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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0:33-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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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0장 33절-37절: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무시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솔로몬 이후에 남조 유다 두 지파와 북조 이스라엘 열 지파로 나누어졌고, 남조 유다 두 지파가 더 힘을 얻고 있었는데, 북조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 함으로 앗수르의 정복에 의해서 북조 이스라엘 남자들은 이방나라에 포로로 끌려가서 그곳에 심겨지고, 이방나라의 남자들을 포로로 잡아와서 이스라엘에 풀어놓으니 혼혈족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조 유다 사람들은 북조 이스라엘 사람들을 신앙정조를 안 지켰다고 해서 개처럼 여겼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은 또 나사렛 예수님을 이단시 했다. 그러니 당시에 그들의 세력이 얼마나 컸던가?
우리가 그 이치를 잘 알아야 한다. 세상정신을 가지고 예수를 믿으면 자기 속에서 나오는 신앙정신이 하나님 앞에 옳고 정확한 것으로 나오지 않고 혼혈이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보면 믿는 사람 같고, 어떻게 보면 안 믿는 사람 같고. 그리고 자녀의 신앙도 혼혈이 된다. 명확하지 못하고 정확하지 못하고 혼혈이 된다. 그러니까 교회에 나올 때는 믿는 사람 같은데 말하는 걸 들어보면 안 믿는 사람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집에서 얼마나 골치가 아플까?
예수 믿는 집에서 그런 일이 많다. 자식에게 교회에 가자고 해도 딴 데로 새고, 세례까지 받았고 집사직까지 받고 있으면서 세상으로 나간다. 그게 혼혈이다. 신앙정신 면에 혼혈이 온 거다. 신앙이 정확하게 안 심어진 것이다. 성경의 역사가 증거하는 것을 신앙 면으로 끌어다가 자기에게 정답을 내려야 한다.
과거에 몰라서 그런 것은 좀 적게 맞지만 이제 알았으니 바로 잡지 못하면 크게 얻어맞는다. 성경에 있지 않느냐? ‘알지 못하고 죄를 범한 자는 적게 맞을 것이요 주인의 뜻을 알고도 죄를 범하면 크게 맞는다.’ 그런데 성경도 안 보지, 그러니 목사님의 설교가 자기에게 공갈처럼 들린다. 먹고 살만하고 안 아프면 마냥 세상으로 나간다.
본문으로 들어가서 사마리아 사람이 인생여행을 하던 중에, 사람이 출생을 해서 죽음의 선을 넘어가기까지 가면서 사는 그게 인생여행이다. 인생은 여행을 하는 거다. 나그네다. 나그네는 ‘어디에 정착해서 영원히 살리라’ 하는 것은 없다. 나그네는 떠난다. 안 떠날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이 사마리아 사람이 인생여행을 하던 중에 강도를 만난 자를 불쌍히 여겼다.
그런데 이룰구원의 입장에서 보면 본인들은 다 부자고 잘 살고 부러울 것 없이 산다고 하는 거지만 영의 눈을 가지고 그 사람을 보면 ‘아, 이 사람은 강도를 맞고 있구나’ 하는 게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살면 ‘아, 이건 필연 강도를 만나게 돼 있다’ 하는 게 있다. 강도를 만나면 피해가 막심하다.
자기의 몸 관리를 안 하면 강도를 만나게 돼 있다. 자기 몸이 아프면 의사에게 돈을 들고 가야 한다. 또 생활면에 정신이 잘못 들어있으면 생활면에 경제면에 강도를 맞게 돼 있다. 예수 믿는 면에 하나님의 지혜지식적으로 정확하게 성장을 하지 못하면 자기는 세상에 계획을 놓고 성공률을 놓고 하겠지만 이거는 통째로 강도를 만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정신이 자기 속에 들어와서 그 정신을 주격으로 살면 하나님의 성품으로 자라는 참 자기는 깡그리 도둑을 맞는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걸 아느냐? 이걸 모르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도 안다는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이다. 모르고 살면 계속 당하는 것이다. 밥이 입에 들어가니까 ‘사는가보다’ 하지만 아니다.
