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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0:25-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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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0장 25절-37절: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25절: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했다. 이 율법사가 예수님께 이렇게 묻는 것은 자기가 영생을 진짜 몰라서 알려고 묻는 것이냐, 아니면 자기는 잘 알고 있고 예수님은 모를 것이니 ‘내가 예수님께 한 수 가르쳐 줘야지’ 하고 묻는 것이냐? 이 율법사가 자기는 영생을 알고 있고 예수님은 모를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예수님께 시험을 하는 것이다. 마귀는 마:에서 예수님께 세 가지 시험을 가지고 오더니, 본문의 율법사는 영생으로 예수님께 시험을 한다.
영생이 뭐냐? 영원히 사는 것. 지옥에서도 영원히 살고 천국에서도 영원히 산다. 그러면 이 율법사가 이 둘 중에 어느 쪽 영생을 물은 것일까? 천국이다.
천국의 영생이라 하면 그 안에 영능의 실력이 들어있는 의미이다. ‘영생’이라는 말 속에는 영능의 실력대로 천국에서의 누림성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이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 할 때 그냥 ‘죽으면 천국 간다’로만 알고 있으니 이것은 그 말 속의 알맹이를 모르는 것이다. 이 알맹이는 교회에 다니면서 채워야 하는 건데 이 알맹이가 없이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 하게 되면 말하자면 알곡이 여물지 않은 채 껍데기로 천국에 가는 그런 느낌이 든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껍데기로 믿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 어디를 간들 예수냄새가 나겠느냐? 안 난다. 그렇게 되니 일반 불신자들 속에 들어가면 일반 불신자들과 똑같고, 교회에 오면 믿는 척은 하지만 속에는 알맹이가 없다. 그러면 알맹이가 없는 이 믿음이 세상의 어느 유행바람은 안 타겠느냐? 자기 환경이 어려워지면 남 탓하며 싸우지 않겠느냐? 부모 잡고 싸우고, 부부가 서로 싸우고, 부모와 자식들이 싸우고. 이건 왜 그럴까? 속이 여물어지지를 않아서 그렇다. 사람이 다듬어지지를 않아서 그렇다.
나이를 먹었으면 사람이 다듬어져야 한다. 또 예수님을 한 해 두 해 믿는 것도 아니도 자기가 어머니 배에 있을 때부터 부모가 믿었다면 자기는 어릴 때부터 예수를 믿으면서 자란 것이고, 자라서 시집장가를 가서 애가 생기고 그러면 그동안 예수 믿으면서 닦아져 나온 것이 있을 테니 예수 믿는 냄새가 나야 할 텐데 그런 게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면 누가 그 사람을 보고 예수를 믿고 따라오겠느냐?
이렇게 믿으면 신:에도 있듯이 이걸 영적으로 보면 그 집에 재앙이 가득하게 된다. 혹 육신의 눈으로 보는 재앙이 없다면 평화롭다고 하겠으나 영적인 면에서는 껍데기다. 그러니까 많은 세월이 자기 속에서 쌀벌레 좀처럼 콩벌레처럼 네 속을 갉아먹었다.
예수를 똑바로 믿어봐라. 왜 껍데기가 되어 있겠느냐? 예수 믿은 지 3년만 되면 벌써 교회에서 직분도 맡고 사람이 활기차고 해야 할 텐데 세례를 받고 십 년이 넘도록 그러고 있다면 그게 뭐냐? 먼저 믿은 사람은 뒤에 믿은 사람에게 덕이 돼야 하고 앞서서 나가야 하고 가르쳐 주고 모범이 돼야 한다. 성경은 전부가 나보고 하는 말씀이다. 남의 얘기가 아니다.
