, 어떻게 하라고 말씀을 해서 보냈다. 그대로 순종을 하니까 전도하면서 부족함이 없었다. 알고 보면 제자들을 그렇게 보내놓고 당신이 알아서 뒷일을 역사하신 것이다. 이것이 보여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사렙다 과부의 집으로 가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고자 하는 역사를 당신이 이리저리 하신다. 네가 걱정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다 준비를 해 놓고 말씀을 하신다. 그런데 인간 편에서 그게 잘 안 믿어진다. 인간의 생각을 집어넣어서 생각을 하면 도무지 안 믿어질 수밖에 없는 거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오도록 만드신 분이 해가 지는 것을 왜 모르시겠으며, 무리들에게 먹을 것이 없음을 왜 모르시겠느냐? 사도들은 경험적으로도 알 수 있었음에도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라고 말씀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 제자들이 아무 것도 가지고 나가지 않았어도 일을 잘 한 경험이 있으면서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 줄을 잘 모르니까 예수님의 설교가 길어지면서 저녁이 되니까 ‘무리를 보내서 저녁을 먹게 합시다’ 한 것이다. 이 말이 일반적으로는 타당한 말이다. 그러나 신앙 믿음으로 볼 때는 믿음이 없는 소리다. ‘이 많은 무리들을 먹게 하려면 사람이 사는 마을로 보내야 합니다.’ 누가 들어도 옳게 들리는 거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보면 사도들이 몰라도 너무 모른다.
13절: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이 말은 제자들이 깜짝 놀랄 말이다. 제자들이 수천 명이 먹을 것을 가지고 다니려면 여러 대의 마차에 양식을 싣고 끌고 다녀야 한다. 그래서 사도들이 마음속으로 ‘예수님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구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혹시 예수님이 6, 70살을 먹었다면 ‘예수님이 노망을 했구나’ 할 수도 있는 말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일반적으로 보면 전혀 엉뚱한 말이다. 일반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다.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의 눈으로 보고 영적인 면으로 볼 때는 예수님의 말씀이 정확하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니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 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무리 중에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는 것을 알까, 모를까? 알더라도 그렇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5천 명인데 어떻게 다 멱일 수 있겠느냐? 그 많은 인원이 먹기는커녕 핥아만 먹어도 안 된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인데 어떻게 수많은 사람에게 나누어 줍니까?’ 일반적으로 맞는 말이다. 떡과 물고기가 얼마나 큰 지는 몰라도 보통 손에 들고 먹을 정도이니까 한 사람이 먹으면 다 없어지는 양이다. 그러니 ‘수많은 사람에게 어떻게 이걸 나누어 주느냐?’ 하는 이것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계획은 세상 인간들의 보편적인 생각 그 범주 밖에 있다.
예수님의 생각은 항상 하늘의 생각이고, 세상 사람들의 생각은 땅의 생각이다. 땅의 생각은 경험에서 나오고 배워서 나온다. 하늘의 생각은 경험도 필요가 없고 계산이 그냥 떨어지는 거다. 인간생각의 범주 밖에 있다.
구원이치의 생각을 가지고 세상만사를 생각해 보면 과학의 범주 밖에 있다. 과학자들은 물질 속의 물질법칙을 생활에 이용하는 것뿐이지 ‘하나님께서 왜 그런 법칙을 만들어 넣어주었느냐’ 하는 그 면은 모른다. 영적인 구원도리와 이치를 알려주려고 과학법칙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비롭다.
예수님의 생각은 일반 세상 사람들의 범주 밖에 있다. 예수님의 소원 목적과 가치판단과 평가성은 백성의 구원이 들어있는 계산이다. 그러니까 성경을 일반인간들이 생각할 수 있는 사고방식으로 풀어서는 안 된다. 주님의 계산법은 타락된 세상 모든 인간의 사고방식의 기준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14절-15절: 50명씩 떼를 지어 앉히라고 하신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이 ‘모여 있는 남자들의 수가 몇 명이다’ 하는 것도 정확히 아신다. 초밥 기술자는 초밥 하나의 밥알의 수를 대략 안다. 예수님은 그것보다 더 정확히 하신다. 예수께서 모여 있는 남자들의 수가 몇 명인지도 다 아시고, 또 장정들이 어느 정도로 먹을 것이라는 것도 다 아신다. 그러니까 장정들도 다 많이 먹는 것은 아니다. 장정들 중에는 누구 집 아들이 제일 많이 먹을 것도 아신다.
‘50명씩 앉혀라.’ 얼른 생각하면 여기에는 ‘질서정연하게. 새치기 하지 말라’는 것도 들어있다. 주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시니까. 그러니까 50명씩 앉혀놓으면 더 얻어먹겠다고 왔다 갔다 하지 말라는 의미도 들어있다. 배부르게 먹으려면 자리정돈부터 하자. 질서정연하게 마음자세부터 바로 잡자.
교회에서 장의자에 앉을 때에 자기만 생각하고 두 사람 몫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 남도 앉지 못하게 발을 펴고 앉는 사람, 예배시간에 장난치는 사람 등 모두가 마음정신을 다 바로 잡고 50명씩 앉히라.
