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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9:23-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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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9장 23절-25절: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23절: ‘자기를 부인하고.’ 누구를 따르려면? 예수님을 따르려면.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남의 십자가 말고 자기의 십자가. 그러니까 자기가 죽으라는 것이다.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렇게 하면서 예수님 당신을 따르라. 그렇게 따라 살면 나는 어떻게 사느냐? 본인 자신도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를 죽이고 어떻게 예수님을 따르느냐? 말하자면 그것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냐? 맞다. 본인 자신을 죽이고 날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그렇게 살면 인간 편에서 생각을 하면 이러면 못 살 것 같고 죽을 것 같은데 24절의 말씀을 한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제 목숨’이 뭐냐? 그 안에는 목숨만 든 게 아니라 예수 믿으면서 육신에 목적을 두고 사는 것에는 자기 목숨이 들어있다.
‘그렇게 되면 잃을 것이요.’ 뭘 잃느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유물, 심지어 자기의 목숨까지 건강까지 안 잃어버릴 것이 있느냐? 언젠가는 잃을 것이다. 다 놓고 간다. 심심찮게 우리들 눈에 보여주지 않느냐? 그런데도 여전히 안 빼앗기겠다고 하고, 더 가지겠다고 하니 그게 가만히 있느냐?
하늘의 것을 많이 소유하게 되면 도둑이 가져가지를 못하지만 세상 것을 많이 소유하려고 하면 그 날로 네가 죽을 수도 있다. 이치가 너무나도 빤한 건데 선악과 따먹은 지식이 사람을 망하도록 만든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그러니까 ‘제 목숨을 잃으면’ 했는데 어디에 잃는다는 거냐? 그 앞에 뭐라고 했느냐?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그러니까 예수님 쪽으로 잃으면 즉, 예수님이 책임을 지고 있다 그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이 하나님 앞에 와서 자기 살 도리를 찾느라고 야단법석이다. 하나님 앞에 잘 보이려는 마음은 없고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커질까?’ 한다. 자기는 안 죽고 ‘이 진리를 갖다가 어떻게 풀어먹을까?’ 하는 것은 자기가 죽은 것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자기가 속는다.
25절: 온 천하를 다 가졌다고 해도 그 날 밤에 죽으면 뭐가 유익하냐? 말하자면 어리석음을 말한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자기 속에 못된 자기가 살아서 그 난리를 친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이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생각을 해 봐라. 현재 자기가 육신 육체 세상위주로 믿는다면 예수 헛 믿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이라고 했듯이 조건이 있다. 무엇이냐? 너를 부인하라. 너를 부정하라. 너를 부인 혹은 부정을 안 하려면 나를 따라도 따르는 게 아니다. 헛 따르는 거다. 따르긴 따라야 하는데 헛 따르면 안 된다.
세상을 보면 헛 따르는 경우도 많다. ‘나를 위해주겠지’ 하고 따랐는데 헛 따르는 것도 있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돌아서는 일도 있다. 위해주는 척 하면서 사기를 치고 달아나면 닭 좇던 개처럼 되는 경우도 있다. 크게 말하면 세상을 보고 따라가면 결국은 그와 같이 된다.
세상이 너에게 잡힐 줄 아느냐? 현재 있는 것을 잘 이용 활용하면 그게 불어날 수 있으나 그러나 허황된 마음을 가지고 큰 것만 찾다가는 네 일생 다 간다. 사람 못 써진다. 나중에는 돌이킬 수도 없다.
네 자신과 너에게 있는 그 무엇도 주장하거나 자랑하거나 하지 말고, 물질적 소유성이거나 인간 사회적 명예 지위 권세 영광이나 학식이나 이력이나 업적을 의지하여 나를 따르려고 하지 말아라. 그것은 거짓된 너다. 참 네가 아니라 거짓된 너다. 다 부정을 하라. 인간이 하나님 앞에 자기 것 뭘 내놓고 ‘알아주십시오’ 할 것이 있느냐? 아무 것도 없는데 그걸 시인을 안 하려고 한다.
