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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의 선언(Benedictio)
축도, 여러모로 이야깃거리가 많다. 한쪽에선 ‘찌어다파’와 ‘함니다파’가 싸우고, 또 한쪽에선 목사와 장로가 그거 내가 하겠다고 싸운다. 어느 쪽이 이길까?
우선 이것부터 보자. 목사가 아니어도 축도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한국 교회에서 장로와 목사들이 기싸움 하는 것마냥 종종 논쟁거리가 되곤 한다. 그거야 죽고사는 문제가 아니니 형편에 따라 알아서하면 될 일이지만, 전례 교회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축도’(祝禱) 또는 ‘강복’(降福)이라고 불리는 예배 끝의 '복의 선언'은 주례자, 즉 예배 집례자의 의무에 속한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축도는 목사라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예배시간에 담임목사와 절친한 목사, 아니면 유명한 목사가 앉아있는 게 보여서 예의바른 척 추켜세우며 맡길 수 있는 순서도 아니다.
소위 ‘축도’라고 부르는 ‘복의 선언’의 권한은 원칙적으로 예배 초입의 오늘의 기도(collecta)와 마찬가지로 주례자에게 있다. 단, 예외가 있다. 해당 교단의 지도자인 감독/주교/총회장이 예배에 참석했을 경우, 집례자보다 우선권이 있다.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역사를 짚어보자.....
축도 Benedictio(2)
...거의 모든 기독교 예식이 그렇지만, 공예배에서 회중을 위해 복을 비는 축도의 유래도 유대인의 예식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의 축복을 빌며 예식을 마감하는 건 유대인의 오랜 풍습이다. 기독교 예배의 축도에 가장 직접적인 끈이 된 건 유대인의 회당예식으로 추정된다. 한국 교인들에게 ‘축도’라고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로 시작하는 바울 사도의 축도(고후 13:13; 롬 15:5-6; 엡 6:23-24; 살전 5:23; 살후 3:16, 18; 히 13:20-21)부터 떠올리겠지만, 교회 예배 역사에선 유대교 회당예식 끝에 회당장이나 예식을 집례한 주례자가 했던 아론의 축도(민 6:24-26)가 오히려 더 익숙하다.
성서의 전거를 제외하고, 기독교 예배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축도는 갈리아 전례에서 확인된다. 단, 갈리아 전례에서 축도는 회중을 위한 주례자의 강복(降福)이 맞지만, 예배 끝에서 하는 게 아니라, 성찬례를 준비하기 위해 퇴장하는 성찬 봉사자들을 위한 축복의 시간이었다[각주]. 아를의 캐사리우스(Caesarius Arelatensis, 468/470–542)의 글에서도 성찬 받지 않고 퇴장하는 신자를 위해 강복했다는 기록이 확인되지만[각주], 이런 갈리아식 축도는 얼마지 않아 자취를 감추게 된다.
예배 끝에 공식적인 순서로 자리 잡은 건 중세 기부터인데, 그전엔 미사(영성체)가 다 끝나고 주교가 퇴장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 축복 기도해 주던 게 다였다. 그런데 교회마다 주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주교가 예배에 참석했다 해도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붙잡고 일일이 축도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성직자의 기도 한 번 받아보려고 애타는 성도들이 예배마다 가득했다는 점이다. 이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어찌 보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축도만 끝나면 쏜살같이 사라지는 신자들을 보면, 그래도 최소한 축도의 중요성을 그렇게라도 알고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주교의 수는 제한적이고, 미사의 성찬례가 끝나면 떡과 포도주를 올렸던 성작과 성반을 닦고 마무리를 해야 하는 사제, 그리고 성직자의 축복 기도를 기다리며 예배 후에 기다리는 교인들. 이 사이에서 교회는 하나의 해결책을 내놓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예배 끝에 ‘공동체 전체를 위한 복의 선언’(Benedictio super populum), 소위 우리가 좋아하는 ‘축도’, 또는 ‘강복’ 순서의 유래다.
9세기 신성로마제국 카알 대제의 제국 통합 정책에 힘입어 영토 안에 있는 교회들은 수정 보완된 로마 전례 안으로 하나씩 편입되기 시작했는데, 예배 마감 축도가 이때 자리 잡게 된다. 당시 축도가 오늘의 것과 다른 면이 있다면, 제사장의 축도로 알려진 아론의 축도(민 6:22-26)를 사용할 경우, 각 문장의 앞 구절은 집례자가, 끝 구절은 회중이 나누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집례: 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회중: 주시고,
집례: 여러분을 지키시기를
회중: 원하며
집례: 주께서 그 얼굴을 여러분에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회중: 원하며
집례: 주께서 그 얼굴을 여러분에게 향하여 드사
회중: 평강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이처럼 회중과 함께 응창 형식으로 나누던 아론의 축도는 중세 일반적인 축도로 자리 잡게 된다. 하지만, 직제의 위계를 교회론의 핵심으로 이해하던 중세교회에서 축도의 우선권은 언제나 주교에게 있었고, 주교가 없을 때만 집례 사제가 축도권을 행사했다. 강복의 형식은 아론의 축도가 가장 오래되었지만, 꼭 그것만 있었던 건 아니다. 중세 시대 매우 다양한 강복 기원문이 미사에 사용되고 있었다는 걸 8세기 하드리아노 성사집만 보더라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배 역사만 놓고 보면, 소위 ‘축도권’은 성직 위계를 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하고 있는 게 하나 있다.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신학에 따라 이 기준은 바뀔 수 있다는 점이다. 정교회와 가톨릭 신학에선 교회론의 핵심을 직제에 두기 때문에 축도권이 주교와 사제에게 있다는 기준이 변할 수 없다. 그러나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기준을 칭의론으로 설명하면서 만인 제사장직을 가르치는 루터교회에선 이걸 고집하지 않는다. 물론, 이 땅의 교회 현실에서 '조화와 질서'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루터교회 신학이 있기에 교회 공동체로부터 말씀과 성례전의 직무를 위임받은 목사가 축도하는 게 일반적이긴 하지만, 교회의 합의나 해당 교회 목회자의 적법한 위임에 따라 평신도가 축도할 수도 있다.
이와 더불어 축도의 끝말을 명령형(찌어다)으로 하느냐 아니면 청유형(원합니다)으로 하느냐도 또 다른 관심사다. 전례 교회에서 통용되는 아론의 축도든 한국 교회에서 일반적인 사도의 축도든 모두 동일한 원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원론적으로 강복은 복의 선언이고, 복을 내리는 주체는 하나님이다. 여기서 집례자는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하나님의 복을 회중에게 선언한다. 그렇기에 강복의 종결은 성서 말씀 그대로 따라야 맞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축도가 기록된 성서 구절이 명령과 청유 둘 다 해석 가능하다는 점이다. 번역은 반역이라고 했던가? 명령이든 청유든 각자 자신 있게 복을 선언하되, 그 복의 근원이 걸걸한 목소리로 팔 벌려 축도하는 담임 목사가 아니라, 조용히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깊이, 그리고 겸손하게 새기는 시간이라면 그것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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