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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 봉독
구약 전공자가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다른 독서에 비해 복음서 봉독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어쩌면 지금 시대보다 5~6세기 교인들은 더 했던 것 같다. 당시 예배의 전통을 보존하고 있는 정교회에선 복음서를 아예 따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예배에서 사용한다. 거기엔 진귀한 보석이라든지 금은 장식이 화려하게 붙어있고, 이 복음서를 들고 예배 때 행진하기도 한다. 그 정도로 복음서가 귀하다고 본 것이다.
예배 의식이 점차 정착되던 5세기 이후 성서 봉독은 읽는 사람이 따로 정해졌다. 다른 본문은 일반 독서자(Lektor)가 낭독해도 상관없지만, 복음서는 공식적으로 구별된 예배 봉사자(διάκονος)만 가능했다. 한국 개신교회에선 ‘집사’라고 너무 가볍게 부르지만, 디아콘은 교회의 영적 직무를 감당하는 포괄적인 직책을 뜻했다.
예를 들어 디아콘은 말씀과 성찬에서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데, 정교회, 성공회, 가톨릭에선 ‘보제’ 또는 ‘부제’라고 부르고 사제의 직무를 돕는 담당자로 이해한다. 고대 교회 관습에서 거룩한 복음서는 이처럼 구별된 예배 봉사자가 조심스레 받들어 읽었다. 안수받은 사제와 감독/주교가 복음서 봉독을 할 수 있다는 건 동서양 모든 교회에서 동일하다.
복음서 봉독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미 4세기 교회에선 독서대에 올라가기 전 분향을 하거나 성수를 뿌리는 예식도 있었고(각주), 복음서를 읽기 전 촛불을 켜서 복음의 빛을 상징하기도 했다(각주). 이것 말고도 동방교회에선 첫 번째 성서 봉독이 끝나고 복음서 봉독을 하기 위해 예배 봉사자가 복음서를 높이 들고 교회당 안을 한 바퀴 도는 ‘복음서 행진’도 있었다(각주). 6세기 서방 갈리아 계열 예배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복음서를 들고 행진할 때도 있는데, 이때 행진은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으로 이해했다.
지금은 이런 행진을 에큐메니칼 예배에나 가야 한 번 정도 볼 수 있지만, 그런 행진이 사라진 오늘의 전례 예배에선 “알렐루야”와 “주께 영광 돌리세”(Gloria tibi, Domine)라는 복음 환호 찬송이 그 대신 남았다(각주. 각 교회별 비교). 이 짧은 찬송은 온 회중이 그리스도께서 그 자리에 함께 계심을 확신하며 부르는 찬송이다. 복음서 봉독이 끝나면 회중은 “주께 찬양 드리세”라고 감사하며 화답송을 부른다(각주. 각 교회별 비교).
특이한 건, 회중의 자세다. 성서 봉독 때 모두 앉아서 듣는 게 일반적이지만, 아주 이른 시기인 4세기부터 복음서 봉독은 온 회중이 일어나 듣는 걸 원칙으로 삼았다. 복음서 말씀을 듣는 시간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두렵고 경이로운 시간으로 여긴 것이다.
여기에 더해 9세기 서방교회에선 사제가 복음서를 읽기 전 “이것은 ( )가 전하는 거룩한 복음입니다.”라고 말하고, ‘이마-가슴-왼쪽 어깨-오른쪽 어깨’로 이어지는 십자표시를 온 회중이 함께 하기 시작했다(각주. 정교회와 루터교회 비교설명). 이 십자표시는 얼마 안 가 복음서 봉독 직전 사제와 신자들이 성경과 이마와 입술 그리고 가슴에 십자표시를 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천주교회 미사에서 이 모습을 지금도 볼 수 있다.
같은 서방교회 전통인 루터교회에선 고대 전례를 꿀단지처럼 떠받드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이런 식의 십자표시는 거의 사라졌다. 물론 해도 되고 안 해도 상관없지만, 그저 오래되고 멋지게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생각 없이 따라가는 건 문제가 있다. 최소한 그 유래와 의미에 대해선 교회의 역사와 신학에 따라 깊이 돌아봐야 한다.