예수이름을 가지고 종교적 세상을 키우려고 하지를 말아라. 그것도 거짓된 너다. 예수이름으로 네 재산 만들고 네 노후대책 욕심으로 계획을 세우지 말아라. 그것도 거짓된 너다. 그거 다 부정하라. 너의 신념적 신앙으로 사명감을 가지고 순교한다고 종교활동을 벌여놓았느냐? 그것도 거짓된 너다. 부정하라.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인격과 성품적으로 네 자체화 시켜라. 진리의 사람으로 네 자체화 시켜라. 그 다음에는 주님이 하실 일이다.
우리 모두가 자기 주장을 하면서 살아온 그것이 밥 세끼 먹고 옷 입고 사는 그거였느냐? 적으나마 일반인들도 생각을 해 보니까 ‘오늘날 이 시대에 영혼의 사람이 없다’고 말을 한다. 물론 그 말을 한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니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으로 통한 영혼의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고상한 완성을 요구하는 말이다. 예수님으로 통해서 인간완성이 들어있는 건데 그들은 이건 모른다. 일반인들도 그런 수준에서 그런 고상한 것을 찾는데 예수 믿으면서 ‘밥 달라. 돈 달라. 차 달라’ 하는 건 거지다.
‘달라. 달라’ 하지 말고 네가 움직여라. 안 믿는 사람도 다 움직이고, 모든 만물이 다 움직인다. 그건 자연적이다. 산 사람이 움직이는 것은 자연적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서 움직인다고 해서 그게 잘못이 아니다. 움직이는 그 속의 사고 발상 소원 목적 등 이면적 그 면에서 믿음으로 하면 되는 거다. ‘내가 움직이니 신앙이 좋지요?’ 그게 아니라 그게 들어있는 사람은 산 사람이니 움직이는 건 자동화다. 자동적인 걸 가지고 말할 필요는 없다.
창세 이후 모든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타락되고 저주 받은 인류의 조상 아담의 후손이다. 아직도 사망 아래 있는 사람이 있고, 예수 믿는 우리는 사망 아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온 그 성격이나 성질이나 모든 인격성이나 도덕성이나 가치판단과 평가성이 예수님의 것과 동격 동등 동질의 것은 하나도 없다. 날 때부터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나온 것이 없고 신령천국에 가지고 들어갈 것도 하나도 없다. 내세울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런 존재이면서 세상 밥이나 먹는다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큰 소리냐? 자기를 내세우면 예수님을 못 따라간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못 받는다. 깨닫는 은혜를 못 받고 그러면 네가 골각은 사람이라 하겠으나 속에 든 것은 짐승이다. 계:에 짐승이 많이 나온다.
적으나마 예수 믿고 성경을 보면서 ‘이게 무슨 뜻인가?’ 하고 생각을 못하고 있을 때 목사님이 ‘그 짐승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고 가르쳐 주면 자기 속에 들어있는 짐승의 성격을 깨달아야 한다. 왜 사람이면서 ’개 같은 놈, 소 같은 놈, 고양이 같은 놈, 곰 같은 놈‘ 하는 짐승소리를 듣고 사느냐? 예수 믿으면서 자기의 성격 성질을 잘 알아라. 안 그러면 시집 장가가서 자식들이 한 술 더 뜬다. 자기를 내세우면 예수 못 따른다. 그만큼 많이 배우고 깨닫고 하면 진리를 따라서 모범이 되고 사랑이 풍부하고 희생정신이 풍부해야 한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신발을 벗었다. 하나님께서 벗으라고 했다. 왜 하나님 앞에서 신발을 벗으라고 하느냐? 신발을 벗으면 자기 마음대로 다닐 수가 없다. 즉 ‘네 마음대로 다니지 말아라.’ 특히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데 있어서 네 마음대로 하지 말아라. 그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나타나서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동안을 자기 속에 들어있는 애굽성을 죽이고 그 성격 성질을 죽인다.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게 된다. 자기 성격 성질대로 인도를 하면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앞에서 인도가 되겠느냐? 안 된다. 그 이치를 알아야 한다. 옛사람 자기를 안 죽이면 모양새는 인도하는 것 같으나 성령님의 감화성은 없다.