학생이 공부를 안 하면 공부의 실력을 다 도둑맞는다. 나쁜 친구를 사귀면 공부의 실력을 다 도둑을 맞는다. 자기 실력을 다 도둑맞으면 나중에 어떻게 되느냐? 그 시간에 배우면 아는 것으로 차여질 자기인데 아는 것으로 들어가지를 않으니 모르는 것이다. 알았는데 잊는 게 아니라 그냥 모르는 거다. 이런 이치를 일반적으로도 무시하고 산다면 그 사람은 밥 먹을 가치가 없다. 인생 살 가치가 없다. 짐승이다.
우리가 사마리아 사람이 되려면 출생을 해서 죽음의 선을 넘어가기까지 자타가 강도를 만난 사람인지, 안 만난 사람인지 잘 볼 줄 알아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성령이 눈을 가져야 한다. 도둑을 맞고 있으면 도둑을 안 맞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도둑이나 강도가 자기 집의 패물이나 가져가고 살림살이나 가져갔다면 정신이 번쩍 드는데 ‘당신, 신앙 믿음에 도둑 다 맞았다’ 하면 이건 눈에 안 보이는 것이라서 느끼지를 못한다. 그러니 얼마나 무디냐? 그러면 이런 사람이 자랑하는 게 뭐냐? 결국 밥 많이 먹고 나이 먹은 것 자랑밖에 없다.
세상에서는 나이 많이 먹고 배운 게 많다면 ‘아, 배운 사람이구나’ 하는데 나이를 아무리 많이 먹고 부자로 살아도 사람이 못 돼 먹으면 ‘저 사람 헛 나이 먹었다. 무식하다. 사람이 아니구나’ 한다. 이러면 그 사람의 인격이 어떻게 되겠느냐?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사람이 인격에 모독을 당하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인격의 모독을 모른다면 그 사람은 얼굴에 철판을 깐 거고 철면피다. 우리는 강도 만난 사람을 잘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강도를 만난 건지, 안 만난 건지를 잘 알아야 한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간호를 하고 이튿날 주인을 만나 돈을 주면서 ‘돈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아주겠다’ 하고 길을 갔다. 사실 지금 바리새교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 이 사마리아인을 등용시킨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면 아픈 사람을 보고 병원까지 데려다 주는 것도 참 고마운 일인데 치료비까지 준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다. 이런 사람은 쉽게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요즘은 사람을 차로 치고서 뺑소니를 치는 사람도 많다.
성경에 보면 사람의 마음이 정말 요사스럽다.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동안 있으면서 일을 했는데 외삼촌이 악한 사람인지 자꾸 야곱을 속였던 모양이다. 어떻게 보면 야곱이 형을 속였던 것처럼 야곱 역시 당하고 당하고 당하는구나. 우리가 그런 걸 볼 줄 알아야 하고, 그리고 회개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야곱이 삼촌 집에서 나오면서 ‘나 갑니다’ 하고 나왔느냐? 몰래 살짝 도망을 나왔다. 삼촌이 도망간 야곱의 뒤를 칠일 길을 찾아서 따라왔다. 칠일 동안 따라붙느라고 밥솥을 들고 갈 거고, 쌀을 들고 갈 거고, 수행원들도 얼마나 많이 따라 붙었겠느냐?
야곱을 만나서 하는 말이 있었는데, 그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라반에게 ‘야곱에게 손끝도 하나 대지 말아라’ 했다. 그러나 이것을 야곱은 모른다. 그리고 라반은 야곱이 그걸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야곱을 만난 삼촌의 말인즉 ‘네가 왜 이랬느냐? 간다고 하면 풍악을 울리고 대대적으로 환송을 해서 보낼 텐데’ 했다.
그러면 삼촌이 정말 그렇게 했겠느냐? 아니다. 벌써 야곱을 찾아 떠날 때에는 야곱을 처치할 마음을 가지고 떠난 거다. 하나님께서는 라반의 그 마음을 아시고 ‘선악 간에 손끝도 대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라반은 야곱에게 와서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에게는 너를 어떻게든 할 권이 있다’고 한다. 앞뒤로 보면 라반의 말이 완전히 거짓이라고 하는 게 우리가 들을 때도 드러난다.