‘영생’이라 할 때는 영능의 실력대로 누림성을 염두에 두고 말이 되는 거다. ‘영생’이라 할 때 너나 나나 천국에 가면 다 똑같이 즐겁게 사는 것이라면 이 세상에서 뭐하려고 예수 믿느라고 힘쓰고 애쓰고 순교도 당하고 하겠느냐? 예를 들면 공부 잘하는 사람이나 못하는 사람이나 졸업할 때 다 똑같다면 뭐하려고 열심히 공부를 하겠느냐? 예수 믿는 이치를 모르겠거든 세상을 보고 생각을 하라. 성경도 못 깨닫고, 일반 세상에 많은 이치가 있는데 그것도 못 깨닫는다면 그게 뭐냐? 인간이 무슨 가치가 있느냐?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다. 당신이 이 땅에 오셔서 33동안 죄 없이 살으심은 죄와 허물로 죽은 미련한 나 때문에, 고약한 나 때문에, 나의 영을 위해서 그렇게 내 대신 사신 것이다. 이게 기본구원인데, 이렇게 기본구원을 받으면 그 사람은 천국으로 입국권이 있다. 그 사람은 믿음이 있고 없고 간에 언제 들어가도 천국에 들어간다. 예수님께서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은 나의 영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살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생을 한 나의 영은 질적으로 하나님의 질과 똑같다. 이 기본구원을 얻으면 자기는 지옥에 못 간다. 가려고 해도 실컷 얻어맞으면 맞았지 지옥에는 못 간다.
이처럼 기본구원을 얻어서 천국에 갈 자가 되었음에도 영적인 면의 감각성을 모른 채 분명히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천국에 안 갈 자처럼 살고 있다면 인간의 감정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감정이 없겠느냐? 자기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다.
기본구원을 얻은 우리는 이제 이 땅에 살면서 옳은 교회로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지식을 얻고, 그리고 세상 어디에서 살든지 그 옳은 지혜지식을 가지고 잘 적용을 시키면 영능의 실력, 믿음실력이 점점 닦아지는 것이다. 그러다가 주님이 ‘들어오너라’ 하면 죽음의 선을 넘어가서 영능의 능력대로 실력 것 누리게 된다. 이것이 영생이다. 그러니까 ‘영생’이라 할 때는 이 땅에서 영능의 실력으로 만들어진 그것으로써 천국에서 행복하고 쾌락하고 영광중에 누리는 것을 말한다.
예수는 구원이다. 그래서 율법사가 성경의 뜻을 잘 안다면 이 구원의 예수는 메시아임을 잘 알 텐데 성경의 뜻을 모르니까 율법사 자기를 구원해 주실 이 메시아 예수님을 눈앞에서 빤히 보면서도 예수님을 시험을 치고 있는 것이다. 마치 학생이 선생에게 시험을 치는 것처럼, 자식이 부모한테 시험을 치는 것처럼.
그런데 오늘날 그런 식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다. 쉽게 말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안 받아들인다 그 말이다. 말씀에는 자기 실력이 되는 이치가 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안 받아들인다. 그게 자기의 구원이 되는 건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안 받아들인다. 앞으로 일생을 살아가면서 그 옳은 지식의 지혜가 자기 일생 삶의 기초가 될 텐데 그걸 내버린다.
그걸 내버리고 살면 금방은 안 나타난다. 목숨이 붙어있고 젊어서 돈을 버니 안 나타난다. 그러나 한 십 년만 지나봐라. 예수님을 믿으면 앞서 나갈 줄을 알아야지 사람이 쓸개도 없고 중심도 없이 어째 그런가? 안 믿는 사람들의 타락된 그 주관성을 봐라. 정말 깡깡하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믿는 정신이 강해야 한다.