사도바울도 사울 적에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눈이 어두워져 버렸다. 인도자를 찾아가서 보게 된 후에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 동안 율법주의를 버리고 성령으로 복음을 따랐다.
우리는 우리의 주관성을 가지고 따르는 것인지? 버렸는지? 우리 속에 주관성이 많다. 버려야 한다. 이치를 깨닫는 즉시즉시 자기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따르는 것이 훨씬 복되고 빨리 성장하고 자기의 길이 밝고 자기 복이 된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예수님을 따르려면 우리의 십자가를 우리가 지고 따르란다. 자기 십자가는 자기가 지고 따라야지 남도 그 사람의 십자가가 있는 건데 그 사람에게 내 십자가를 지울 수 있느냐?
내가 날마다 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르려면 십자가를 져야 하는데 그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지는 거냐, 목에 거는 거냐? 십자가는 어깨에 짊어지는 것이니 어깨에 짊어지고 따르려면 무겁고 힘들고 고생스러운 것으로 생각이 든다. 그래서 지고 가다가 귀찮으면 내던지고 주님을 안 따르고 집으로 가면 안 될까? 내 편리 내 주장대로 교회에 다니면 안 되겠느냐?
‘나를 따르려면 너의 십자가를 네가 짊어지고 따라라.’ 십자가는 좋은 사람이 죽는 십자가냐, 죄인이 죽는 십자가냐? 죄인이 죽는 십자가다. 자기 속에 죄 된 게 하나도 없느냐? 좋은 것만 있느냐? 나쁜 거, 더러운 거, 꼬부라진 거, 꺾어진 거, 냄새나는 것이 많다. 그거 죽여라.
십자가는 하나님과 의사단일성이 아닌 것을 죽이는 것. 옛사람을 죽이는 것. 십자가는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나게 하는 것. 그런 의미들이 들어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잘 죽으면 잘 살아난다. 더러운 것이 하나 죽으면 좋은 것으로 새 것으로 영원히 살아난다.
네 십자가는 네가 지는 것이지 딴 사람이 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자기의 잘못된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핑계를 대느냐? 자기가 죽어야지 자기 성격 성질은 안 죽이고 왜 ‘너 때문에’ 하느냐? 말하자면 죽일 것은 너에게 있다. 네가 죽어야 따를 수 있는 것이고, 따라야 살아나는 것이 있다.
진정 참 주님의 교훈을 따르고 있으면 자기를 십자가에 죽일 것이 많이 발견이 된다. 자기가 예수님을 바로 믿으면 자기 속의 더럽고 나쁜 것이 자꾸 보인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이거 고쳐주십시오. 이거 낫게 해 주십시오’ 하게 된다. ‘내가 아무리 생각을 해도 나의 이 성격 성질 때문에 나에게 오는 것은 고통뿐이니 이거 고쳐주십시오. 내가 나를 봐도 보기가 흉한데 남이 나를 볼 때는 이게 얼마나 더 보기가 흉하겠습니까? 이거 고쳐주십시오’ 하게 된다.
혹시 살아오면서 어떤 사건을 겪거나 누굴 만나거나 실수를 했거나 했을 때 자기를 되돌아보면 자기가 저주스럽고 미울 때가 있느냐? 자기에게 다 좋은 것만 있느냐? 죄는 안 지었지만 키가 작은 사람이 ‘내가 왜 이렇게 키가 작을까?’ 하고 키 작은 자기를 원망하고 미워한 때가 있느냐? 어느 때 자기가 미우냐?
예수님을 바로 믿으면 자기 속에 죽일 것 고칠 것이 많이 발견된다. 그러나 세상 소원 거짓된 복음을 따르게 되면 자기에게는 죽일 것이 하나도 안 보인다. 자기를 볼 줄 알아야 사람이 되겠는데 자기를 볼 줄은 모르고 남 큰 것만 보고 따라가면 욕심만 생기고 원망만 생기고 팔자타령을 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무엇을 하시는 건지가 보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기는커녕 유대 종교 지도자들처럼 성직이나 얻어서 외식운동을 하게 된다.
