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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한 목사의 <이야기 신학16호> -2009년 8월 16일 발행 – 에 실었던 글이다.
한국 민주주의 발전 단계
해방 후 우리는 독재의 긴 터널을 지나야 했습니다. 이승만 독재 12년, 군부독재 31년의 긴 세월을 그렇게 지냈습니다. 해방과 함께 바로 민주국가를 수립할 수는 없었을까? 그것이 어려운 모양입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습니다. 민주주의는 거저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수많은 투쟁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성장하는 것이지 단번에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입니다. 누가 쉽게 권력을 이양하고 나누어 주려고 하겠습니까?
히브리 노예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데는 40년의 광야 생활이 필요하였습니다. 일주일 이면 갈 수 있는 길을 40년의 세월동안 광야를 헤매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430년 동안 몸에 밴 노예근성을 제거해야 했고 또 훈련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노예근성이라는 것은 고치기가 매우 힘듭니다. 불가능 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집트에서의 노예근성을 가진 이들이 다 죽을 때까지의 기간으로서 40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역사에서 때때로 독재는 요청됩니다. 도무지 희망이 없을 때, 격동의 시기에, 혼란의 시기에 민중들은 그들을 이끌어줄 영웅을 필요로 합니다. 영웅이 없는 시대는 불행한 시대라고 하지만 영웅이 필요한 시대는 더욱 불행한 시대입니다. 영웅이란 무엇인가? 영웅이 바로 독재자입니다.
독재는 매우 효율적입니다. 신속하고 추진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소모성 논쟁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혼란의 시대는 독재를 요청합니다.
영웅과 독재자의 차이는 무엇일까? 독재자가 제 할 일을 하고 제때에 물러나면 영웅이요 그렇지 않으면 독재자입니다. 독재자가 정말이지 훌륭한 지도자로 時中之道를 아는 이라면 마땅히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날 것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지 못하듯이 독재자 또한 저 자신을 알지 못합니다. 저 자신이 최고의 애국 애족자요 저 자신이 최고로 현명한 이라 확신하기에 물러날 때 물러나지 못합니다. 저 자신에게 절대가치를 두고 있기 때문에 저에게 반대하는 이들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비판적 의견들은 멀리하니 그의 주변에는 예스맨들만이 남습니다. 그래서 독재자가 물러나고 나면 뒤를 이을 인재가 없어 또 다시 불의한 권력쟁탈에 의하여 독재의 악순환이 이어집니다.
독재가 길어지면 틀림없이 부패하고 틀림없이 비효율적이며 나라는 도탄에 빠지게 됩니다.
경제가 건강하려면 맑고 투명한 경쟁관계가 이루어져야 하듯이 정치도 건강하려면 경쟁관계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 필자의 견해로 조선이 망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으로 붕당정치가 사라짐이라고 생각합니다. 당파싸움이 극에 달했던 영·정조 시대, 그 때는 역설적이게도 백성들의 삶이 평화로웠습니다. 정치인들이 도끼눈을 하고 서로의 비리와 실책을 찾으려 하니 부정부패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기려고 기발한 아이디어와 정책을 제시하니 행정이 원활하게 돌아갑니다. 그러나 순조임금의 등극 후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실시되면서 나라의 형편은 곤두박질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견제하는 이가 없는 세도정치이기에 마음대로 부정부패할 수 있었습니다. 정책은 사라지고 권력자에게 아부하는 자만이 살아남으니 법질서는 파괴되고 심지어 신분질서도 파괴되며 과거시험장인 난장은 정말 난장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160여 년 동안의 세도정치에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지고 조정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정치인들은 경쟁하고 투쟁해야 합니다. 국민들로부터 권력을 이양받기 위해서 그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독재치하에서는 경쟁도 없고 투쟁도 없습니다. 오직 독재자만의 전횡만 있을 뿐입니다. 정치인들이 싸운다고 비난할 것이 아닙니다. 정치인들이 정말로 싸움다운 싸움을 해야 나라는 바로 섭니다.
