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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목자

요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267 추천 수 0 2021.09.04 23:5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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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0:11-18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38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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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목자

요 10:11~18, 부활절 넷째 주일, 2021년 4월28일

 

에고 에이미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서에서 보기 힘든 특별한 형식의 문장이 여럿 나옵니다. 그중의 하나가 ‘에고 에이미’(?γ? ε?μι) 문장입니다. 그 뜻은 “나는 … 이다.”입니다. 예를 들어서 요 6:35절에 나오는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는 문장이 그것입니다. 요 10:7절의 “나는 양의 문”이라는 문장이나 요 14:6절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문장도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는 선한 목자라.”(?γ? ε?μι ? ποιμ?ν ? καλ??)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11절과 14절에 반복됩니다.


듣기에 따라서 “나는 선한 목자다.”라는 문장이 어색해 보이기는 합니다. 자기를 스스로 높이는 듯이 들리니까요. 이런 표현은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으로 보는 게 옳습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또는 그리스도로 칭하는 표현이 종종 나오지만 그런 표현도 예수님이 직접 발설하신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서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눅 7:19)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그래, 내가 바로 메시야다.”라고 대답하지 않으시고, 메시야의 일을 증언하셨습니다. 마 16:13~20(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따르면 예수님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인정하셨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선한 목자”라는 신앙고백이 무슨 뜻인지를 따라감으로써 요한복음 기자의 신앙을 배우려고 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람을 비롯한 당시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 대부분은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적 전통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 전통을 배척하면 기독교 신앙이 성립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적 전통에는 하나님을 목자로 보는 견해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유목민으로 살았기에 목자와 양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설명한 것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앞에서 ‘성시교독’으로 읽은 시편 23편이 그런 자료 중의 하나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짧은 시편입니다. 마지막 6절은 이렇습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이스라엘 백성은 힘든 세월 가운데서도 목자이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이런 전통 가운데서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이 바로 구약이 말하는 선한 목자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현대인에게 이런 목자 개념이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오해되는 이유는 자신들의 실존이 양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온순하거나 의존적으로 보이는 게 싫다는 겁니다. 자기의 분명한 주관을 세우고 기세등등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인간 삶을 수동적으로 만든다는 비판은 지난 역사에서 많이 발생했습니다. 인간의 생명력을 약화하는 반(反)생명적인 종교라고 말입니다. 그건 오해입니다. 아무런 판단 능력도 없이 의존적으로, 일종의 노예 심리에 물들어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목자와 양이라는 표현은 목자를 향한 양의 전적인 신뢰를 강조하는 개념입니다. 여기서 목자를 절대 생명이라고 바꿔서 생각해도 됩니다. 돈이 아니라 절대 생명만 신뢰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생명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기쁨과 해방과 안식이 충만하다는 뜻입니다. 이런 삶의 태도는 주변의 다른 말에 솔깃해하지 않기에 실제로는 가장 강력합니다.

 

11절- 목숨을 버리는 목자

예수님이 선한 목자인 근거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고 에이미” 문장을 중심으로 볼 때 두 가지입니다. 먼저 11절입니다.

 

에고 에이미 호 포이멘 호 칼로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선한 목자는 자신의 양이 늑대나 이리의 공격을 받을 때 자기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이런 일들이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종종 일어났습니다. 개들이 있으면 도움이 되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도움을 받기도 힘들었을 겁니다. 목자 중에는 삯꾼이 있습니다. 그는 고용된 사람입니다. 그의 관심은 양이 아니라 돈입니다. 그는 기계적으로 양을 돌보기에 양이 위험에 빠졌을 때 자기 목숨을 걸고 양을 구해내지는 않습니다.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의 죽음이 우리의 운명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요즘 젊고 지성적인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도 이런 데에 있습니다. 자신들이 노력해서 좋은 직업을 얻었고, 집도 장만해서 재미있게 꾸려가는 자기들 인생에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끼어들 틈이 전혀 없는 겁니다. 지금 예배드리고 설교를 듣는 여러분은 예수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목숨을 버렸다는 말이 실감 납니까? 그래서 그걸 생각할 때마다 고맙고 감격스럽습니까? 아니면 남의 일입니까? 이 문제를 실감하려면 우리는 2천 년 전 그 당시에 일어났던 사건을 오늘 우리의 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미 잘 알고 있는 기독교 교리의 초보를 잠시 설명하는 걸 이해해주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정도로 하나님과 일치된 분이었습니다. 기독교 전통은 예수님이 출생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보았습니다. 여러 아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아들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형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 4:6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어떤 사람을, 연인이라고 해도 좋고 친구라고 해도 좋고 사제 간이라 해도 좋은데, 진심으로 사랑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 사람을 통해서 사랑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의 예수 경험은 이런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랑 경험의 극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신적인 사랑과 생명의 능력을 예수님에게서 경험한 겁니다.


