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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0:12-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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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0장 12절-18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화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2절: ‘저 날에.’ 심판 받는 날에. ‘소돔이 그 동리보다 더 견디기 쉬우리라.’ 그러니까 소돔에 내려진 하나님의 형벌보다도 더 무겁다 그 말이다.
‘소돔’ 하게 되면 롯을 떠올리게 된다. 롯은 소돔성 안으로 전도할 목적으로 이사 간 것이 아니라 잘 먹고 잘 살고, 또 나아가서 소돔성의 명예 권세 부귀 영광의 지도자가 될 목적으로 들어갔다. 한 마디로 세상을 누릴 목적으로 들어갔다.
안 믿는 사람들은 그와 같은 소원 목적을 다 가지고 있다. 세상에 속한 기독교인들도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다. 무슨 말이냐? ‘예수이름으로 이 세상에서 축복 받고’ 하는 한 마디 속에 세상 누릴 목적이 들어가 있는 정신이다. 우리는 이사를 가던 오던 진리가 있는 곳으로 항상 신경을 쓰고 이사를 가고 오고 해야 한다. 이게 원칙이다. 이 원칙을 벗어나면 세상 사람들과 똑같다.
지금 일반사람들도 같은 서울이라도 자식을 강남 쪽의 학교에 넣으려고 한다. 일반사람들도 자녀들에게 그렇게 신경을 쓰는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진리가 있는 교회로, 주님이 있는 교회로 가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소돔성으로 이사를 가는 롯과 별로 다름이 없이 살고 있다. 먹고 마시고 입는 위주로 이사를 가고 오고, 또 가만 보면 아들딸들의 학교를 염두에 두고 이사를 가고 오고 한다. 예수 믿는 일반교인들은 그렇다고 해도 예수님을 믿는 인도자의 세계에서도 그러고 있으니 이건 틀렸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애굽을 떠났는데 미디안 광야에서 장가를 들어서 큰 아들 게르솜을 나았는데, 아버지는 백성들과 함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느라고 광야로 나왔는데 아들은 애굽 성 안의 애굽의 대학교에 보냈느냐?
‘소돔’ 하면 롯을 떠올리는데, 롯이 소돔에 들어가서 전도를 했느냐? 안 했다. 아무리 봐도 전도한 구석이 없다. 롯이 자기 집에 종들이 많을 텐데도 아브라함이 한 기도에서 50명에서 계속 줄어드는 걸 보면 그 종들마저도 믿음을 지킨 자들이 없었던 것 같다. 아브라함도 기도하면서 그 종들이 틀림없이 소돔 고모라에 물이 들었을 것이라고 느낀 듯하다. 의인 열 명도 없어서? 그러면 아홉 명이나 다섯 명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아니다.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소돔성에는 의인이 없었다. 롯부터도 의인이 아니다. 그렇지만 아닌 말로 롯이 아브라함의 기도 덕으로 살았다. 이게 무슨 말이냐? 우리 주님의 덕으로 기본구원으로라도 건짐을 받는구나. 롯은 아내의 말을 듣고 소돔성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롯의 딸들은 아브라함의 종들이 아무리 신앙이 좋다고 해도 그건 눈에 안 보이고 소돔성의 들판이 넓으니까 자꾸 그 쪽을 바라보며 점점 들어가다 보니 소돔의 정신에 물이 들어버린다.
그 소돔성 안에는 여자고 남자고 간에 얼굴과 몸에 이상한 칠을 하고 산다. 그리고 소돔성 안에서는 남자들끼리 여자들끼리 더럽고 흉악한 죄를 짓는다. 동성연애는 하나님 앞에 죄악이다. 유황불에 들어가기에 딱 알맞다. 롯을 구하려고 외부에서 온 하나님의 사자들까지 욕을 보이려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음란한 성읍을 유황불로 태워버렸다.
그런데 유황불로 멸망 받을 소돔보다도 고라신이나 벳새다가 더 악하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앞서 보낸 천국복음을 듣고 이적을 보고 판단이 벌써 되고도 남았을 텐데, 경험을 했고 소문을 들어서 되고도 남았을 텐데 믿지를 않았고, 예수님께서 보낸 사자를 핍박과 고난을 줬고, 그 말씀을 자기 인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식대로 해석을 해 버렸기 때문이다.