이걸 가만히 보면 사람의 마음이 정말 요사스럽다. 사람에게는 그런 게 다 있을 수 있다. 순간적으로 삭삭 하는 거, 그러면서 안 그런 척 하는 것도 있고. 하나님께서 성경에 마귀를 말을 안 해 놨으면 사람의 마음속에 그런 게 들어있는 것을 모를 거다. 마귀의 심보를 보니 사람 속에 든 마귀의 심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천국을 말하고, 천국의 사람, 성장성, 세상은 불타지고 없어지니 없어질 때까지 네가 살아있는 동안까지 사람이 만들어지는, 지혜지식성적으로나 도덕성적으로나 능력성적으로나 사람이 여물어지는 면으로 모든 세상을 활용하고 이용하고 사용하는 것을 가르친다. 이게 인간창조의 목적이다. 그런데 이게 아닌 교회에서 소원 목적적으로 세상을 목적하고 가르치고 있다면 이것은 영적인 면으로 보면 성도들이 강도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자라고 성장하고 열매를 맺는데, 일반적인 눈으로 보면 사람이 성장하고 열매 맺는 게 뭐냐? 모든 것은 다 성장하고 후손을 남기고 후대를 남기고 세상 끝 날까지 계속 간다. 그러면 일반적인 눈을 가지고 세상 사람을 볼 때 뭐가 열매냐? 쉽게 말해서 우리 모두 각자 자기에게 ‘내 열매가 뭔가?’ 하고 자문자답해 봐라. 열매는 뭐냐?
자식이 많다면 그건 눈에 보이는 열매다. 그런데 이 열매도 단단히 여문 쓸 만한 열매가 없고, 머리에 벌레가 파먹어서 세상으로 나가고, 경찰서에도 가고, 부모 애 먹이고, 사회에 공헌도 없고 하면 그게 열매냐? 그게 사람이냐? 이걸 식물처럼 말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속이나 두뇌 속에는 오만 잡벌레가 다 들어있는 거다.
사람이 돼지의 간이나 소의 간을 날것을 먹으면 거기에 있던 벌레가 어디로 들어가느냐? 사람의 머리로 들어가면 죽는다고 난리가 난다. 사람의 뇌를 건드려 놓으면 바보가 되거나 식물인간이 된다. 안 그런다고 장담할 수 있느냐? 사람이 머리에 세상정신이 가득 들어있다면 그 정신이 어디를 가서 무엇인들 안 먹겠느냐? 그 정신에 의해서 네가 그렇게 된 것이니 네 탓이다.
예수 믿는 것은 깨달음으로 이해타산 가치판단 평가를 해서 자기가 하나님의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머리를 가지면 아무렴 하나님의 두뇌를 벌레가 파먹겠느냐? 이치를 알아야 한다.
교회에 가서 찬송이나 부르고 헌금이나 하는 게 예수 믿는 것으로 착각을 하지 말아라.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교회공부는 일반세상에서 하는 대학원 박사과정 그 이상이다. 아무리 학박사라도 사람이 안 된 사람이 많다. 세상공부는 많이 했지만 사람을 모른다. 사람공부를 못했다. 돈 벌 공부만 했지 자기 인생 공부를 못 했다.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자기의 영인성장 면을 죽이는 게 있다. 우리가 신앙의 이치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 일반적인 이치를 가지고 오는 건데, 눈에 보이는 육신도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면 어떤 현상이 오느냐? 병원의사나 한약사가 딴 게 아니다. 그 사람의 몸에 뭐가 없어지면 뭐가 어떻게 되고 하는 걸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들이다. 이건 우리의 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우리에게 좋은 깨달음을 주는 거다.
본인이 병을 앓을 때 뭐가 부족해서 병이 오는지를 모르지만 그런 면에 집중적으로 공부를 한 사람은 안다. 그러니 그들에게 의뢰할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런 것처럼 예수 믿으면서 성경을 보고 깨닫는 면에서 알지를 못하면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신 분들에게 물어야 하는 것이다. 이건 영적인 일인데 이 영적인 일은 육신보다도 더 중요하다.
