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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0:19-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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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0장 19절-22절: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이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다’고 했다. 그러면 우리 입장에서는 그 권세를 받고 있는지 없는지를 심사를 해봐야 한다. 그냥 성경이나 읽고 그렇게 보지 말고 사람 나보고 하시는 말씀이다. 예수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다. 특히 목사님들은 더 그렇고.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다. 그러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다. 또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항복을 했고, 사단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졌다.’ 그러니까 사단이 어디서 살았다는 거냐? 하늘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
천국에서 살았다는 말이 아니고 ‘하늘’ 할 때는 하늘은 높다. 그러니까 ‘천국에서 살았구나’가 아니라, ‘공중에서 떠돌았구나’가 아니라 성도를 꾀일 수 있는, 유혹하고 미혹할 수 있는 높은 차원의 수단이라는 말이다. 사기꾼들의 수단이 높다. 사람을 속이는 수단이 높다. 그런 것처럼.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의 정신을 가지면 이건 하늘의 정신인데 예수 믿으면서 땅의 것을 소원 목적하고 있다면 그 신앙의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은 낮은 차원이다.
사단이 하늘에서 번개 같이 떨어졌다는 것은 사단의 높은 차원을 정복할 수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는 말이다. 생각이 높고, 지식이 높고, 지혜가 높고, 도덕성이 높은 차원이다. 이건 하늘의 차원, 하나님의 차원, 예수님의 차원이다. 사단도 꽤 높지만 그 차원을 정복할 수 있는 차원이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성경구절을 가지고 덤벼들어도 예수님은 그 차원을 정복을 해 버린다(마4:). 예수를 믿는다면 이렇게 믿어야 한다. 예수를 믿으면 지혜지식이 도덕성이 그렇게 나와야 한다. 안 나온다면 자기는 사단에게 먹히고, 마귀에게 먹히고, 귀신들의 장난이 돼 버린다. 그러면 사람 꼴이 어떻게 되겠느냐?
‘번개 같이 떨어졌다.’ 천천히 떨어지는 게 아니라 삽시간에 내려 꽂혀졌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 과연 이런 역사가 다른 것보다 기쁘냐? 다른 것보다 더 기쁘다. 왜 그런가 하니 ‘예수님이 성령으로 기뻐하사’ 그랬다. 인간을 만드신 분께서 뭘 보고 기뻐하시느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는데 우리의 뭘 보고 기뻐하겠느냐?
일반적으로 좋은 부모는 자식이 돈을 많이 벌어오는 것을 기뻐하느냐, 자식의 사람 됨됨이를 보고 기뻐하느냐? 후자다. 사람 됨됨이 속에는 돈을 많이 벌던 적게 벌던 먹고 사는 건 다 일반이다. 그런데 미련한 부모들은 사람 됨됨이는 못 보고 돈만 많이 벌어서 갖다 주면 좋아하며 술이나 담배나 사서 피우고 한다. 이건 못 쓴다. 이러면 사람이 망가지고 부모가 죽는 거다.
21절: 그런데 그런 뱀과 전갈 밟고 모든 권세를 주었고 사단이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정복의 권세라든지 이런 일이 어떤 자들에게 숨기어졌다고 하느냐? 어떤 자들에게는 숨기어지는 게 아버지의 뜻이냐?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겨져 있다. 이런 자들에게는 더 잘 나타내주어야 할 텐데 왜 숨기어져 있느냐? 여기서 슬기와 지혜로운 자들이 어떤 자들이기 때문에 계시를, 하나님의 뜻을 숨겨버렸느냐?
말세의 교회들은, 그리고 인간세상은 일반적으로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을 알아주고 높여주는데 예수님은 그런 걸 높여주는 게 아니라 안 알아준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안 알아주는구나. 그러면 어떤 사람들을 알아준다는 것이냐? 어린아이를 알아준다.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누굴까? 세상에는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이 많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 박사들, 외국에서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많다. 이 모든 것은 쉽게 말하면 선악과 따먹고 나온 세상과 육에 속한 것이요, 기준은 다 해 아래다. 천국 것이 아니다. 해 아래의 것은 전부 눈에 보이는 것, 물질적인 모든 지식 지혜 총명 등이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신령한 것을 보여준다고 해도 보지 못하는 소경과 같다. 또 교회 인도자들이 그런 것을 기준으로 성경을 본다면 성경말씀을 세상의 것으로 다 말해버린다. 이런 자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숨겨버린다.