예수님은 삼십 대 초반의 나이로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제자들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만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지점은 다음입니다. 그를 배척하고 죽게 한 이들은 유대교 산헤드린 의원과 예루살렘 주민들과 빌라도 로마 총독과 그 총독의 명령에 따라서 십자가형을 집행한 로마 군인들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세상을 삽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진리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희생양을 찾습니다. 때로는 악을 꾸미고 모함하고, 죄가 없는 이의 고난과 죽음을 외면합니다. 여기서 자신은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의 죽음에 우리 모두 직간접으로 연루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인식하고 인정할 때만 예수가 선한 목자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14절- 양을 아는 목자

예수님이 선한 목자인 두 번째 근거는 14, 15a절입니다. 첫 번째 근거보다 이 두 번째 근거가 더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에고 에이미 호 포이멘 호 칼로스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

 

양을 안다고 할 때의 그 단어 “안다”는 헬라어 “기노스코”의 번역입니다. 기노스코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단순하게 그 사람이 누군지 알거나, 세상에 대한 지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특별한 경우에는 성적인 관계를 포함합니다. 상대방을 아주 깊이 안다는 뜻입니다. 목자가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깊이 알듯이 예수님은 제자들의 중심을 알고 계셨습니다.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말을 듣고도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제자들 자신도 자기가 누군지를, 즉 자기 정체를 몰랐던 겁니다. 바꿔말해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가 누군지를, 즉 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대목에서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양이 목자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려면 목자가 누군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가 깊어지려면 서로가 깊이 알아야 하듯이 기독교 신앙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필수입니다. 안다는 말은 여기서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실제로 예수님이 누군지를 신학적으로 깊이 있게 안다는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친구처럼 가깝게 느끼는 차원입니다. 이 두 차원은 구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습니다. 그런 신학적인 앎이 없으면 기독교 신앙이 건강해질 수 없습니다.


간혹 기독교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관심이 크지 않고 교회 활동에만 관심이 큰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와의 관계는 깊어지지 않고 자기의 종교적 열정만 왕성해집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지만 예수님 자체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습니다. 그런 신앙생활이 습관이 되면 결국은 신앙의 공백 상태에 떨어집니다. 평생 목사와 장로로 살아도 영적으로는 메말라갑니다. 예수를 깊이 알려면 신학 공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일반 신자들이 신학을 공부하기는 물론 쉽지 않습니다. 신학 공부가 어렵기도 하고, 더 핵심적으로는 신학적인 문제는 몰라도 신앙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C.S. 루이스는 소위 평신도인데도 신학자 못지않게 신학적인 내공이 깊습니다. 우리가 루이스처럼 될 수는 없어도 그 방향이 옳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어야겠지요.


여기서 양이 목자를 안다는 말은 본격적인 신학 공부만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에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거기에 온전히 집중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출가 수도사들입니다. 아주 가까운 친구나 도반처럼 관계를 맺는 겁니다. 우리는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지 못하나 기본적으로 그 수도사들의 영성은 따르는 게 옳습니다. 일종의 재가 수도사처럼 사는 겁니다. 수도사 영성은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일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입니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로 일희일비하지 않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깊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게 저절로 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를 아는 깊이만큼 우리는 그 하나님의 통치를, 즉 생명의 능력과 신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바로 그런 앎의 과정입니다. 그런 앎의 과정을 기쁘게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분을 통해서 제시해준 생명의 길이 보일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를 선한 목자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을 원하지 않으세요?

 

“선한” 목자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한” 목자(호 포이멘 호 칼로스)라고 표현했습니다. 삯꾼 목자가 아니라 선한 목자입니다. 선하다는 말을 착하다는 뜻인가, 하고 대수롭잖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선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한 후에 나온 말과 통합니다. 창 1:12b절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입니다. 19절, 21절, 25절에도 나옵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뒤에는 한층 강조된 표현이 나옵니다. 31절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우리는 심히 좋다거나 선하다는 말을 주로 자신에게 유익한지 아닌지만을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자신에게 무엇이 유익한 일인지를 근본적으로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창조 세계를 보십시오. 지구 안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의 유익이 충돌할 때가 많습니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자가 어린 사슴을 잡지 못하면 사자의 새끼들은 위험합니다. 인간 세계도 비슷합니다. 코로나19 감염증으로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고 있으나 오히려 돈을 버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의학도 발전합니다. 제가 너무 극단적인 예를 들었습니다만, 여기서 핵심은 자신에게 유익하다는 판단을 내리기에 우리의 인식능력은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우리의 인식을 초월한다는 뜻입니다.


거시 세계만이 아니라 우리 개인의 좁은 인생살이에서도 무엇이 우리에게 선한지를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한 청년이 대학입시에 실패했다고 합시다. 또는 크게 아팠거나 실연을 당했다고 합시다.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를 맞았다고 해도 좋습니다. 이런 일들은 다 유익하지 않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오히려 그 청년을 정신적으로 더 성숙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거꾸로 모든 일이 잘 풀린 청년이 있다고 합시다. 그 청년이 세상에서 성공하기는 했으나 자기중심적인 인간이 되었다면 선한 일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오히려 그에게 나쁜 것입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한자성어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한 목자라는 말은 그가 우리에게 생명을 준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구절인 요 10:10b절에서 요한복음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생명을 풍성히 얻는다는 말도 눈에 보이는 건 아닙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과 우리 기독교인의 삶이 크게 달라 보이지도 않습니다. 비슷한 일로 힘들어하고 비슷한 일로 즐거워합니다. 부부 사이도 그렇습니다. 자기 남편은, 혹은 자기 아내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생명을 풍성히 누리는 사람 같다고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이나 별로 다른 점이 없다거나, 더 못하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사람들이니 그런 일로 너무 실망하지는 마십시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생명의 본질이 아닌 일에 치우쳐 산다는 데에 있습니다. 생명의 본질이 아닌 일은 한 마디로, 자기를 높이는 것입니다. 요즘 용어로 성취 욕망입니다. 이에 대한 불안감이 우리 삶을 옥죄고 있습니다. 자기 성취 외에 인생의 다른 의미가 있냐, 하고 질문할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여러분, 피조물인 우리 인생에는 자기 성취라는 단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생명의 주인은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아닌데도 주인 행세를 하려다 보니 온갖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아가면서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다음의 한 가지 사실만은 잊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만이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풍성하게 허락해주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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