자기는 영과 육의 결합체다. 인간 자기에게는 보이는 몸속에 마음이 들어있고, 이 마음을 운전하는 영이 있다. 그래서 생각도 임시적인 눈으로 보고 현실적인 것을 생각하는 게 있고, 눈에 안 보이는 세상에 있는 미래적인 면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건 둘 다 육적이고 세상적인 것이다. 그 다음에 세상을 탈출해서 세상이 아닌 영계 쪽으로 생각하는 미래가 있다. 이걸 모르면 어리석다. 그만큼 모르는 거다.
어린아이는 눈에 보이는 것만 시인을 하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시인을 못한다. 그런 것처럼 예수 믿는 어른인 자기가 영적인 세계가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하나님을 부정할 것이냐? 네 몸을 누가 만들었느냐? 네 목숨을 누가 거둬 가느냐? 네가 이걸 부정할 수 있느냐?
교회에서 세상 육적인, 비진리적인, 옛사람 부패성적인, 마귀적인 가르침이면, 쉽게 말해서 ‘예수 믿어 세상에서 부자 되고 명예 영광을 얻고’ 하는 가르침이라면 그것은 뱀의, 마귀의 수법에 빠진 것이다. 이런 곳에서는 세상 눈에 보이는 것을 목적하고 믿으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은 발에 밟는 거다. 세상은 밟는 것이다. 즉 우리의 구원에 이용물이요 활용물이요 사용물이다. 그런데 물질을, 돈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면으로 이용 활용을 못한다면 너는 물질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목적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물질을 자꾸 저축하는 것이다. 그러면 네가 죽으면 그걸 누가 가지고 가느냐?
교회에서는 세상 물질부자가 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곳이 아니다. 그건 안 가르쳐 줘도 사람이 바로 되면 얼마든지 살아나갈 수가 있다. 사람이 못 돼 먹었는데, 사람이 성품적으로 세상화 돼 있는데 그런 사람이 예수를 잘 믿어지겠느냐? 그렇게 예수 믿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그런 것을 가르치는 것은 거짓 종들, 마귀의 종들이라고 한다.
성경에 보면 세상 소원 목적적으로 살게 만드는 것은 선악과를 먹이는 사람이다. 먹지 말라는 것을 먹이는 것이다. ‘먹는다’고 할 때 사람이 물질을 먹는 것만 생각을 하지 말아라. 정신으로 먹는 것도 있고, 소원 목적적으로 먹는 것도 있다. 그런 정신을 먹는 것은 선악과를 먹는 것이니 그것을 먹으며 모든 활동성 명예 영광성 존귀 영광이라 해도 전부는 사망이다.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은 없다. 전부는 심판으로 끝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도둑이 도둑질을 해서 잘 먹고 비행기를 타고 다녀도 그렇게 산 모든 것은 죄냐, 영광이고 행복이냐? 전부는 죄다. 법이 와서 자기를 죄인으로 잡아간다. 심판으로 끝나는 것이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사람을 영원히 살리는 분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이 분을 따르면 성경 깨달음에서 죽었던 인간을 참 사람으로 살리고, 자기가 발견하지 못하고 없는 것이 자꾸 생산이 되고 자라난다. 이게 성경이요, 이게 예수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생명과를 먹어라. 선악과는 먹지 말아라. 선악과를 먹으면 네가 죽는다’ 라고 하신다. 그래서 설교도 생명과를 먹이는 설교가 있고, 선악과를 먹이는 설교가 있다. 죽은 지식을 먹이는 설교가 있고, 살리는 지식을 먹이는 설교가 있다. 세상 소원 목적을 먹이는 설교가 있고, 천국의 소원 목적을 먹이는 설교가 있다. 하나님의 명령은 ‘생명과를 따먹어라’ 하시는데 사단, 마귀, 뱀, 거짓 종, 이단자들은 ‘선악과를 따먹어라’이다. 정 반대이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것은 그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이 세상 쪽으로 내려가는 것이니 이거는 필연적으로 강도를 만나거나 강도가 된다. 그렇게 되면 신앙 믿음은 죽는 것이다. 교회에서 설교가 세상 목적으로 주고 있다면 이는 교인들을 저주받은 여리고로 끌고 내려가는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은 하나님과 평화, 의사단일, 하나님의 성품으로 의사단일이다. 이건 진리로 보호되고 하나님의 역사로 보호가 된다.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난 자에게 물질도 쓰고 돈도 쓰고 시간도 쓰고 활동도 노력도 재산도 다 썼다. 그만큼 지체하는 동안에 시간 활동 물질을 다 썼다. 노력도 재산도 다 썼다. 뭐하는데 썼느냐? 부자 되는 데 썼느냐, 사람을 살리는 데 썼느냐? 사람을 살리는 데 다 썼다.