만일 루터교회에서 집례자와 회중이 십자표시를 하고 있다면, 그건 세례의 기억을 되살리는 행위가 틀림없다. 루터교회에서 세례는 언제나 변함없는 구원의 약속이며 파선한 인간이 되돌아갈 뗏목이고, 십자표시를 통한 세례의 기억은 자기 자신을 넘어 모든 창조세계의 구원을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와 연합하겠다는 신앙고백이다.
성서 봉독의 목적은 의심할 여지 없이 성서의 말씀을 ‘정확히 전하고, 이해시키는 데 있다’. 그래서 봉독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 전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연습한 다음 천천히 정확한 발음으로 읽어야 한다. 간혹 교회를 구원의 방주로 이해하면서 교회 구조를 설명하기도 하는데, 성서 말씀을 읽고 설교하는 암보(Ambo)의 위치는 배의 선장이 키를 잡고 항해하는 조타실에 비유할 수 있다. 그만큼 성서 봉독은 중요하다. 목사의 설교만 중요한 게 아니다!
앞서 봉독의 목적을 “정확히 전하고, 이해시키는 데 있다”는 말을 했다. 여기서 하나 짚어보자. 중세 시대 서방교회에선 민중이 사용하는 대중 언어 대신 사람들이 알아듣지도 못할 라틴어로만 예배가 진행되었는데 왜 그랬을까?
중세 라틴어 문맹률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아서 심지어 라틴어로 미사를 집례해야 할 사제조차 라틴어를 모르고 앵무새마냥 흉내만 내는 일도 비일비재했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상식이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자국어인 독일어 성서를 펴낸 이유가 여기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히 전해지고 이해되고 있는가? 이것이 개혁자의 질문이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동한 것이 종교개혁이다.
그럼 당시 교회 신학자들은 이런 고민을 한 번도 하지 않았을까? 융만(Josef Jungmann) 같은 저명한 가톨릭 학자는 ‘일상 언어와 거기서 멀어진 교회 언어 사이에서 중세 신학자들이 고민했고, 성서의 거룩한 말씀이 훼손되는 걸 두려워하면서 라틴어 성경 보존을 결정했다’고 설명하지만(각주), 역사를 더듬어 보면, 그의 설명이 그리 설득력 있게 들리진 않는다.
5세기 초 히에로니무스가 라틴어로 번역하여 보급한 성경의 이름이 ‘불가타’(Vulgata, 405년)인데, 역설적이게도 그 뜻은 ‘서민’이란 뜻이다. 당시만 해도 헬라어로 기록된 성경을 일반인들이 읽을 수 없어서 만든 ‘서민판’ 성경이다.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 성경이 처음부터 교회에서 권위를 인정받은 건 아니다. 처음에는 교회 안에서 정착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이미 자리 잡고 있던 그리스어 번역본인 칠십인역과 내용도 달랐고 전통적으로 읽어 오던 본문과 다르다고 하여서, 오히려 라틴어 성경의 권위가 도전을 받았다. 실제로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지도자는 불가타 성경이 비잔틴 교회와 라틴 교회를 갈라지게 할 것을 두려워했을 정도였다.
라틴어 성경이 교회에서 유일무이한 권위로 올라선 건 8세기 신성로마제국이 들어서면서부터이다. 샤를마뉴 황제는 자신의 제국이 옛 로마의 명성을 이어받는 적통이 되길 원했고, 제국의 이름뿐 아니라 법과 행정 교육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로마의 색으로 바꾸길 바랐다.
예배도 로마식으로 통일하는데, 당연히 성경도 옛 로마 냄새가 물씬 풍기는 라틴어역본인 불가타가 소환된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 후로 약 7백 년간 라틴어 성경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하나님의 비밀스런 성역으로 옮겨져 라틴어를 모르는 서민들은 그저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가르치는 대로 순종해야 했다.
이 당시 자국어로 성서를 옮긴다는 건 제국에 반기를 드는 것이고, ‘나 죽이세요’라고 말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위클리프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다. 서민판 성경(Vulgata)이 신비화되어 원래 주인인 서민들이 접근할 수 없던 게 중세의 상황이다. 루터의 개혁은 이 비밀의 책에 주인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통로를 튼 사건이다. 그러나 로마가톨릭은 트리엔트 공의회를 거쳐 1570년 라틴어 성서의 권위를 재차 확인하기에 이른다. 종교개혁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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