교회 한다고 덩어리 부피 키우는 운동을 열심히 하면서 그것이 천국복음인양 주장을 하고, 복음의 본질은 모르고 활동만 하다가 결과가 어찌 될까? 복음의 본질이 무엇이냐? 복음이 인간 자기에게 하는 일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만드는 일이다.
24절: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고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이 된다.’ 그러니까 어느 쪽을 갖고 싶으냐? 지금 예수 믿으면서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온 것이냐, 잃고자 온 것이냐? 여기서는 이룰구원이 아닌 육신의 목숨을 두고 묻는 거다.
일반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안 된다. 성령의 감화성이 들어있다면 알아듣겠는데 일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가 안 된다. 세상 인간들 전부가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산다. 세상 사람들 누가 자기 목숨을 잃으려고 사는 사람이 있느냐? 그래서 우리는 이 목숨에 대해 생각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영과 육의 결합체로 만드셨다. 자기의 몸은 영과 육으로 결합된 자기다. 영은 선악과 먹은 즉시로 죄와 허물로 죽었고, 이성과 몸은 살아있으나 죽어가고 있고, 결국은 죽고. 그래서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죽고, 병이 들어도 죽고, 식물을 안 먹으면 죽는다. 이렇게 사는 목숨은 육신의 목숨, 자연혜택으로 사는 자연목숨이다. 소원 목적은 세상과 세상의 것을 구하고 편하게 살다가 하나님도 모르고 죽는 것이다.
예수 믿는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허물로 죽은 영을 살렸는데, 이게 기본구원이다. 우리는 기본구원은 다 얻었다. 이제 죽어도 천국은 간다. 그리고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은 그 영을 중생으로 살린 이것은 하나님의 본질로 영원히 죽지 않을 자로 살려놓은 것이다. 살려놓고 그 다음에 진리생명의 하나님의 말씀을 먹여서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지혜지식성 하나님의 도덕성 하나님의 능력성이 성장케 하고 자라게 한다. 이게 이룰구원이다.
이것은 중생된 영의 생명, 참 생명, 성도의 주격적 생명이다. 현재 예수 믿는 자기 속에는 중생된 생명 이걸 기초로 하고 교회에서, 또는 성경을 읽으면서 성령님의 감화성으로 깨달음으로 지혜지식적이나 도덕성이나 능력성이 하나님의 것으로 자라가는 것이다. 이게 이룰이요, 그렇게 사는 그 자체를 중생된 영의 생명이라고 한다. 자라는 생명이라. 그러니까 이 삶이 성도 자기가 사는 주격적 생명이다. 그 위주로 살고 그 목적으로 산다는 말이다. 그리고 밥 먹는 육신의 생명은 주격이 아닌 소유적 생명이다. 육신의 생명은 의의 병기로 좋은 그릇으로 쓰여질 생명이다. 육신의 생명은 의의 병기로 쓰여질 생명이고 몸이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자기 속에는 생명이 둘이다. 하나는 영의 생명. 기본구원도 이룰구원도 다 들어간다. 그리고 하나는 밥 먹고 사는 자연생명. 그러니까 이 두 생명 중에 현재 예수 믿는 자기가 어느 생명이 자기의 참 생명이냐? 영의 생명이 참 자기의 생명이다.
교회생활을 하는 태도, 말하는 태도, 생활하는 태도를 보면 ‘아, 이 사람이 영 주격 생명으로 사는구나, 아, 이 사람은 육의 자연생명을 주격으로 삼고 예수를 믿는구나’ 이게 나온다. 그냥 예수 믿고 그냥 교회 다니는 게 아니다. 점쟁이는 신내림을 받고 신이 들었는데 무슨 생명으로 사느냐? 신의 생명으로 사는 게 아니냐? 영은 죽어있고, 육의 생명으로 살고 있다.
그러니까 영 주격의 생명을 가지고 육신의 생명은 소유적으로 살아나갈 때 그 자체가 이룰구원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성품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잘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것으로 바꿔진 것이므로 신령천국에 들어가는 본질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게 참 자기다. 다른 말로 하면 이게 자기의 참 실상이다.
