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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9:25-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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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9장 25절-26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25절: ‘온 천하’란 누가 뭐래도 하늘 아래의 것이다. 온 천하는 신령천국의 것이 아니고 물질세상이다. 하늘 아래의 것들은 산이나 광야나 강이나 밭이나 논이나 건물 자동차 비행기 공장 은행 금은보화 세상의 부귀 명예 존귀영광 권세 부귀 등이니, 이런 것은 다 물질과 물질성으로 된 것이다.
이런 세상 것을 가지고 와서 ‘지금 네 목숨과 바꾸자’ 하면 바꿀 사람이 있느냐? 없다. 직접적으로 가지고 와서 ‘네 목숨과 바꾸자’ 하면 바꿀 사람은 없다. 세상에 목숨과 바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자기가 금은보화를 가졌을 경우 그것을 안 뺏기려고 하다가 죽는 사람은 있다. 이런 경우 무엇보다 무엇을 더 사랑하는 꼴이 되는 것이냐?
옛날에는 워낙 가난해서 처녀가 재산이나 재물에 욕심이 났거나 해서 끌려가는 경우도 있고, 또는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것 때문에 결혼을 했다가 헤어지는 사람도 많다. 지금도 그렇다. 사람은 보지 않고 돈 보고 시집 장가가고, 재산 많은 것만 보고 시집 장가가는 사람이 있다. 그러고 나서는 얼마 안 가서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는 사람도 많다.
인생이 만족감을 느끼려면 말하자면 인간으로부터 만족감을 느껴야 한다. 일반적으로 그렇다. 그런데 돈을 보고 끌려가니 그것도 안 되더라. 그 얼마나 딱하고 불쌍하고 처절하고 가련하냐?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을 보고 듣고 늘 겪으면서도 여전히 그런 것에 속는구나.
‘천하 만물이 귀하냐, 네 목숨이 귀하냐?’ 할 때 대답을 못하는 사람 거의 없다. 다 자기 목숨이 귀하다고 한다. 그런데 왜 물질의 꾀임에 그냥 넘어갈까? 세상에 속한 것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절 한 번만 해라. 그러면 너에게 다 주마.’ 이 말대로 하면 신앙생명이 죽는 것인데 왜 그렇게 쉽게 넘어가고 바꿀까?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이 되는 신앙적인 세계는 진리생명의 본질로 오는 거지만 종교적 세상은 종교 사업주의로 온다. 종교 사업주의는 천국에 속한 것이냐, 세상에 속한 것이냐? 세상에 속한 것이다. 이런 정신으로 목회를 한다고 해도 그건 자기를 세상과 바꾼 것이고, 자기의 참 실상을 세상과 바꾼 것이다. 즉 마귀에게 절을 한 셈이다. 절을 한다는 것은 그것이 더 좋아 보이고, 그것을 더 부러워하고, 그것을 하나님보다 더 돋보고 욕심을 내는 것을 말한다. ‘내가 당신의 지도를, 그것의 지도를 받겠습니다. 그것을 받들겠습니다’ 하는 게 다 절하는 것이다. 이건 선악과 따먹는 거다. 그 정신이 네 속에 여물어진 것이다.
아무리 신앙이 있다고 해도 진리지식이 빈약하면 자기의 신앙생명이 무엇과 바꾸어지는지 이치적으로 판단을 못한다. 육신의 목숨은 누구든지 잘 알지만 그러나 신앙생명은 잘 모른다. 그 가치성도 그 효력성도 모르니 잘 바꾼다. 바꾸고도 바꾼 줄을 모른다. 이런 기가 막힌 일이 어디 있느냐? 누가 그렇게 바꾸어 놨느냐? 자기가 그렇게 바꾸어 놓고도 모른다. 손에 쥐고 ‘서로가 맞바꾸자’ 하면 쉽게 알지만 ‘절을 하면 다 주마’ 하면 절하는 것은 쉬워서 다 가질 수 있다고 착각을 한다.
신령천국과 물질세상 천하만국은 사실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 당신이 우리에게 알아서 순종여부에 따라서 사람 됨됨이에 따라서 필요 적절하게 주시는 거다. 우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에 대해 구하고 나갈 뿐이다. 그렇게 나가다 보면 다 동원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느 곳에 땅이 싸다. 그런데 그 땅이 조금만 있으면 비싸진다고 하면 지금 그 땅이 싸니까 내가 돈이 없어도 빚을 내서라도 그 땅을 사려고 한다. 현재 자기에게 돈이 없어서 남의 돈을 끌어다 그 땅을 산다면 그 이자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늘에서 떨어지느냐, 땅에서 솟느냐?