천국복음의 교훈에서 영과 육, 천국과 세상, 영원한 것과 임시의 것, 신령한 것과 물질의 것, 선한 것과 악한 것, 생명과 사망, 새사람과 옛사람, 천국의 지식과 세상의 지식, 현세에서 이룰구원이 무엇인지를 다 듣고서 옳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그 중심이 세상 사상 정신으로 되어있다면 이는 형벌의 사람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귀로 옳은 것을 듣는 게 다가 아니라 자기 속에서 지식적으로 판단이 되면 가치 판단적으로 옳은 것을 선택해서 계속 나가야 한다. 그럼에도 천국복음을 듣고도 영접치 않은 그 집, 그 사람, 그 고을이 얼마나 심판이 혹독할까? 아마도 형벌을 주되 고문 같은 형벌이 아닐까 한다. 세상 끝이 오기 전에 하나님께서 진리를 가진 자기를 특별보호가 될 수 있기까지 살아야지 옳은 것을 듣다가 제 멋대로 자기 식으로 아무렇게나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고문 같은 형벌이 되면 아찔한 것이다. 신:에 보면 그런 일들이 영적으로 보면 적게는 본인 자신에게, 크게는 가정에, 더 크게는 교회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걸 하나의 눈에 보이는 차원으로 보면 안 된다. 자기가 옳은 진리본질에 서 있지 못하면 이미 자기는 포로로 잡혀간 것이다. 그러면 자기의 모든 것은 그 면에 다 이용을 당한다. 그러면 신앙수입은 하나도 없다. 그러면 결국 자기의 끝이 어떻게 되겠느냐? 우리는 영 위주로 보는 거다.
13절-15절: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고을은 마을이름인데, 지도상으로 보면 동쪽 갈릴리 바다 해변의 고을이고, 두로와 시돈은 서쪽 지중해 해변가의 고을이다.
가버나움은 예수님께서 천국복음 활동을 많이 한 곳이다. 대강 말하자면 백부장의 종을 고쳐줬고, 중풍병자도 고쳐줬고, 귀신들린 자도, 베드로 장모의 열병도, 각색 병자도 많이 고쳐주었다. 그러니까 가버나움 동리가 은혜를 제일 많이 받은 곳이다. 은혜를 제일 많이 받았는데 그 복음을 받아들일 줄을 모르면 그와 같은 형벌이 선언되는 거다.
벳새다 고을은 베드로와 안드레와 빌립의 고향이고, 예수님께서 소경을 고쳐주었고, 장정 오천 명을 먹이신 곳이다. 고라신 고을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일은 없어 보이지만 벳새다와 가버나움에 인접된 고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기 때문에 심판이 선언됐다. 북의 가운데를 치면 가장자리까지 울린다. 공의를 행하시는 분은 먼저 알게 하신 후에 심판을 하시는 것이지 무턱대고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두로는 구약 때 두로 왕이 솔로몬 왕이 전을 건축하는데 백향목 잣나무를 벌목해서 제공을 했고,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돈 사람들의 우상을 섬기기도 했다. 또 두로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헬라나라에 노예로 판 적도 있다. 또 예수님께서 두로를 거쳐 시돈으로 가시면서 가나안 여자의 흉악한 귀신들린 딸을 고쳐주기도 했다. 또 구약 때의 시돈 사람들과 아말렉 사람들과 마온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압제했다. 또 유대지방 사람들이 두로와 시돈에 와서 말씀도 듣고 고침도 받고 갔다. 이런 여러 연관관계가 있다.
사도바울은 두로에서 상선이 잠깐 배를 육지에 대고 짐을 풀고 있을 때 제자들을 찾아 7일 동안 머물렀고, 시돈 사람들이 헤롯에게 화친을 청한 일도 있으나 그가 신처럼 대우를 받다가 충이 먹어서 죽기도 했다.
그런데 여러 고을 중에 주님의 은혜를 제일 많이 받은 가버나움이 왜 교만했을까? 뭘 믿고 교만했을까? 많이 보고 들었으면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고칠 줄 알아야 하고, 고쳐나가면 하나님 앞에 존귀함을 받고 겸손한 사람이 되겠는데 자기가 안다고 하는 것이 지식적으로만 알았지 인격적 성품적으로 고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안다고 해서 사람이 고쳐진 것은 아니다.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사람도 좋은 거냐? 꼭 그렇지도 않다. 이성적으로 지식이 들어가서 안다는 것과, 속사람이 만들어지는 것과는 다르다. 진정 안다고 하는 것은 겉보다는 속을 아는 것이다.