성경 문자 속의 은밀한 뜻을 모르면 우리는 모두가 예수님을 시험을 치는 자가 된다. 예수님 당시 때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성경을 몰라서 예수를 죽였느냐? 그들은 모세오경을 외우다시피 했다. 오늘 이 자리에 온 사람들도 성경을 다 읽었고 안다면서 자기에게 오는 진리이치를 죽여 버린다면 이건 예수를 죽이는 것과 같은 거다. 그러니까 자기에게 오는 진리이치를 죽이는 것은 그 사람이 성경을 안다고 할지라도 실은 성경을 몰라서 그런 거다. 진리본질의 신앙의 정신을 모르면 예수를 죽이는 일을 하게 되는 거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 쪽이 아니면 세상이다. 그 둘밖에 없는 것인데, 하나님 쪽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예수를 죽이는 쪽에 선 것이다.
율법사가 주님 앞에 서 있는데 영생이신 예수님께서 영생을 모르는 이 율법사에게 되물었다. 이걸 우리가 옆에서 본다면 율법사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말하고 싶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영생을 아느냐?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그 영생은 알지만 예수님의 삶속에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이룰구원의 이치가 많이 들어있는데 이걸 무시하고 예수 믿는 사람은 마귀 쪽에 속해 있는 거다. 본인이 아니라고 말을 해도 모든 정답은 주님으로부터 내려진다. 성경이 정답이다. 그래서 우리가 자꾸 성경에 맞추는 거다. 그런데 정답인 성경을 무시하고 항상 자기 주관적으로 정답을 내리고 있다.
26절: 네가 무엇을 하기 위한 수단방법으로 성경을 읽느냐? 율법사는 신령한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냐, 땅에서 부자로 살게 해 달라는 물질의 말이냐? 말속에 들어있는 정신을 봐라.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율법사가 성경대로 대답을 잘 했다. 그래서 28절에 ‘네 대답이 옳도다’ 하신다. 28절의 대답을 하심은 ‘그러면 네 말대로 그렇게 해 봐라’ 그 말이다.
‘너 말 잘 했다. 너 똑똑하구나. 그러면 네 말대로 그렇게 해 봐라.’ 그러면 율법사가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율법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예수님이 없이 어떻게 영생이 주어지느냐? 예수님은 영생자요, 당신의 삶 속에 전부는 영생이 알알이 들어있다. 그런데 이것이 없이 영생은 허망한 것이다.
‘네 마음을 다하며.’ 주일날 교회에 올 때 마음을 다해서 오느냐? 조금만 빨리 일어나면 될 텐데 예배 시작 전에 허겁지겁 들어오고 하는 게 목숨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는 거냐? 아니다. 평소 집에서도 할 수 있는 대로 식구들끼리 성경을 보고 깨달으려고 해야 한다. 그 속에 자기 일생의 모든 지혜가 다 들어있는 거다.
세상은 경험하면서 사는 거다. 그 경험하는 속에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로 들어가면 그 사람은 박사들보다 훨씬 고차원적이 된다. 아무리 박사라도 사람 안 된 박사가 참 많다. 그러면 많이 한 그 공부가 무슨 가치가 있느냐? 가치가 없다. 이렇게 되면 자기가 가진 지식이 자기를 멸망시키는 교만한 지식이 된다. 사람이 먼저 된 후에 공부다. 공부부터 하고 사람이 되느냐? 안 그렇다. 사람의 속 중심이 안 그렇다. 사람이 바로 된 후에 가르치고, 사람이 바로 된 후에 시집도 장가도 가고.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어도 사람 됨됨이가 안 좋고, 못된 성질 성격은 그대로 가지고 있고, 세상 바람 불면 날려가고 하면 사람 꼴이 어떻게 되겠느냐? 사람은 하나님을 닮게 되어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님을 닮으면 하나님을 닮는 건데, 그러지를 않고 예수 믿는 사람이 독사 같고 표범 같고 하면 되겠느냐?
율법사가 대답한 것은 인격적 성품적으로 사람이 잘 만들어진 데서 나온 게 아니라 성경구절을 액면적으로 외운 데서 나온 말이다. 그런 것처럼 예수 믿으면서 성경구절을 달달 외운다고 해서 믿음 좋은 것이 아니다. 성경구절을 달달 외우는 그 노력을 가지고 그 속의 뜻을 잘 깨달으면 성경구절을 외운 것과 다름이 없다. 본뜻이 그거니까. 신령천국 영생의 세계는 성경구절을 외운다고 해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사람이 율법의 뜻대로 인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들어가는 곳이다. 성품이 들어간다.