목사님들 세계에도 그런 목사님이 더러 있다. 목회는 해야지. 그런데 큰 예배당 건물이 매물로 나왔는데 조금만 돈을 보태면 그 건물을 살 수 있으니까 은행에서 돈을 빌려 그 건물을 샀다. 그러면 목회자의 경우 자기에게는 돈이 없는데 은행 빚의 이자를 갚으려면 그 돈이 어디서 나온다고 생각을 하고 있느냐? 교인들이다. 그런데 교인들로부터 돈이 안 나오면 어떻게 하겠느냐? 교인들이 다 다른 교회로 간다면 대 걱정이 안 될까? 그 참 어리석다. 그러니 목사가 계속 피땀 흘려 벌어서 남의 이자 갚느라고 날이 샌다. 그러면 목회가 어떻게 되겠느냐? 어떻게 그런 발상을 갖느냐? 이게 본문의 ‘온 천하를 얻고도’ 이 말씀에 들어가는 거다. 인간들은 조금만 시험을 타면 그만 어리석어진다,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를 네가 아느냐? 계획을 세워놓은 인간 너의 앞일을 네가 아느냐?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을?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간다고 했는데, 이 말은 오늘날 목사들처럼 세상의 목표를 세우고 간다는 말이 아니라 진리를 붙잡고 말씀에 순종해서 계속 간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가는 아브라함이 육의 눈으로 보면 거부인데 그게 계시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아브라함의 마음속의 가군들 318명을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는 영능의 실력을 보여준다. 그래야 포로로 잡혀가는 롯을 구하게 된다.
아브라함의 물질부자를 물질적 개념으로만 생각을 하지 말아라. 물질 그 이면에 무엇을 말하는 건지를 알아야 한다. 영능의 실력이라면 318명만 기르겠느냐? 물질을 가지고 ‘주님의 일’ 운운하지 말라. 네가 신발을 못 벗었구나. 네 앞에는 불기둥과 구름이 인도가 안 된다. 네 계획대로 하는 게 목회냐? 그게 주님의 종이냐? 아니다. 그건 세상 목회고 세상의 종이다. 주님의 종이 아니다.
사람이 어떻게 물질을 따라다니느냐? 물질이 사람을 따라오도록 하는 게 원리원칙이다. 사람은 물질을 지키고 다스리게 돼 있는 건데 물질에 다스림을 받으려고 하니 그게 노예다. 물질에 끌려 다니는 것은 노예다. 이렇게 살면 자기 것은 하나도 없다. 돈을 아무리 쌓아놓고 살아도 너는 노예다. 아무리 쌓아놓고 살아도 그건 네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목숨을 치면 끝나는 것이다.
지금 이 말이 물질을 무시하는 것 같으냐? 아니다. 우리가 일을 하되 가난과 상관없이 일을 하고, 부요와 상관없이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가난하다고 해서 ‘가난하니 일을 해야지’ 한다면 그 사람은 부요자가 되면 일을 안 한다. 이건 벌써 인간의 정신에서 벗어난 거다. 세상은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다. 그런 발상을 가졌다면 집어치워 버려라.
자기의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면서 자기가 세상적인 계획을 해 놓는 발상은 참 자기와 바꾼 것이요 마귀에게 절을 한 셈이다. 하나님께 경배가 아니다. 몸과 목숨과 힘과 뜻과 너의 모든 것을 다해서 하라는 것은 자기 계획은 빼놓고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경배를 하는 것이다.
타락된 세상이지만 실력이 있으면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이 타락한 이 세상을 차지할 목적으로 예수 믿고 진리실력을 키운다고 한다면 이게 바로 된 것이냐? 참 교회는 참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다.
진리실력을 키워서 진리의 사람으로 만들어지게 하는 것이냐, 아니면 자기 수입을 올리기 위해서 바다에 그물을 내리는 것에 마음을 쓰는 것이냐? 그 중심이 다른 거다. 어떻게 하든 건물을 하나 차지하고 있으면 교회가 되는 것이냐? 그런 발상은 천국복음과 예수님과 전혀 상관이 없다. 그것은 인간 네 주관적인 신앙이다. 말하자면 그 이치가 세상과 바꾸어진 것이다.