현재 몸은 허상이다. 쭈그러지고 변질되고 썩고 불타질 것이다. 이 육신의 몸과 이성을 가지고 살아생전에 예수님의 것으로 바꿔놓은 모든 지혜지식이나 도덕성이나 능력성은 그게 자기의 참 실상이다. 이건 불에 안 타고 천국으로 들어간다. 예수 믿는다는 것에는 이런 게 들어있다. 그냥 교회 다니고 그러지 말아라.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타락된 이후로 모든 인간은 육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영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 오늘날 기독교 전체적으로 보면 예수 믿는 사람 중에도 영의 사람이 있고, 육의 사람이 있다. 예수 믿으면서 세상 것을 구하면 육의 사람이다. 그렇게 믿으면서 충성봉사를 해도 결국 하나님의 형벌로 떨어진다.
예수 믿는 교인이 영은 중생이 되었지만 자기가 못 깨달았거나 안 가르쳐 주었거나 해서 예수 믿으면서도 여전히 세상과 세상의 것을 구하고 믿고 있다면 이 사람은 마귀의 부림을 받게 된다. 귀신이나 들고. 이건 세상적인 사람이고, 비진리적인 사람이고, 옛사람 부패성적이요 마귀적인 사람이다.
이런 사람의 경우 자기의 육신이 밥 먹고 사는 모든 것은 악의 병기로 쓰여진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만들어지는 자기의 참 인격의 참 사람의 참 실상은 없으니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예수 믿으면서 그렇게 믿지 말아라.
성경에 이걸 보여주고 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을 입으로는 믿으면서도 속은 이방사람들의 소원 목적을 따라가니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더냐? 신:을 봐도 ‘네가 자식을 낳아도 네 품에 없다. 네가 농사를 지어도 못 먹는다.’ 이게 무슨 말이냐? 영의 눈으로 보면 지금도 이게 있는 거다. 한 집에 살아도 소원 목적은 세상으로 가서 있으니 세상에 포로로 잡혀있다. 몸은 같이 있으나 정신은 포로로 잡혀가 있다.
‘자기의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하는 것은 육신생명 목숨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살면, 그렇게 해서 세상 소원을 이뤘으면 그것을 보존해야 하고, 또 누리고 살려면 무엇을 잃게 되느냐?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이루는 자기의 참 실상은 다 잃는다.
쉬운 예로 학교에 다니며 나쁜 친구를 사귀면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자기를 다 잃는다. 예수 믿으면서도 자기의 참 실상이 자라나야,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자라야 하나님 앞에서 주시는 모든 것을 받고 살겠는데 그건 하나도 없고 고작 해봐야 밥 먹고 산 것. 그러니까 껍데기로만 산 것이다. 그렇게 고이고이 살다가 편하게 죽으면 좋겠는데 머릿속에서 세상이라고 하는 구더기가 늘 살고 있었으니 늙을 때 어떻게 편히 죽을 수가 있을까?
일반적으로도 몸에 좋다고 해서 생 음식을 아무 거나 먹게 되면 그 안에 든 균이나 벌레가 몸에 들어갈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벌레가 몸속에 들어가서 뇌 속으로 돌기도 하고, 뼈로 들어가기도 해서 머리가 아프거나 괜히 간지럽다거나 할 수도 있다. 나중에는 죽을 수도 있다. 누가 그렇게 되는 거냐? 탐식가들이 그렇게 되는 거다.
시간도 세월도 물질도 젊음도 세상 불타질 것에 투자를 했으니 다 잃은 것이다. 자기의 참 실상은 완전히 다 파괴가 되었으니 황폐하게 되었다. 자기의 참 실상은 다 잃었다. 인간은 이걸 볼 줄 알아야 한다. 아무리 부자로 살아도 헛 산 것이 있다. 왜 헛 산 거냐?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진 온전한 성품이 없는 참 실상이 없으면 헛 산 것이다. 참 인격의 고상한 것도 없고, 영능의 실력도 없고, 깨달음도 없고, 잡혀 죽기 위한 짐승처럼 살았구나. 왜 그렇게 살다 가겠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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