이 땅에서 예수 믿는다고 해도 예수 믿는 사람끼리 성품적으로 다 차이가 있다. 영능의 실력적으로 차이가 있다. 이 땅에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사건 환경과 접촉을 해서 거기에서 자기 속의 성품이 점점 커가고 자라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도 나이가 조금 어려도 그 면에서 밝은 사람이 있고, 나이를 많이 먹었어도 그 면에서 어두운 사람이 있다. 자라고 못 자라고가 그렇게 되는 거다.
안 믿는 사람은 육신의 나이를 가지고 ‘어른이다. 아이다’ 하는 거지만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은 속사람의 성장을 보신다. 그리고 속사람의 성장, 영능의 실력 이것을 놓고 하나님은 직분을 맡기기도, 안 맡기기도 하신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일을 아무나 맡는 거냐? 또한 예수님을 잘 믿어서 예수님께 예쁨을 얻어서 하나님의 집에서 직분을 얻었다면 그게 별 것이 아니냐? 직장에서 올라가는 직책보다도 못한 것이냐?
예수님을 모르는 그가, 구원을 모르는 그가 성경구절 외운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효력이 없다. 예수님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모르는 그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느냐?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은 예수님으로 통해서 나오는 것인데.
‘네 마음을 다하며.’ 우리 모두 자기 마음이 있느냐? 있다면 그 마음을 끄집어 내봐라. ‘내 마음은 이렇습니다’ 하고 그 사람의 행동이나 활동이나 말에서 나타난다. 그 사람의 말에서 ‘내 마음은 이렇습니다’ 하고 증거하는 거다. 그래서 ‘아, 그게 네 마음이구나’ 하고 자기 마음을 자기가 증거한다.
일반적 지식적 선악과 따먹은 양심을 가지고 판단을 해서 성경을 본다거나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다. 그러니 지식을 바꿔야 한다. 우리의 영이 중생되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인 진리를 따르는 마음이라야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게 자기에게 고통으로 여겨지느냐? 못된 자식은 부모를 섬기는 것을 고통으로 여기고 고난으로 여긴다. 그래서 ‘부모가 빨리 죽었으면’ 한다. 그런 자식도 많고, 그런 며느리도 많고, 그런 딸도 많다. 그러면 예수 믿으면서 못 고친 자기가 아이를 낳아서 그 아이가 크면 자기보고 ‘우리 아버지 빨리 죽었으면. 우리 어머니 빨리 죽었으면’ 하며 만나기만 하면 만날 싸우고 한다면 좋겠느냐? 아기를 키우면서 부부끼리 늘 싸운다면 자기 아이에게 ‘너도 커서 이렇게 싸워라’ 하고 가르쳐 주는 거다.
율법사라면 최고의 양심을 가져야 하는 건데 이 율법사는 최고의 양심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최고의 양심을 가져야 한다. 진리 따르는 최고의 양심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게 네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서 주님처럼 그 양심을 가지는 것이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다하면 자기가 영광스러워지겠느냐, 추해지겠느냐? 하나님이 추하냐? 예수님이 추하냐? 영광자요 만능의 능력자이다. 만능의 능력이 얼마나 고상하냐? 우리도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마귀의 종들은 자기는 만능의 능력자라고 부르짖으나 추하기가 그지없다.
