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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사랑 안에!

요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308 추천 수 0 2021.09.04 23:5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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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5:9-17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38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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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사랑 안에!

요 15:9~17, 부활절 여섯째 주일, 2021년 5월9일

 

오늘 설교 본문인 요 15:9~17절은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납니다. “사랑”은 그 앞장인 14장에도 비슷한 내용으로 언급되었습니다. 요 14:15절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라는 문장이 나오고, 21절에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본문이 말하는 사랑은 무엇일까요? 이런 단어는 너무 자주 들어서 더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첫 구절과 둘째 구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진수가 담겨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이 구절을 조금 풀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9절- 아버지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베풀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원하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10절-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또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렀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 말씀을 지킴으로써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 따르면 하나님과 제자들 사이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중재하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교회 밖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교회 안의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을 절실하게 경험하지 못합니다. 거칠게 표현하면, 돈 사랑을 최우선으로 여기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에 큰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하나님 사랑과 예수님 사랑 안에 깊이 들어가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세상에서 존경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지 질문해보십시오. 부부나 부모와 자식, 교우들의 대화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돌아봐도 됩니다. 그걸 주제로 대화하고 싶어도 그것에 관해서 말할 내용이 여러분의 삶에서 많지 않다는 걸 평소에 느낄 겁니다. 그게 세속 사회에서 사는 우리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는 합니다.


여러분에게 하나의 팁(tip)을 드립니다. 예배 후에 가족이나 교우들끼리 설교를 주제로 짧게나마 생각을 나누는 겁니다. 우리 교회 몇몇 청년들은 모임이 있을 때 종종 그런 주제로 대화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서 <다락방>을 매일 읽거나 그걸 주제로 가족끼리 대화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갈 수 있는 분들은 ‘대구성서아카데미’에 올라오는 몰트만의 <나는 영생을 믿는다> 강독이나 <누가복음 톺아읽기> 강독을 듣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전문적인 신학책을 읽는다면 더 좋겠으나, 그런 일에 시간과 마음을 쏟기는 어려울 겁니다.

 

사랑의 존재론적 능력

요 15:9절과 10절에는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라는 문장이 반복됩니다. 예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는 당연히 그의 사랑이 우리를 살리는 참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사랑은 우리에게 호흡과 같기에 예수님의 사랑에 결속되지 않으면 죽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말이 종교의 억지스러운 도그마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예수 믿지 않아도 세상에서 얼마든지 재미있고 나름으로 의미 있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사랑이 우리를 살리는 참된 능력이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생명에 여러 차원이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동네 아이들이 친구와 재미있게 노는 데서만 삶의 재미를 느끼는 사람은 박물관과 미술관과 연주회장을 지루하게 여길 겁니다. 동네에서 바둑 실력을 뽐내는 어떤 동호인이 있다고 합시다. 자기 수준에서 골목대장 노릇은 할 수 있으나 바둑 세계의 정점에 도달한 프로 9단의 세계를 그는 따라가지 못합니다.


요즘 저는 『아인슈타인이 괴델과 함께 걸을 때』를 쓴 짐 홀트의 다른 책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를 읽는 중입니다. 최근에 물리학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읽었습니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이 쓴 『한스 큉, 과학을 말하다』를 녹화 파일로 만들어 유튜브에 올릴 계획입니다. 그런 물리학이나 생물학, 그리고 과학철학과 자연신학에 관한 책을 읽다 보면 제가 그 세계에서 얼마나 미숙한 사람인지를 깨닫습니다. 이처럼 예수 사랑 안에 머물라는 요한복음 기자의 진술은 우리가 그 세계를 몰라서 그렇지 알기만 하면 제가 자연과학 저서에서 세상의 새로운 차원을 경험하듯이, 우리에게 생명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줄 것입니다.


예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할 이유를 본문에 근거하여 조금 더 살피면 다음과 같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가 제자들을 사랑했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를 사랑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는 구분되기는 하나 분리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경험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경험되어 그가 그 안에 머문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그 사랑에 영적인 공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의 교회 생활과 인생살이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이라는 무늬만 남지 실질적인 내용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경험’을 알려면 하나님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워가는 게 최선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대표적인 이야기는 소위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의 비유가 실린 눅 15에는 잃은 양의 비유와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가 함께 실려있습니다. 소외된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키는 비유들입니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작은아들은 미리 받은 유산을 들고 멀리 떠나서 제멋대로 살다가 완전히 망했습니다. 오갈 데가 없었습니다. 돼지 농장에서 돼지 먹이로 허기를 면했습니다. 인생의 막장에서 아버지를 생각하고 고향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둘째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지 몰골로 돌아온 둘째 아들을 극진하게 환대했습니다. 아버지 곁에서 성실하게 아들 역할을 감당하던 큰아들은 아버지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유대인들의 하나님은 둘째에게 따끔한 벌을 주고 큰아들에게 상을 베풀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표상은 전통적인 유대교 표상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경험한 하나님은 사람을 율법 패러다임에서 판단하지 않고 존재론적인 패러다임 안으로 끌어들이는 분이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가장 가까운 세상에서의 사랑은 부모의 사랑일 겁니다. 부모의 사랑은 대부분 일방적입니다. 특히 어머니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도 하나님 사랑을 다 보여줄 수 없습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사랑을 온전하게 실천할 능력이 사람에게는 근본적으로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서 자식이 학교에 가기 싫어하면 억지로라도 보내는 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어떤 때는 위협을 해서라도 좋은 성적을 올리게 만듭니다. 자기가 낳은 자식이라고 해도 그의 인격과 영혼을 모르기에 부모의 사랑에는 종종 시행착오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사랑의 본질을 오해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기희생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자식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내가 너를 위해서 얼마나 희생적으로 살았는지 아느냐?” 하는 말입니다. 고전 13:3절에는 정곡을 찌르는 말이 나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희생과 사랑이 일치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환대

