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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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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해석에는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역사적 고증을 추구하며 원래의미를 찾아내는 것이고
댜른 하나는 고대의 자료를 활용하여 현대적 시대정신에 걸맞은 의미를 창조해 내는 것이죠.
첫 번째는 현대 성서학에서 보다 주류이며 보편적인 역사비평적 방식이라고 하고, 둘째는 아직 학계에선 소수에 속하지만 보통 문학비평에서 추구하는 방식으로 독자반응비평, 이데올로기 비평 상호텍스트적 비평 등이 여기 속합니다.
쉽게 예를 들자면 오늘날 텔레비전을 봐도 역사를 다룰 때 고증을 통한 다큐멘터리 방식이 있고, 모양은 과거지만 완전 현대화시키고 각색한 역사드라마 방식이 있지요. 물론 여기도 옳고 그름이 있습니다. 다큐멘터리도 엉터리가 있고 어떤 역사드라마는 역사적 사실을 너무 왜곡해서 방영 몇 회만에 퇴출당하기도 했습니다.
성서학의 경우 첫 번째는 저자의 의도를 객관적으로 찾는 것이고 둘째 해석 방식은 오늘날 텍스트를 거울 삼아 독자가 자신의 마음을 비추고, 텍스트를 재료로 자신의 사상을 새롭게 요리하고 활용하며 펼쳐 나가는 것입니다.
첫째 방식은 무엇이 역사적으로 사실이냐에 관심을 두고 옳고 그름을 논한다면 둘째 방식은 고대 재료들을 통해 오늘날 독자들에게 얼마나 설득력이 있고 유익한 의미를 창조해 내느냐에 있습니다. 텍스트의 의미가 결국 텍스트를 거울삼아 독자의 마음에서 창조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달란트 비유에 관해 김재수 교수님의 해석은 아마도 이 두 번째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본인이 인정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경쟁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에게 우리 시대정신에 맞는 의미를 본문을 거울삼아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죠. 물론 그 관점이 옳고 그르냐 , 전개가 치밀하냐, 설득력이 있느냐, 그 결과물에 대한 판단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오늘날 수도사들에게 익숙한 렉시오 디비나(거룩한 독서), 혹은 현대 기독교인이 아는 QT 방식은 원칙적으로 독자 중심의 의미파악이란 점에서 문학비평적 접근에 속합니다. 성서를 거울삼아 하나님이 주시는 내 마음 안의 소리를 듣는 것이죠.
현대 성서학에서는 "역사적 원래 의미"를 찾는 것이 매우 보편적이지만, 그러나 성경의 "역사적 원래 의미"를 찾는 것은 종교개혁 이후 “오직 성경”의 권위를 내세우기 시작하면서 발전된 것입니다.
고대 유대해석가들에겐 정경을 독자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이 보편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정경의 원래 역사적 의미보다는 정경텍스트를 통해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찾는 것에 익숙했습니다.
고대에도 사두개파는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눈에는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라는 형벌을 고수했습니다. 이는 사실 함무라비 법전과 같은 맥락으로 고대 사회에서 과다하게 잔인한 보복을 금하는 동해복수법(同害復讐法, Lex Talionis)입니다. 그러나 원래의 문맥에서는 자비로웠던 이 계명이 시대가 지나자 야만적인 풍습이 되었습니다. 이때, 유대 랍비들은 상황을 고려한 판례들을 내놓는데, 때로는 원래의 역사적 의미와 정반대되는 해석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1 ‘성경은 눈에는 눈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은가? 왜 이것은 문자적으로 [공격자의] 눈[으로 희생자의 눈을 보상하는 것]이란 의미가 아닌가? 너는 이것이 너의 마음속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하라!’ James Kugel, 『구약성서개론』, (김구원 김선일 옮김, CLC, 2011), 415에서 인용.
이처럼 말한 랍비 도스타이 b. 예후다(Rabbi Dosthai b. Yehudah)는 또다시 다음과 같이 질문합니다.
2. ‘눈에는 눈’은 [눈에 대한] 긍정적인 보상에 관한 내용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는] 앙갚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는가? 한쪽 눈은 크고 다른 한쪽 눈이 작다면 당신은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그러한 경우에 눈에는 [실제적인] 눈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James Kugel, 『구약성서개론』, (김구원 김선일 옮김, CLC, 2011), 415에서 인용.
또한, 랍비 시므온 요하이의 아들, 랍비 시메온(Rabbi Simeon b. Yohai)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3. …다른 누군가의 눈을 뽑은 시각장애인의 경우, 혹은 다른 사람의 팔을 자른 [팔이 없는] 장애인의 경우, 혹은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린 [다리가 없는] 절름발이의 경우에 무엇을 얘기할 수 있는가? 어떻게 나는 이러한 경우들에 있어 눈에는 눈의 원칙을 고수할 수 있는가? (b. 탈무드 바바 카마, 83b-84a). James Kugel, 『구약성서개론』, 415-16에서 인용.