어린아이는 성장판이 닫히면 키가 안 자란다. 뼈에 왜 살이 붙어 있는 거냐? 왜 뼈를 살이 감싸고 있는 거냐? 뼈에 영양공급을 하기 위해서이다. 소고기 뼈를 삶으면 살이 뼈에서 분리가 된다. 신비롭게 살로 감싸 놓은 것은 뼈에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서다. 영양을 공급을 하면 뼛속에서 사람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을 만드는 거다.
어쨌든 어린아이에게는 성장판이 있는데 사람의 성장은 한계가 있다. 그런데 영인 성장적인 면에의 성장은 무한이다. 하나님을 향해서 그 지혜지식이 그 능력성의 성장이 무한이다. 그런데 영적인 면에서는 네가 힘쓰기에 달려있다. 영적인 영양을 공급을 많이 받으면 커질 것이고 공급을 못 받으면 닫아질 것이다.
세상을 목적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은 아무리 세상공부를 많이 했어도 영적 성장 면에서의 성장을 얘기를 해줘봐야 전혀 감지를 못한다. 왜냐? 영적 성장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세상공부 많이 하면 더 못 알아들을 수도 있다. 이런 사람에게는 아무리 말을 해줘도 세상지식이 주격이 돼 있기 때문에 못 알아듣는다. 이건 질이 다른 거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은 눈에 안 보이는 것으로부터 말미암았다. 눈에 안 보이는 것이 없다면 눈에 보이는 것도 안 만든다. 우리가 영 주격, 신령천국에서 사는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당신의 모양대로 만들고 이 세상도 만들어서 우리로 이 세상에 살면서 훈련을 시켜서 영능의 실력을 닦게 해서 하늘나라로 데리고 간다.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어린아이에게 나타낸다는 게 무슨 뜻인가? 어린아이는 궁금한 게 많다. 그 다음에 어린아이는 어른의 손을 잡고 잘 따라간다. 말하자면 잘 매달리는 성질이 있다. 궁금한 성질이 있고, 매달리는 성질이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의욕을 가진 자들이 영적인 면에서의 어린아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의 인도대로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성령님의 역사로 알게 해 준다. 보여지게 해 준다. 그러나 스스로 ‘지혜 있다. 똑똑하다’ 하는 자는 참 사람으로 온전자 되게 해 주시는 성령님의 역사의 맛을 못 보고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나는 수십 년을 예수 믿고 안수집사, 장로인데’ 하는 자는 교만해서 못 받는다. 스스로 ‘지혜 있다. 슬기롭다. 나는 교회 오래 다녀서 신앙 믿음이 좋다’ 하는 이건 틀렸다. 그 다음에 ‘나는 모태신앙인데’ 하는 거. 이건 하나님 앞에 할 소리가 아니다. 예수님은 모태신앙을 알아주는 게 아니다. ‘나는 한국의 인류대학을 수석졸업자인데’ 이건 교만이다.
‘나는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대학출신인데. 나는 박사증이 몇 개인데. 나는 재산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교계적으로 사회적으로 알아주는 사람인데’ 이건 다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들로 간주가 되기 때문에 숨겨져 있다. 알지를 못한다. 그런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숨겨져 있다. 하나님의 역사도, 사람을 보는 면에서도, 세상을 보는 면에서도, 교회를 보는 면에서도 그런 사람들에게는 다 막혀져 있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이들의 지혜와 슬기로움은 어디에서 얻어진 것을 가지고 교만하고 있는 거냐? 세상 일반생활에서 얻어진 지혜, 세상학문을 연구해서 얻어진 지혜, 일반 도덕적 인인관계에서 얻어진 지혜, 세상 일반법칙에서 얻어진 지혜 등등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이것은 해 아래의 지혜이다. 세상 변천사의 지혜이다. 그 때 그 때마다 상황 따라 달라져야 할 지혜이다. 세상은 이걸 전혀 모른다.