탕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돌아갈 수 있는 고향 집의 아버지와 같습니다. 고향 집에서 아들과 딸로 극진한 환대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환대받는다는 말을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무에서(ex nihilo) 유로 창조하셨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창조주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 안에 들어가도록 허락받는다는 뜻입니다. 그 창조 능력은 세상에 가득합니다. 빛이 지구에 골고루 비춥니다. 비도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내립니다.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나무와 새를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사람은 두 손을 흔들면서 두 다리로 춤추듯이 걸을 수 있으며, 죽음이 가까이 온다는 사실도 인식하면서 삽니다. 이 세상에 가득한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를 경험한 사람은 세상에서 아쉬울 게 없고, 따라서 두려울 게 없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가난과 늙음과 고독을 두려워합니다. 가난한 독거노인을 가장 불행하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외로워야만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이 듣고, 더 깊이 느낄 수 있는 어떤 세계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어떤 인생의 나락이라고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창조의 아들과 딸로 극진하게 환대받을 수 있는 영적인 고향 집에서 아버지가, 또는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말이 창조의 아들과 딸이지 실제로 어렵게 사는 사람들은 이런 말에 위로받지 못한다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소상공인들이 생업에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가게를 닫는 사람도 많고, 빚이 많이 늘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으로 해체된 가정은 또 왜 없겠습니까. 이런 현실 앞에서 저는 두 가지를 말씀드려야겠습니다. 하나는 사회적인 차원입니다. 극심한 어려움에 떨어진 이들이 최소한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사회가 도와야 합니다. 일종의 사회 복지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 재정이나 지방정부 재정을 이런 일에 투자해야겠지요. 이를 위해서는 국가 공무원이나 지방 공무원이 일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는 정치가 중요합니다. 나락에 떨어진 사람이 버텨낼 수 있거나, 나락에 떨어지지 않도록 미리 준비하는 일이 바로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나오는 “서로 사랑하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회 구조적인 접근만으로는 이런 문제를 다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삶의 조건이 좋아져도 두려워하는 사람은 계속 두려워하고, 비관하는 사람은 계속 삶을 비관합니다. 삶의 허무와 무의미를 사회적인 조건만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자란 시절에 비해서 오늘날은 수십 배 잘살게 되었는데도 오늘의 젊은이들이 저의 젊은 시절보다 더 행복한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핵심은 개인의 영적인 차원입니다. 그 영적인 차원에 빛이 비쳐야만 나락에 떨어져도 하나님의 창조 능력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


그 개인의 영적인 차원을 우리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찾은 사람들입니다.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라는 말씀이 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온 생명의 참된 능력입니다. 그 생명의 능력은 어떤 경우에서도 손상되지 않습니다. 그 어떤 경우를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보았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더 밑으로 내려갈 수 없는 인생의 끝자락입니다. 인생이 끝장나는 운명입니다. 죽음이라는 사실 자체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받는 모멸과 냉소가 십자가에 달린 자를 파멸시킵니다. 예수님은 종교적인 신성모독자로 찍혔고, 정치적으로도 세상 질서를 불안하게 만드는 폭력분자로 내몰렸습니다. 그는 절망의 끝자락에서 결국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매장되었습니다. 여기 예배를 드리는 분 중에서 자신의 인생이 십자가에 달린 30대 초반 한 유대인 남자의 운명보다 더 불행하다고 말할 수 있는 분은 없을 겁니다.

 

예수의 기쁨, 너희 기쁨

바로 그 예수가 제자들에게 “내 사랑 안에” 머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오늘 본문 11절에서 예수님은 정말 놀라운 말씀을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하셨습니다. 십자가 운명에 떨어진 사람에게는 나올 수 없는 말씀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놀라운 표현입니다. “내 기쁨”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를 기쁘게 만들었고, 예수의 기쁨은 제자들의 기쁨을 완전하게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던 당시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부럽지 않으세요? 저는 부럽습니다. 기쁨의 충만은 어두운 방에 작은 창문으로 빛이 들어와서 환해지듯이 생명의 비밀이라는 빛을 경험했을 때 주어집니다. 그 빛이 곧 부활입니다. 예수를 생명의 근원으로 경험한 제자들은 자기들 스승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울분에 떨어져서 원수 갚는 일에 매달리지 않고 생명의 환희를 노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기쁨을 여러분은 일상에서 경험해보셨나요?


세상이 뒤죽박죽 형편없이 돌아가는데 무슨 생명의 환희와 기쁨을 말하나, 하고 속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는 세상만사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대하고 혼자만이라도 즐겁게 살면 된다는 말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저는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십자가 운명에 떨어진 예수가 “내 기쁨”을 말했다는 사실을 짚는 것으로 만족해야겠습니다. 그의 기쁨은 탕자가 아버지에게 받아들여졌을 때 느낀 기쁨입니다. 그것은 깊은 나락의 자리에서도 환대해주는 대상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기쁨입니다. 그 사람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걱정하지 않습니다. 죽어서 내 육체가 원소로 해체되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도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처형과 같은 원통한 일을 당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뻐한다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노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설교도 저를 위한 것이어서 설교를 마치고 나니 영혼의 위로를 받았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종교 이념으로가 아니라 내 삶의 내용으로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저의 남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을 살다 보면 “서로 사랑하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저의 실제 삶에서 현실로 자리를 잡지 않겠습니까. 오늘 성경 말씀에서 받은 저의 감동이 성령의 도움으로 여러분에게 조금이라도 전달되었으면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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