맨 뒤로 51번째 앉은 사람은 떡이 없다. 왜? 불순종을 했으니까. 순종한 사람은 마음이 기쁘지만 불순종한 사람은 마음이 우울하다. 마귀의 대목장인 세상 명절날은 배표 기차표 버스표 비행기표 등을 예약하려고 한 달 전부터 미리 준비를 한다. 예매장소에 어제부터 미리 이불을 갖고 와서 자는 사람도 있다. 그나마 준비를 못한 사람은 몇 값을 주고라도 암표를 산다. 그런 것처럼 ‘예수님께서 벳새다 광야로 오신다네’ 하는 소식을 듣고 미리 가서 자리를 잡은 사람도 있을까? 우리 입장에서는 미리 가야 하느냐, 다른 사람이 자리를 잡고 난 뒤에 맨 뒤에 가야 하느냐? 다른 사람이 자리를 잡고 난 뒤에 맨 뒤에 가면 안 된다.
주일날 예배를 몇 시에 시작하는 것을 아는 데도 꼭 예배를 시작하면 헐레벌떡 들어오는 사람도 있다. 머리카락이 떡이 되어 들어오는 사람도 있다. 머리를 감고 말리지도 않고 무스만 발라서 닭 벼슬처럼 세우고 오는 사람도 있다. 예배가 끝나면 누가 부르는 것처럼 황급히 나가는 사람도 있다. 이걸 보면 벳새다 광야에서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천국복음을 듣는 이 무리가 우리들보다 믿음이 더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계시적으로 보면 이들은 생명의 떡을 먹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때의 벳새다 광야로 가면 믿음이 있겠느냐?
16절-17절: 떡과 물고기를 가지시고 하늘을 향해 축사하시고 그리고 제자들에게 떼어주었고, 제자들은 또 무리에게 나누어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 지금 이것이 일반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기독교인이 볼 때는 이적이고 기사이고 표적이고 놀라운 일로 여긴다. 하지만 만능의 능력자 당신에게는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다. 힘든 일이 아니다.
천국복음은 영의 일이라. 영의 일은 성령님의 역사로 늘 역사되고 일이 되어간다. 지금도 그렇다. 그럼에도 지금의 우리들이 영의 일을 못 믿고 있다는 이것을 예수님은 더 힘들어 하신다. 이적 기사가 나타내는 게 주님에게 힘든 게 아니라 이 예수님의 일을 못 믿는 것을 보시고 더 힘들어 하신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취해 하늘을 향해 축사하심은 즉, 천국을 바라보고 축사하심은 광야로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으로 질서정연하게 앉히신 그들에게 신령한 하늘의 만나로 먹여달라는 소원의 기도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골고루 떼어주신 대로 제자들 역시 무리들에게 나누어 준 것은 구원 얻은 백성들이 먹는 하늘의 영생의 양식, 생명의 양식이다. 즉 예수님 당신의 몸이더라. 몸이란 생명이 들어있고 정신이 들어있고 활동이 들어있는 것이다.
다 배불렀다는 것은 모두가 큰 만족이라는 뜻이고, 열두 바구니에 거둔 것은 영적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다 먹고도 남았다는, 모자람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영적 이스라엘이면 다 먹을 수 있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또 영적 이스라엘로서 광야로 나와서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는 병도 고치시고 축복된 하늘의 만나를 먹이신다는 뜻도 들어있다. 말하자면 시대적으로는 그 사람들을 위한 것이고, 오늘의 우리도 영적으로 영의 눈으로 보면 우리의 마음도 거기에 앉아있는 거고, 그 먹는 떡이 역시 오늘 이 자리에서 광야교회로서 이치가 풀려서 나가는 거다.
‘열두 바구니가 남았다.’ 혹시 그 때에 말씀을 듣다가 지루하다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이 있다면 먹지 못했을 것이고, 배가 고프다고 무엇을 사 먹으러 간다고 빠진 자도 못 먹었을 것이고, 누구를 만나러 간다고 빠진 자, 바쁘다고 빠진 자 등 무슨 이유로 빠졌건 빠진 자는 하늘의 만나, 생명의 떡을 먹지 못했을 것이다. 늘 참석을 하다가 하필이면 그 때 빠진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교회를 보면 그렇더라. 모두가 다 참석을 했는데 딱 자기 혼자 빠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일들이 자기에게는 안 일어난다고 장담할 수 있겠느냐? 성경을 보면 모두 자기에 관한 말씀인데?
문제.
1.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다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는데, 만일 떡 열 개와 물고기가 네 마리였다면 스물 네 광주리가 남을 것이고, 만일 떡 한 덩이 뿐이었다면 모자랄 것이다? 틀리다.
2. 하늘을 향해서 기도하심은 열두 바구니가 남게 해 달라는 기도다? 틀리다.
3.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예수님의 손에만 들어가면 이적이 일어난다? 맞다. 즉 예수님의 손에 밥 한 숟갈이 들려지면 밥이 열 그릇 이상으로 불어난다? 이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틀린 것 같기도 하냐?
예수님의 손에만 들리면 얼마든지 불어날 수가 있는 것인데, 이걸 인간이 보기에는 이적이지만 당신이 주권적으로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이걸 어떻게 생각을 하는가 하니 예수님께 갖다 바치기만 하면 막 불어나는 것을 먼저 생각을 한다. 그러면 그게 믿음이냐? 그래서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처음은 미약했으나 나중은 창대케 된다’고 한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도 그런 사고방식으로 손에 들겠느냐? 축사를 하시겠느냐? 더러워서 내버릴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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