지식적으로 아는 것도 있고, 경험적으로 아는 것도 있다. 지식적으로 아는 것은 경험적으로는 모르는 거다. 아가씨들이 엄마가 아기를 낳을 때 얼마나 배가 아픈 건지를 아느냐? 지식적으로는 알지만 경험적으로는 모르는 거다. 이성적으로 지식적으로 안다는 것과, 경험적으로 안다는 것은 다르다. 구원의 말씀을 들었을 때 하나님 앞에 잘못된 자기가 보여지면 겸손한 자가 되지만 다른 사람 쪽으로 마음이 자꾸 가면 교만 되기 쉽다. 자기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성품적으로 올라간 사람이라면 일반적으로도 사람이 똑똑하고 겸손하다. 그런데 세상적인 요소로 올라갔으면, 재산이나 학벌이나 경력으로 올라가면 교만 되기 쉽다. 사람을 밑으로 내려다보고, 봉사심도 없고, 자기만 알고, 남을 정죄하고, 덕을 세우지도 않고, 옳은 말은 듣기 싫어하고, 자기는 안다고 남을 가르치려고만 한다면 이거는 교만한 사람이다. 그러면 은혜를 못 받는다.
어디까지 낮아지리라? 음부까지 낮아진다. 음부는 죽은 자들이 가는 곳. 무덤이다. 육신목숨이 완전히 멈추고 죽은 자들이 가는 곳이다.
목숨이 끊어지면 부패되기 쉽고, 부패되기 시작하면 썩은 냄새가 나고, 썩은 냄새가 나면 병이 퍼지기 시작한다. 죽으면 이렇게 되기 전에 돈을 들여서라고 땅을 파서 묻거나 태워버린다. 시체를 빨리 안 치우면 산 사람에게 병이 든다. 아무리 좋았던 사람이라도, 부귀공명 명예영광의 사람이었다 해도 죽으면 살아있는 개만도 못하다. 어찌 보면 죽은 개만도 못하다. 소 돼지 닭도 그 지역에 병이 퍼지면 그 지역에 사는 짐승은 병이 안 들었다고 해도 땅을 파서 산 채로 묻는다. 우리는 여기서 그런 걸 눈으로 보여줄 때에 우리 자신의 신앙을 검토해 봐야 한다.
‘음부까지 낮아지리라.’ 세상에서 자기 위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떠들던 사람이 갑자기 안 보이는 경우가 있다. 이 때 ‘인생아, 너는 하나님이 아니고 하루살이구나’ 그런 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인간이 무슨 큰소리를 치겠느냐?
그런데 이 말은 두로와 시돈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말이냐, 안 받는다는 말이냐, 심판을 받기는 받는데 가버나움이나 벳새다나 고라신 고을보다 덜 받는다는 말인가?
매도 세게 맞는 자도 있고, 약하게 맞는 자도 있다. 약하게 맞는 것은 아마도 복음의 영향이 덜 간 곳이 아닌가 한다. 그만큼 듣고 배웠고 알았으면 그만큼 다듬어지고 해야 하는데 못 배운 사람과 같다면 이 둘을 같이 취급을 할 수가 없는 거다. 공부를 한 사람에게 시험을 치지 공부를 안 한 사람에게 시험을 치지 않는 것처럼.
우리 입장에서 우리교회의 교훈이 수준이 높다고 생각을 한다면 본인들에게 그만큼 하나님의 벌이나 간섭이 엄중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덜 맞으려면 다른 교회로 가면 되느냐?
16절: 원리 원칙적으로 제자들의 말은 예수님의 말씀이요,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 말씀이다. 말씀하심의 목적은 우리의 구원이다. 하나님의 온전으로 이뤄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닌 교회의 운동은 전부는 거짓이고 이단성이고 사단 마귀의 운동이다. 이 일을 하는 충성봉사자들 전부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게 된다.
주의할 점은 교회의 제도나 겉 표면 외부 외모 모양을 가지고는 어떤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분별을 할 수가 없고 말씀을 전할 때 말씀의 목적관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의 구원이 아니면 그것은 천국복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외부 표면을 가지고 속단을 내리면 그렇게 내리는 그 사람이 바로 문제의 사람이다. 천국복음이란 전하는 말씀에서 찾는 것이지 건물을 보고 천국복음이라고 하지를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능력을 왜 구하느냐? 본문에 보니 ‘너희 말을 듣는 자는 내 말을 듣는 것이고 너희 말을 듣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라고 했는데,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말을 듣고 분별하는 것이냐,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하는 것이냐?