‘목숨을 다하여.’ 우리의 목숨이 몇 개냐? 자연목숨, 자연생명. 밥 먹고 코로 숨 쉬고 사는 이 자연목숨도 하나님께서 코로 불어넣어 주었다. 그런데 코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 넣었다는 본뜻은 ‘너는 하나님의 입김으로 사는 것이다’ 그 뜻이다. 그런데 자기가 하나님의 입김으로 산다고 느끼느냐? 세상 입김으로 산다고 느끼고 있지 않느냐? 세상 입김으로 살지 않느냐? 믿던 안 믿던 사람이라면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입김으로 사는 것이 사람이라고 한다.
이 자연목숨은 일생이 끝날 때까지다. 자연목숨은 자기 몸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자기 몸을 아껴봐야 병들고 노쇠 되고 결국은 죽게 된다. 그런데 마음과 뜻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면 자기가 빨리 죽고, 그렇게 안 하면 오래 사는 것이냐? 이해타산적으로 자기에게 유익되도록 좋은 것을 가져야지 예배를 드리면서 그냥 멍청하게 졸다가 가는 것이냐? 졸면 ‘너에게는 진리가 필요 없다’ 해서 마귀가 뺏어가 버린다.
‘힘을 다하여.’ 기능과 지능과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이게 자기 힘이다.
‘뜻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통찰과 이해와 생각을 다하고.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중히 야기고, 소중히 여기고, 영광스럽게 여기고, 네 목숨보다도 더 귀히 여기고, 하나님 속 썩이지 말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버지가 부자일 때 자식이 아버지의 눈에 들도록 성장을 하면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그 자식에게 다 맡겨버린다. 그런데 눈에 안 들게 자라면 하인이지만 아버지의 말을 잘 듣는 그 종에게 재산을 맡긴다. 예수 믿는 것도 그렇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무엇이냐? 몸과 목숨과 마음과 뜻을 다하는 것이다. 이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다. 이게 아가페 사랑이다.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그 사랑이 내 것이 되면 나에게서 그렇게 나온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내 것으로 안 돼 있으면 그게 안 나온다. 인간의 사랑도 사랑이 많은 사람이 있고, 빈약한 사람이 있다. 어느 사람이 좋으냐? 사랑이 많은 사람이다. 언행심사가 부드럽고, 분명한 일에는 칼같이 결단이 나고.
하나님을 사랑함에는 자기 일생의 전폭이 다 들어있다. 자기의 전 인격이 다 들어있고, 자기의 시간성 활동성 노동성 자기의 전 재산이 다 들어있다. 이 말이 교회에 전부 갖다 바쳤다는 의미가 아니고 자기의 모든 것이 하나님을 향해져 있다는 말이다. 그 면으로 자타의 구원 면에 써나가고. 이건 없이 교회에서 거짓 종을 만나서 자기 집 집문서를 다 갖다 바쳐도 하나님 앞에 소용이 없다. 예수는 그렇게 믿는 게 아니다.
말하자면 나를 하나님 당신의 형상대로 만들었고, 또 당신의 피로 값 주고 사셨으니 이건 기본구원인데 이 기본구원으로 나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었고, 더 나아가서 나를 하나님 당신처럼 온전자로 만들어 주시려고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서 세상의 모든 만물과 크고 작은 사건을 다 동원시키시고, 세상 인생이 끝나는 날에 나를 천국에 데려가서 영원히 실력대로 누리게 하려는 것이니 자기의 몸과 목숨 즉, 자기의 오각과 오감성에서 나오는 희로애락 전부를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자기가 만들어진 것은 하나님의 솜씨이고, 세상을 만들어 놓은 것도 하나님의 솜씨이고, 먹고 마시는 것도 하나님이 만들었다. 세상의 모든 사건 환경도 자기를 향해서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자. 주님처럼 만들어지자. 최고의 사람으로 만들어지자’ 하고 동원시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하나님을 안 믿을 거냐?
이 하나님을 참 믿느냐? 그렇다면 자기의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자기가 힘들어지는 거냐?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수록 빛 가운데로 가는 것과 같아서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고 평안한 것이다. 그런데 타락된 지식은 그렇게 생각을 안 한다. 교회에 나오는 게 지겹고, 그래서 주일날 교회에 나오기가 싫은 거고.