그런 것을 주격으로 한 자기의 지혜를 가지고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 들어있는 구원의 지혜를 어찌 알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먹으면 정령 죽으리라’고 한 그 명령을 거스려서 선악과를 먹고 영이 죽은 데서 나온 그 지혜 그 슬기, 사망적인 그 지혜, 심판 받을 땅의 그 지혜가 하나님의 하늘의 그 지혜를 어찌 알 수 있겠느냐?
참 지혜와 슬기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것이다. 잠:에 ‘은금을 취하는 것보다 지혜를 가져라. 주님을 찾아라. 진리를 가져라. 그러면 너를 금목걸이처럼 여긴다.’ 너를 그렇게 대우해 주겠다는 것이다. 미래를 알게 해 주는 지혜, 심판을 받지 않게 해 주는 지혜, 영원히 자기를 영능의 실력과 존귀 영광자가 되게 해 주는 지혜. 이게 성경에 있다. 그런데 자기가 존재적으로 그런 자가 되려고 하지를 않고 현재적 수준에서 세상환경을 좋은 것을 갖다 달라고 하니 이건 교만한 것이다.
불타질 이 세상에서 아무리 부귀와 명예와 영광을 누리며 살았다고 해도 불타질 심판으로 들어가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천하를 얻고도 네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22절: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다.’ ‘아버지’라 할 때는 어떤 느낌이 드느냐? ‘왕과 백성’ 하고 표현을 하는 것과, ‘아버지와 아들’이라 할 때는 어떤 느낌이 드느냐? ‘스승과 제자’ 라고 할 때는 어떤 느낌이 드느냐? 느낌적으로 각각 다르다. ‘아버지와 아들’ 할 때는 어떤 느낌이냐? 아들이 아버지에게 잘 보이면 아버지의 것을 통째로 받을 수 있는, 상속을 받을 수 있는 게 들어있다. 아들이 안 되면 없는 것이다.
그러면 뭘 보고 ‘아들’이라고 하느냐? ‘아들’의 의미가 뭐냐? 아들은 아들인데 아버지의 것을 못 물려받는 아들도 있다. 자식이 못 돼 놓으면 아버지가 그런 아들에게 상속을 안 한다. 오히려 충성스런 종에게 넘긴다. 그러니까 ‘아버지와 아들’ 할 때는 ‘아들이 가진 모든 것은 아버지의 것이다’ 라는 말이 된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다.’ 그러니까 아들이 가진 그 모든 것은 아버지의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라는 이것이 무엇이 얼마 만큼이라야 ‘모든 것’이냐? ‘모든 것’이란 신령계와 이 세상 물질계를 통틀어서 이다. 땅에 기어 다니는 개미도 아버지의 것이요 아들의 것이다. 여름밤에 잠을 못 자게 하는 모기도 아들의 것이다. 사람의 피를 빠는 모기는 마귀가 만든 것이냐? 아버지의 것이 아닌 게 없다. 신령계 천국 천사 마귀 악령류들이 늘 수시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물질계의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큰 생물 사람까지 모든 존재들 없이 하려면 하루아침에 없앨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아버지의 것이요 아들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것이 아버지의 것이고, 하나님의 것이면 다 예수님의 것이라는 건 아 알고 있는데 왜 새삼스럽게 ‘하나님의 모든 것을 예수 당신에게 주었다’고 하는 말을 하는 거냐? 그냥 자랑을 하는 말인지, 아니면 우리가 예수님을 잘 사귀면 예수님의 것이 자기에게 온다는 것인지?
예수님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것이 다 있다. 없는 게 없다. 이게 믿어지느냐? 예수님에게 잘 보이면 그게 자기에게 온다. 지금 이치를 말하는 거다. 이 말을 들으니 물질에 욕심이 나느냐?
예수님이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서 ‘날 따라 오너라’ 하니 그들이 배와 아버지와 그물을 버려두고 따라간다. 또 어떤 데는 고기 잡은 배도 버려두고 따라갔다. 그러면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버려두고 간 이 배를 누가 가져갔으며, 그들의 아버지는 누가 데리고 갔느냐? 그물과 배가 갈릴리 바다에 지금도 있을까?