17절-18절: 둘씩 짝을 지어서 보낸 70인이 돌아와서 주님께 보고를 한다. 왜 그렇게 기뻐 돌아왔느냐?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항복을 했다는 것이다. 귀신들이 항복한 것을 어떻게 아느냐? ‘나가라’ 하니까 두 손을 들고 나갔다는 것이냐?
귀신이 들어가는 것은 그 사람의 소원 목적 성격 성질과 크게 밀접한 연관이 있다. 많은 귀신이 어떤 집에 들어갔느냐? 물이 있는 집으로 들어왔느냐, 없는 집으로 들어왔느냐? 물이 없는 집으로. 즉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니까 그냥 들어오는구나. 그러면 ‘있고 없고’ 하는 건 즉, 누가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 하는 것이냐? 본인이다. 본인의 성격, 본인의 성질, 본인의 마음에 의해 그렇게 된다.
흉악한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 잘 들어갈까? 인물이 못 생긴 사람에게 잘 들어갈까, 잘 생긴 사람에게 들어갈까? 심성이 고운 사람에게 들어갈까, 고약한 사람에게 들어갈까? 고약한 사람에게. 벙어리 귀신은 어떤 사람에게 들어갈까? 일반적으로 귀가 먹어서 소리를 못 들으면 말을 못한다. 못 들었으니까 못하는 거다. 그 이치가 진리이치의 말씀을 못 들으면 진리이치의 말을 못하는 것이다. 그 이치가 못 배웠고 못 들었으면 못하는 거다. 노래를 날 때부터 못 듣고 귀가 먹으면 노래를 못한다.
거라사인의 땅에 옷을 입지 않는 귀신도 있다. 옷을 입지 않았다? 옷을 안 입으면 사람이 부끄러운데, 귀신이 들어가면 부끄러운 것도 모르는 것이다. 사람이 진정 입어야 할 참 옷을 모르는 거다.
더러운 귀신 등등 이런 것은 그 사람의 성격과 성질에 많은 관계가 있다. 그래서 ‘아, 이 사람이 교회를 다녀도 어디에서 많이 다녀서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 듯이 그게 정신으로 마음으로 들어있구나’ 하는 게 있는 거다. 과거에 된 대로의 그게 속에 스며있는 거다. 속에 그게 들어있으면 그 말도 나오고 그 행동도 나온다. ‘나는 어디서 놀았습니다’ 하는 게 나오는 거다.
사람이 날 때부터 경상도에서 살았다면 경상도 말을 하게 된다. 전라도에서 살았으면 전라도 말을 하게 된다. 사람마다 그 지방의 특색적인 말이 있어서 못 속인다. ‘그 영향을 상당히 받았구나’ 그게 있는 거다. 물론 그 지방 사람이라고 다 그렇지는 않지만 그 지방의 특색이 있는 거다. 예수 믿는 것도 은연중에 그런 게 많이 들어있다. 그렇지만 사람은 오각의 오감성이 있으니 시간이나 장소나 사람이나 일에 따라서 적절히 나와야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기 성격을 너무 나타내고, 어떤 사람은 너무 숨기고. 이걸 적절하게 조절을 못한다.
마귀의 역사는 가르치는 교훈 면에서 많이 관계가 되는데, 특히 거짓 종들과 이단자들을 통해서 많이 활동을 하는데 하나님의 온전의 성품으로 닮지 못하도록 세상과 세상에 속한 소원 목적을 많이 말을 한다.
‘70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하는 여기에는 교훈이 들어있다.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사람이 그만큼 세다는 말이냐? 무엇 때문에 귀신이 나가는 거냐? 교훈에 의해 나가는 것이다. 교훈이 없다면 그 귀신이 안 나가는 거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제자들 입장에서는 귀신이 항복하고 나가는 것만 보였는데 예수님은 사단이 하늘로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하늘’이란 천국이라는 말이 아니라 높은 차원에서 떨어졌다는 뜻이다.
예수 믿는 생각 소원 목적의 차원이 땅에 있으면 그 사람은 사단 마귀의 놀림감이다. 사단 마귀는 높은 차원에 있다. 너보다 더 똑똑하고 영리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으로 되면 마귀보다 훨씬 위에 있게 된다. 생각이 수준이 모든 면에서 사단 마귀의 위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진리를 안 깨닫고자 하느냐?
주님의 눈은 하늘로서 사단 마귀가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제자들이 보는 수준과 예수님께서 보는 수준이 다르다. 우리도 예수님이 보는 수준으로 볼 줄을 알아야 한다.(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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