그래서 예배 때 늘 나오던 사람이 ‘감기가 들어서 주일예배에 못 나가겠습니다’ 한다면 ‘진짜 감기가 들었나보다’ 하겠는데 평소에도 자주 주일예배에 빠지던 사람이 ‘감기가 들어서 못 나오겠습니다’ 할 때는 진짜로 감기가 들어서 못 나올 경우라면 목사님께 교회에 못 나오는 이유를 말씀을 드리겠지만 그런데 자기가 다른 할 일이 있어서 주일날 누굴 만나러 가느라고 교회에 안 나오면 목사님께 그 이유를 솔직히 말하겠느냐? 안 한다. 다른 무슨 이유를 대는 거다.
사람마다 그런 게 있는데, 교회에 나오면서도 안 나오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나오고자 하는 마음이 늘 불이 당겨져 있는 사람도 있다. 이건 차이가 엄청난 거다. 안 나오고자 하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변명이 많아진다. 그게 그렇게 나오는 거다. 어디가 조금 아프면 ‘나가기 싫다’ 그렇게 된다. 이건 마음을 말하는 거지 진짜 아프면 못 나오는 거다.
교회에 나오는 것을 고역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 조금만 힘쓰면 될 것을, 조금만 밝은 생각을 가지면 될 것을 뭘 그렇게 비쭉거리고 엉덩이가 땅에 붙어서 왜 그렇게 못 일어나는 건지? 하나님이 정말로 앉혀놓으면 어떻게 할 판이냐?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감사함으로 그 마음이 생각이 활동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을 하면 전부가 감사다. 감사가 안 될 게 없다. 꼭 뭐가 일이 잘 돼야 감사냐? 그러면 일이 잘 안 되면 감사가 아닌 거냐? 아니다. 일이 잘 안 되면 하나님께서 예수 잘 믿는 자기에게 더 좋은 최고의 고상한 것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로구나.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어떤 일을 만들어서 나에게 붙여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나 좋도록 하느라고 그런다 그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안 믿어진다. 그게 불신이다. 그래서 자기의 타락된 요구대로 자꾸 사랑해달라고 한다.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에 감화 감동이 아니면 ‘내가 항상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구나’ 하고 하나님 앞에 늘 감사하는 생각은 안 나온다.
고속도로나 서울시내에 차들이 좀 많으냐? 하루에 차 사고로 죽거나 다치는 일이 몇 건이나 나는지? 차를 타고 다니면 나도 그들 중에 하나로 들어있다. 사고를 앉고 다니는 거다. ‘정말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그런 느낌이 든다. 해가 져서 집에 드러누워야 ‘아, 오늘도 무사했구나’ 하게 된다. 사실 자기에게 언제 어떤 변이 일어날 런지 모른다.
하나님 사랑에는 이웃사랑이 저절로 나온다. 네 이웃이 누구냐? 일반적으로는 이웃집 사람이 이웃이다. 나 외에 다른 사람은 다 이웃이다. 부모자식 간에도 다 이웃이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한다면 진리 안에서 생명 길 좁은 길을 가는 성도가 다 자기 이웃이다. 참 좋은 이웃이다. 예수를 믿어도 세상 안에 사는 자는 예수사랑을 이용만 하려고 하지 자기를 위해주지 않으면 원수같이 여기는 자가 많다.