‘사람이 돈보다 귀하냐?’ 하고 묻는다면 ‘사람이 귀하다’고 하지만 그런데 날마다 사는 정신을 보면 사람보다 돈이 더 귀하다고 그 사람의 정신이 행동으로 말을 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물질 때문에, 돈 때문에, 부요 때문에 사람을 상해하겠구나. 사람을 때리기도 하고,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도 하고, 해치기도 하겠구나. 신랑보다 돈을 더 좋아하는 사람은 신랑을 해칠 자이다. 신랑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사랑할 줄을 알면 사랑에서 모든 노력이 나오게 돼 있다.
한 인생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 때 영적인 면에서 강도를 만나면 마음에 상처가 나기 마련이다. 강도를 만났으면 상처가 난다. 몸에 상처는 다 아는 거고 마음에 상처가 난다. 겉으로 보기엔 강도가 아닌데 사람을 상해하니 그건 강도요, 그 강도를 만난 사람은 마음에 상처가 난다.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부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상처를 아물게 하고 평안을 주었다는 의미이다. 요즘 같으면 소독을 하고 약을 바르고 밴드도 붙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심은 약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는 뜻이 있어서 이렇게 말씀을 하는 것이다.
주막집은 길 가는 나그네가 잠깐 쉬었다 가는 임시처소요 곧, 영의 눈으로 보면 교회이기도 하다. ‘부비가 더 들면 다시 올 때 갚아주겠다’는 것은 ‘사람을 복음으로 살리는 일에 무엇으로 건 수종을 든 것은 내가 다 보상을 하마’이다. 세상은 다 누구 것이냐? 하나님 것이다. 그런데 왜 네 것 내 것을 따지느냐? 저축을 했느냐? 사람을 위해서 써라.
그런데 정막 독사인지, 뱀인지, 마귀새끼인지 부모가 아플 때 자식들이 돈을 조금만 들이면 될 것을 서로 자기 돈을 안 들이려고 한다. 우리교회에 그런 자식이 있느냐? 좀 더 나가서 정말 돈이 없어서 아픈 사람이 있으면 마음을 모아서 돕는 게 성경이다. 사람이 복 받을 사람으로 돼야 한다.
여기서 주님의 음성이 들리느냐? 나그네의 아름다운 마음이지만 우리에게는 이것이 주님의 마음으로 다가온다. 우리도 그런 마음을 품자. 사마리아인의 이 비유 속에는 복합적인 계시가 많이 들어있다. 현재 우리 모두가 가고 있는 신앙노선을 모르면 즉, 자기가 예수 믿는 정신이 있는 거고, 그리고 설교를 내는 교회목사도 가는 길이 있는 건데 신앙하는 그 노선을 모르면 자기가 강도를 당하게 되고, 전도한답시고 사람들을 끌어다 놓고 강도를 만나게 한다. 오늘날 그런 교회들이 많다. 사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그건 교회도 아니고 교회에서 할 짓도 아니다.
교회 안에 마귀는 없을 것 같으냐? 교회 안에 거짓 종은 없을 것 같으냐? 예수 바로 믿지 못하는 자기 속에 도둑놈은 없느냐? 우리는 낱낱이 깨닫고 알고 가야 한다. 왜? 알지를 못하면 내가 강도 만난 자가 아니면 강도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을 시험하는 이 율법사는 자기가 어떻게 되어있는 상태인지 자기 자신을 모른다. 그냥 멍청하게 듣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율법사가 깨달으라고 하는 말인데 율법사는 그걸 모르고 있다. 이 얘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누굴 말하는 건지도 모른다.
이 비유에서 자기가 어떤 상태인지 신앙을 하는 자기의 정신과 노선을 생각을 해야 한다. 못 깨달으면 안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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