‘나를 따라 오너라’ 할 때 버려진 것은 그냥 버려진 것이냐, 예수님 당신이 알아서 하시는 것이냐? 어떻게 느껴지느냐? 그런데 이게 안 믿어진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가면 뭐가 어떻게 되고 어떻게 되고’ 한다. ‘예수님에게 맡겨라’ 하면 말이 쉽지 안 믿어진다. 그래서 못 맡긴다. 그러나 한 번 맡긴 사람은 다시 한 번 맡기게 되고, 이렇게 숙달이 된다. 한 번도 못 맡긴 사람은 계속 염려 걱정을 한다. 이건 예수님께 안 맡겼다는 증거다.
예를 들면 아내가 정말 옳은 교회에 다닌다면 말하자면 아내가 그의 남편을 정복을 할 수가 있다. 그런데 교회에 다녀도 속된 말로 미친 짓을 하는 데로 나간다면 안 믿는 남편이 그걸 어떻게 보고 있겠느냐? 거의가 그런 식으로 돌아가고 있으니 아닌 말로 그런 여자가 우리교회에 나오더라도 그 남편이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한다. 그러니 남편이 안심을 못하는 거다.
그러나 우리교회는 그런 차원과는 전혀 다르니까 여기서 잘 배워서 정말 하나님 앞에서 모든 면에서 여자로서의 성격도 고쳐지고 성질도 고쳐지고, 가정의 살림살이에, 그리고 남편을 섬기는 일에 정말 성경대로 돌아간다면 안 좋아할 남편이 한 사람도 없는 거다. 그래, 정말 그런 마음을 가지고 우리교회에 나온다면 ‘우리 남편 교회에 나오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 안 해도 벌써 거기에는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움직이고 있는 거다. 그러니 무서워할 것이 없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면에서 여자로서의 성격도 고쳐지고 성질도 고쳐지고, 가정의 살림살이에, 그리고 남편을 섬기는 일에 정말 성경대로 돌아가는데도 그런 아내를 교회에 못 나가게 하는 남편이 있다면 그런 남편을 어디에 쓰겠느냐? 그럴 때는 하나님께 맡겨버려야 한다. 그런 남편에게서 교회에 나간다고 맨날 두들겨 맞는 것보다 하루라도 교회에 나가서 아닌 말로 얻어맞아 죽으면 순교고, 하나님이 면류관을 딱 들고 서 있을 것이 아니냐?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 맞느냐? 하나님의 것은 자기 것이 맞느냐?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아버지의 것은 다 내 것이다. 나에게 줬다’고 떳떳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우리는 떳떳하게 ‘예수님 당신 것은 내 것입니다’ 하는 그게 안 되느냐? 나에게 다 주셨다는 말의 의미가 뭐냐? 그렇게 말씀을 하는 의도성이 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라오라는 것은 당신 것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통치권, 치리권, 심판권, 생명권 역사를 진행하는 역사의 진행권, 애정권 등등 그 권세와 능력 없는 게 없다, 예수님에게는 다 있다. 그러니까 그걸 다 쓸 줄 아는 게 ‘마음대로’다. 바로 쓰는 게 ‘마음대로’다.
하나님의 창조의 권에서 남자는 아내에게 그 권을 쓸 줄 알아야 한다. 아내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권을 남편에게 써야 한다. 그런데 선악과 먹어서 타락이 돼 놓으니까, 그것도 여자가 먼저 따먹어 놓으니까 깡패 같은 남자가 누르면 여자는 꼼짝도 못한다. 이걸 바꿔서 생각을 하면 생명과를 따서 남편에게 주면 남편은 받아먹게 돼 있다는 것도 들어있다. 그런데 그 이치를 모른다. 그러니 여자는 ‘선악과 따먹고 당신에게 줬으니 미안합니다. 남편이 힘쓰고 애쓰는 게 나 때문이니 미안합니다’ 이렇게만 생각하지 말고 예수 믿으면 생명과를 따서 남편의 입에 넣어줘라. 그러면 이제는 ‘미안합니다’ 안 해도 된다.