자기의 참 실상이 빼앗기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인간이 자신을 빼앗기면 책임추궁이 들어온다. 물질에 대하여, 건강에 대하여, 시간에 대하여, 사람에 대하여 고통으로 다가온다. 즉 불로 다가오게 된다. 이건 책임추궁이다. 다 빼앗기게 되면 자기의 일생은 끝난 것이다.
자기 목숨마저도 하나님의 것이다. 이 목숨을 자기에게 왜 붙여놓았느냐? ‘세상 땅을 발로 밟고 이룰구원을 잘 이루라고 했더니 네 목숨을 네 마음대로 하는 것처럼 착각을 하니 네 목숨을 빼앗아 가겠다’ 하면 어떻게 되느냐? 목숨에는 자연목숨도 있는데, 하나님이 자기의 자연목숨을 가져가면 죽은 자기를 땅속에 묻기도 하고 불에 태우기도 한다. 그래도 자기는 모른다. 그런 것처럼 신앙생명이 죽어놓으면 외부의 환경이 자기를 떠 받들어 간다. 이건 죽은 거다. 이러면 환경의 소산이 된다. 그러니까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을 바로 알아서 자기의 존재목적을 바로 안다면 정신적으로 신앙적으로 바로 서라. 빨리 깨달아야 한다.
26절: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부끄러워하느냐?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을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나와 내 말’이란 예수님 따로 말씀 따로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다. 나와 내 말은 하나다. 신앙은 예수님 몸 신체 따로 있고 말 따로 있고 그게 아니다.
예수님 당신의 말은 바로 당신 자체를 의미한다.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면 예수님 당신의 성품으로 만들어진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주님의 말씀은 죽음 저 넘어 신령세계까지 영원히 참 옳고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다. 타락된 이 세상의 말에는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그런 인격화 자체화 되는 말은 없다. 왜 그러냐 하면 성령님의 역사가 없는 말이므로 그렇다.
임시적 육적인 병자를 어떤 식으로 몇 명이나 낫게 할런지 모르나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화 실력화 실상화가 안 되면 주님의 이 말씀에 걸려든다. 말씀과 같은 신앙이 아니다. 이러면 아무리 병자를 낫게 해도 자체화가 안 된다.
예수님 당신의 입으로 나온 말씀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현재 자기에게 그대로 이뤄져 가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말씀을 믿고 순종한 자는 거룩하고 존귀영광으로 자기가 이뤄질 것이고, 생명의 말씀을 믿지 않고 무시하고 부끄러워하고 자기 주관대로 살아온 자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 이뤄진다. 안 믿는 사람에게는 말할 필요도 없고 믿는 자들에게 이게 들어가는 거다. 자기 자식을 때리지 남의 자식에게 매를 드느냐?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로부터 오신 죄가 없으신 분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신령계와 물질계를 다 가진 분이시요, 예수 그리스도는 만능의 능력자로서 우주만물과 천지만물을 만드신 분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 된 우리를 자유로 살려주시려고 죄악 된 세상에 오셔서 모든 죄와 사망과 유혹과 미혹과 사단 마귀를 이기신 분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하신 말씀과 행동에 한 번이라도 실수나 죄 된 것이 없는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로써 이런 것을 다 보여주셨고, 또 세상 마지막 날 심판주로 오실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혜롭고 인자하시고 강력하시고 만능의 능력자이시고 사랑이 풍부하신 분이시요, 천국백성인 우리는 신령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우리인데 이런 우리가 세상 그 무엇 앞에서 부끄러워하고, 고개 숙이고, 세상 앞에 미안하고, 떳떳하지 못하고, 약해져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부끄럽게 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
세상 사람들에게 왕따 당할까봐 예수 그리스도를 부끄럽게 만드느냐?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취직이 안 될까봐 예수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느냐? 주일날 안 쉬는 회사에게 잘 보여서 출세하려면 당분간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지 않고 주일날 출근을 하느냐? 진리이치의 바른 소리를 하면 교인들이 도망갈 것 같고, 이룰구원의 바른 소리를 하면 교단에서 쫓겨나서 이단소리를 들으면 어떻게 밥 먹고 사나? 그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당분간 숨겨야지? 그런 목사들도 있더라. 이러려면 차라리 목사 짓 하지 말고 노동판에 가서 일을 하는 게 더 깨끗하고 솔직하다.