역사비평적으로 보면 이런 율법해석은 본문의 역사적 원래 의미와는 거리가 멉니다. 저는 여기서 이런 해석이 옳다, 그르다를 따지자는게 아닙니다. 다만 후대의 유대인들이 율법을 자신들의 시대에 적용하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해석을 하였는가를 보면 상당히 독자 중심적이고 나름 실용적이었다는 점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방식이 신약시대에는 꽤냐 흔했다는 점입니다. 복음서의 예수님도 구약을 인용하시고 활용하실 때, 자주 본문의 역사적 의미보다는 자신의 상황에 맞게 활용하셨고, 어떨 때는 정반대의 의미로도 말씀하십니다.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시는 것이죠.
그 중 하나가 요한복음 2:17절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 하고 기록한 성경 말씀을 기억하였다."(새번역 요 2:17)
이 말은 예수님이 적대자들의 열심 때문에 자신이 죽게 되리라는 내용을 제자들이 기억하더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막상 시편기자의 의도는 그것과는 달리 성전을 향한 자신의 열정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억울하게 고난을 당했다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주님의 집에 쏟은 내 열정이 내 안에서 불처럼 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나에게로 쏟아집니다."(새번역 시 69:9).
물론 요한복음 2장은 시편의 역사적 원래 의미를 주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이는 시편을 인용할 때 그 내용을 활용하여 자신의 상황에 전혀 다르게 적용하는 문학비평적 수사학입니다.
어떤 해석이 정당할까요? 오늘날 역사비평적 접근은 정경해석에 정경 본문의 역사적 원래 의미를 발견하는데 상당한 유익을 줍니다. 그러나 비록 상대적으로 소수지만 독자반응비평이나 이데올로기 비평, 상호텍스트 비평 역시 학문적으로 정경을 읽고 활용되는 방식 중 하나입니다. 정경해석에서 독자중심의 접근은 사실 고대로부터 내려온 가장 오래되고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해석방식입니다.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정경을 QT 방식으로 묵상합니다. ^^
또한, 본문의 "역사적 원래 의미"를 추구하는 학자들 역시 자의적이고 주관적임을 피할 길도 없을 뿐더러, 자료가 부족할 때, 상상력은 필수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상상력은 자신의 경험과 문화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즉, 그 의미가 본문의 사실인가는 해석자가 치밀한 연구를 통해 본문에서 발견한 것이라고 주장해도 사실 해석자의 마음에서 나타나는 설득력있는 "창조성"과도 연관됩니다.
역사비평과 다른 문학비평 방식은 마치 오늘날 다양한 피아니스트들이 모짜르트가 작곡한 곡을 작곡자의 "원래 역사적 의도"와 상관없이 자신의 감성을 살려 연주하는 방식과 유사합니다. 어떤 이는 놀랍게도 재즈 풍으로, 비트를 넣거나 하드락으로, 혹은 가야금으로 모짜르트를 연주하기도 하지요.
물론 이 방법론의 정당성은 도구룰 제대로 사용하고, 유익한 결과물을 내는가와는 전혀 다른 논쟁입니다. 모짜르트의 원곡을 음정 박자도 불안하게 엉터리로 자주 틀리면서 연주할 때, 청중이 그 수준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악보를 자의적으로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고, 청자의 청음의 수준이란게 있기에 아무렇게나 연주하는 것도 다양성으로 다 허락될 수는 없지요.
건축할 때, 망치와 톱 모두 상황에 따라 유익합니다. 그리고 망치와 톱 모두 종류가 다양합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를 다루는 사람이고 얼마나 훌륭한 건축 결과물을 만드는가입니다. 자기의 해석이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다른 것은 틀렸다고 악을 쓰고 때를 쓴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란 뜻입니다. ^^
오늘날 설교자 대부분은 역사적 원래 의미에서 벗어난 내용을 강대상에서 설교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설교에선 본문을 유연하게 다루는 것이 암암리에 허락되기에 가능한 입니다만, 성서본문의 "역사적 원래의미"를 추구하는 제겐 늘 듣기가 괴로운 일입니다. 그 내용이 제대로된 차원있는 문학비평도 아니고요. 그런데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덧없는 설교와 해석에 열을 내지는 않으면서 약자에겐 한없이 냉철한 이도 있습니다 .
누구나 자기 해석의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감정싸움은 어리석습니다. 사람이 늘 화만 내며 살 수도 없습니다. 결국 자기 귀에 달콤한 내용이면 다 용납되고 같은 진영이면 옳은 것인가요? 이념논쟁으로 내편이 아니면 다 적인 관점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아 보입니다. 비판에도 합리성과 형평성이 필요합니다. 이해관계와 진영논리, 감성팔이에 빠져 한국교회의 설교와 성서해석는 총체적인 난관입니다. 내 눈의 들보부터 볼 때, 남의 눈의 티도 뺄 수 있는 법입니다.
이민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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