믿음이 약해도 순종하여 따라가며 성장하는 자와, 자기주장을 고집으로 밀고 나가는 자와는 그 자세가 전혀 다르다. 속에 자기의 깡태기가 들어있으면 그 신앙의 질은 전혀 다르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 믿으면서도 인조사랑을 강하게 가지게 되면 편견적인 사람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되면 평신도는 시험에 잘 빠지게 되고, 인도자의 경우는 교회를 인도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래서 성경대로 하나님의 사랑이 되려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라야 만이 된다. 그래야 이웃사랑도 바로 되어 나온다. 성도끼리도 그렇고, 가족끼리도 그렇고, 집 근처 이웃끼리도 그렇다. 자기부터가 하나님의 아가페에 정확히 맞춰진 사람이 아니면 그게 안 나온다. 그렇게 되면 가족관계가 뭐가 되겠느냐? 인조사랑이 된다. 인조사랑은 전제조건이 자꾸 붙게 된다. 부모와 자식 간인데도 일가친척 간인데도 형제 간인데도 돈 때문에 법정에서 싸우는 걸 보면 이게 사람일까?
자기 것을 다 빼앗기고도 하나님 앞에 감사할 사람이 있느냐? 자기 얼굴이 깎이고도 하나님 앞에 감사할 사람이 있느냐? 자기가 죽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감사할 사람이 있느냐? 우리교회의 OOO집사님의 여동생이 있는데 날 때부터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계속 누워있었는데, 그 분이 이 교훈을 받았는데 자기가 죽으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헌금을 했다. 형제들이 용돈 쓰라고 주는 것을 모았다가 죽을 때 하나님 앞에 몇 십만 원을 감사헌금을 했다. 내 경험상 그런 사람은 없었다.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을 내가 치웠는데 아무리 부자라도 죽으면서 감사헌금을 한 사람은 없었다.
꼭 뭐가 잘 돼야 만이 감사? 천만에다. 물론 잘 되면 감사한 건데, 그러면 뭐가 잘 안 되면 감사가 아니냐? 뭇 되면 못 된 대로 하나님 앞에 받은 게 있는 거고, 잘 되면 잘된 대로 받은 게 있는 거다. 쉽게 말하면 깨달음이다. 잘 됐다는 걸 돈을 많이 번 것으로만 생각을 하는데 그건 불신자라도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고, 사람이 깨달음이 없으면 늘 감사하는 사람이 안 된다. 이렇게 되면 늘 자기의 이해타산으로만 들어가고, 그런 식으로 예수를 믿게 된다.
다른 교회에 가면 사업이 잘 되면 하나님 앞에 감사한다는 말을 한다. 우리는 그 이전에 하나님 앞에 깨닫는 것이 있어야 한다. 이러면 자기 현실을 가만히 진리이치로 생각을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남이 당하지 못하는 사건을 내가 당하고 있다면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서 나를 깨닫게 해 주는구나’ 이렇게 들어간다. 거기서 시험을 쳐서 이겨 나가야 한다. 거기서 넘어지면 어떻게 예수를 믿느냐?
어쨌든 성도들끼리도 일반 틀을 벗어나지 못해서 왜 그렇게 말이 많은지? 교회는 사람이 많다보니 어떤 소리가 빙 돌면 전체에 다 돌아버리게 된다. 왜 그렇게 사느냐? 그게 형제사랑이냐? 싫은 소리를 듣던 좋은 소리를 듣던 들었으면 그것으로 스톱을 하라. 상대방이 사람이 다듬어지지 못해서 이런 저런 소리를 해도 그걸 들은 내 쪽에서는 스톱을 하라. 그걸 또 옮겨서 조잘거리니 이 사람은 참새의 영을 가진 거냐?
사람이 진리를 배우면 다듬어져야 한다. 사람이 사는 데서는 말조심을 해야 한다. 쓸데없는 말, 아무 필요도 없는 말을 해서 빙 돌게 하고 돌게 하고 하면 말이라는 게 점점 보태져서 끝에 가서는 전혀 다른 말이 되고 오해가 된다.
먼저 자기부터 잘 살펴야 한다. 신앙의 근원부터 질이 잘못돼 있으면 자기는 자기를 위한다는 것이 자기 몸을 해치게 된다. 자기의 기분을 좋게 한다면서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깨닫지를 못하고 자기만 위해달라고 한다. 그래서야 쓰겠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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