그 무엇을 위한 나의 계획은 주격이 되고 진리는 들러리로 소유격으로 써먹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격으로 제일 첫째 제일 먼저 나타내지 못하고 자기의 그 무엇을 위해 하는 것은 다 예수 그리스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두 번째로 두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끄럽게 만드는 거다.
‘아버지’라고 한 것은 가족적 애정적 의미가 들어있고 상속을 해 주겠다는 의도가 들어있다. 그런데 믿는 나는 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느냐? 자기 소원 들어달라고? 예수님은 우리를 당신의 형제처럼 여겨서 당신의 피로 우리를 사서 거룩한 하나님의 가족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랬는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구원을 위한 거룩한 일에 수종 든 천사들이다. 이 천사는 성도를 신령한 하나님의 도덕성이 입혀지도록 애를 쓴 천사들이다.
아버지와 예수와 천사들이 모두 영광으로 오는데, 이 모두가 승리요 자랑이요 존귀요 권세요 거룩으로 오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부끄럽게 만든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도 부정하고 살아온 자기는 그 때에 거룩한 천사들을 대동하고 영광중에 오신 아버지와 예수님을 똑바로 쳐다보며 앞서 나가서 영접이 되겠느냐? 신앙양심과 마음이 자꾸 부끄러워서 뒤에 가서 숨게 된다. 실질적인 면에서 현실에서 자기가 큰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주일날 예배에 빠지면 교인들이나 목사님 보기에 마음이 떳떳하더냐, 뭔가 모르게 마음속에서 부끄러움이 올라오느냐?
죄와 사망에서 너를 구해준 예수 그리스도를 네가 세상에서 놀림감이 될까봐 모른다고 했지? 굶어 죽을까봐 돈 앞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했지? ‘세상 복 복’ 하면서 참사람이 되는 천국의 복을 네가 무시했지? 이단소리 들을까 두려워서 이룰구원의 이치를 무시했지? 전도 가자고 하니까 몸이 아프다고 핑계 대며 도망갔지? 세례를 받은 네가 취직이 안 될까봐 교회 다닌다는 말을 안 했지? 세상친구 세상 사람의 마음을 맞춰주려고 예수님의 형제들 즉, 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 세상 소원 목적적으로 사는 부모형제 일가친척들의 마음을 사서 도움을 받으려고 주일날 예수 그리스도를 부끄럽게 만들었지? 세상 명절날 교회도 안 오고 전도한다는 명목으로 고향에 가서 잘 놀다가 오니까 은혜가 충만하지? 주일날 강대상 비워놓고 교인들 굶겨놓고 성지순례 갔다가 돌아오니 성령의 감화 감동에 성경이 잘 열리지? 그게 될 일이냐? 네가 예수 그리스도를 부끄럽게 했느냐? 너도 한 번 당해봐라. 사람 앞에서도 무안을 당하면 참 부끄럽다. 그런데 이건 하나님 앞이다. 그런데 영적이나 인격 면에 무디면 부끄럽고 뭐고 모른다. 막무가내로 산다.
아버지와 아들과 거룩한 천사들이 영광으로 오면서 자기를 거룩한 성도라고 영광스럽게 받들어줄 줄 알았는데 다른 성도들만 반갑게 영광으로 맞아주며 위로를 하고 자기에게는 아무도 아는 척도 안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내가 가든지 말든지, 오든지 말든지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사랑받을 짓을 누가 하느냐? 남이 하느냐? 자기다. 미움 받을 짓은? 역시 자기가 한다.
워낙 못되게 굴어놓으면 자기에게는 먹어보라는 말도 없고 엄마랑 아버지랑 누나랑 동생들이랑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맛있다고 서로 먹여주고 한다면 왕따 당한 자기 기분이 좋을까? 그렇다고 해서 마귀에게 가서 친구하자고 할 수도 없고, 마음은 서럽고 외롭고 고독하고, 그 마음이 시궁창이다. 좋을 리가 없다.
예수 믿는 사람이 주님의 일을 위한 모임이나 활동에 일부러 변명을 붙여서 멀리 하게 되면 스스로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다. 자기 위주로 살면 어떻게 되겠느냐? 교회는 그런 게 아니다. 평소에 건강을 늘 돌보고 좋은 일에 마음을 같이 하면 얼마나 좋으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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