두 부부가 생명과를 따먹으면 행복하고 즐겁고 영광스럽고 평안한 거다. 그런데 왜 겁을 내느냐? 교회에 못 가게 하는 남편이 있다면 말하자면 ‘당신 내 남편 안 해. 예수님을 내 남편으로 삼아야지’ 하는 그런 배짱도 있어야 한다. 자기 남편보다 예수남편이 더 좋다. 안 그러냐? 예수님에게는 모든 게 다 들어있다.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그러니까 아들이 아버지를 잘 안다는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잘 알면 아버지의 것이 아들에게 그대로 전수가 된다. 하나님의 것이 나에게 그대로 온다. 마음을 잘 알고, 소원 목적을 잘 알고. 성경은 모든 면에서 거기에 맞춰져 있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서도 세상에 늘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수십 년을 믿어도 늘 그 모양이다. 일반학교는 아무리 공부를 못해도 햇수만 가면 상급학년으로 올라가지만 예수 믿는 자는 늘 그 자리다.
아버지가 모든 것을 주시는 것은 아들이 인격적으로나 성품적으로나 목적적으로나 가치판단적으로나 소원 목적적으로나 아버지가 아들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어쩌면 내 마음과 같으냐? 내 것을 네가 다 해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질적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의사단일이다.
일반 이치적으로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마음이 똑같다면 살림살이를 며느리에게 다 맡긴다. 그런데 시어머니라고 해서 다 살림을 잘하는 것도 아니다. 며느리는 또 며느리대로 그렇고.
자녀를 시집장가를 보냈으면 시부모는 그 살림살이를 터치하지 말아라. 며느리는 아들과 살기 때문에 자기 살림을 부릴 권이 있는 것이다. 다만 미숙한 데가 있으니 교훈적으로 들어가면 된다. 휘어잡으면 안 된다. 며느리도 살림살이를 하기 때문에 생각을 잘 해야 한다. 살림이 불어날 수 있도록 모든 면에서 생각을 잘 해야 한다. 어른이 되면 어린아이 때의 모든 일은 버려야 한다. 성장을 하면 어린아이 때의 모든 것을 버리듯이.
아들도 아버지의 마음속을 100% 알고, 아버지도 아들의 마음속을 100% 알고. 이러면 같아진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다 주신다. 그런데 오늘날 마지막 시대의 교회는 어떠냐? 자기 교회 부흥시켜 달라고? 자기는 가만히 있고 예수님이 전도해서 데려오기를 바라느냐? 전도는 왜 하라고 하는 거냐? 부려먹으려고? 전도를 하라는 것은 전도를 하는 자기의 실력을 키워주려는 것이다. 어른을 만나면 어른에게 하는 말이 있고, 어린이를 만나면 어린이에게 하는 말이 있다. 그러니 평소에 자기의 모든 면을 갈고 닦아야 한다. 성질이 나쁘면 사람이 안 붙는다.
‘입을 넓게 열라. 크게 벌려라. 그래야 은혜를 받는다’ 하는 건 귀신의 집단들이다. 세상에는 서로 모르는 아버지도 아들도 많다. 인격적으로도 서로 모른다. 의사단일이 아닌 서로 의사불통 된 부모와 자식이 많다.
자식이 최소한 대학졸업 전까지는 부모로부터 간섭을 받지만 그 이후엔 성인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이때부터는 자식은 하나님의 본질에 입각해서 부모님의 장단점을 알아서 그 부족성을 자기가 채워 넣어야 한다. 이걸 모르고 자식이 부모를 원망하고, 부모는 ‘내가 널 어떻게 길렀는데’ 하며 싸워서는 안 된다. 성경을 놓고 아들의 마음도 아버지의 마음도 거기에 맞추는 거다. 한 마디로 인간구원의 목적적인 면에 대해 몰라서 불행을 가져오면 안 된다.
세상적인 면에는 제각각 발전이나 후퇴가 있겠으나 하나님의 구원 목적적 역사적인 면에서 자라지를 못해서 아버지의 모든 좋은 것을 받지 못하는 자녀가 있다면 참 불행이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으면 아버지의 것을 아들로 통해서 받아야 한다. 안 받고 어떻게 ‘감사합니다’ 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아버지면 아들을 알아야 하고, 아들은 아버지의 것을 받고 아버지를 잘 알아야 한다. 인격적으로 잘 알고 의사적으로 잘 알고 이래야 행동이 같이 나가게 된다.
수 년 수십 년을 살아도 아직까지 내 아내 내 남편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있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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