독재는 40년이면 족합니다. 40년은 꽉 찬 한 세대입니다. 한 세대가 지나면 세상이 변하고 가치관도 변합니다.
반만년 역사 속에서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민주정부가 들어선 것은 1993년 문민정부의 출현이라 할 것입니다. 아니 진정한 민주정부가 수립된 것은 2003년 노무현 정부의 출현부터라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43년의 독재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승만 대통령은 사람을 양성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독재 권력을 연장하기 위하여 뜻있고 유능한 인재들은 철저히 제거하고 자신에게 아부하는 보조자들만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쫓겨난 자리에 공백이 생겼습니다.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또 다른 독재자 박정희가 들어섰습니다. 박정희도 역시 이승만과 똑 같았습니다. 뜻있고 유능한 인재들을 철저히 제거하고 역시 자신에게 충성하는 보조자들만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죽은 자리에 공백이 생겼습니다.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또 다른 독재자 전두환이 들어섰습니다.
그동안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은 쌓이고 쌓였습니다. 더 이상 독재정권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몰아내기에는 국민들의 힘도 아직은 부족하였나봅니다. 그래서 7년 단임이라는 타협점에 합의 하였습니다. 전두환은 더 이상의 권력유지는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후계자를 양성하였습니다. 그가 이승만, 박정희와 다른 것이 있다면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 된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줄 후계자를 세웠으니 그가 노태우입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박정희, 전두환에 이어 군인출신 이기에 군부독재의 연장선상에서 보아야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국민의 직선제 선거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하기 위하여 야권을 분열시켰습니다. 야권 지도자들은 물론 국민들도 모두 그의 의도를 알았지만 뻔히 알면서도 당하고 말았습니다. 야권 지도자들의 권력욕으로 볼 수도 있고 국민들의 우매함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역사발전의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아쉽지만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했다는 것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더 이상 군부의 권력 장악은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대세가 그러했습니다. 누구도 그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이제는 민간으로 권력이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군부독재 하에서 기득권을 누려온 이들도 권력의 민간이양에는 동의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그대로 누려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습니다. 민간인이되 군부독재자들의 기득권을 보존해 주는 이, 김영삼이 그 것에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군부독재와의 합당으로 김영삼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이 또한 거역할 수 없는 역사발전의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군부독재와의 완전한 단절을 하지는 못하였지만 국민은 문민정부라는 것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필자의 생각으로 가장 불행한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는 평생을 민주화 투쟁으로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비록 군부독재와의 합당으로 대통령이 되었지만 군부독재를 뿌리 뽑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전두환과 노태우를 감옥에 보냈습니다. 군부내의 사조직인 하나회를 뿌리 뽑았습니다. 그리고 건전한 경제발전을 이루고 군부독재의 경제적 토대를 부수기 위하여 금융실명제도 실시하였습니다. 통일에 성큼 다가서기 위하여 남북정상회담도 추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하나님이 정한 때가 되지 않았나봅니다.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남북정상회담이 좌절됨은 물론 보수측의 대규모 반발이 폭발하였습니다. 견딜 수 없어서인지 아니면 가치관이 바뀌어서인지 김영삼대통령은 극 보수로 입장을 선회하였습니다. 더욱더 안타까운 것은 정권 말기에 외환위기가 닥쳤습니다. 그동안의 군부독재시절부터 농축되었던 부패경제, 정경유착 등의 왜곡된 경제구조의 결과가 외환위기로 터져 나온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당시가 대선정국이었기에 외환위기의 책임을 물을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조금만 더 일찍 외환위기가 터졌더라면 국민들의 그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커다란 폭동으로 일어났을 것입니다.
정권교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완전한 정권교체가 아니었다. 김대중 후보는 스스로 유신본당이라 말하는 김종필의 자민련과 합당하여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탓할 수도 없습니다. 역시 뛰어넘을 수 없는 역사발전의 단계였습니다. 국민들도 어느 정도 성숙하였던지 묵묵히 받아들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부터 큰 짐을 짊어졌습니다. 외환위기를 극복해야 합니다.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시행되었습니다.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고 실업자가 속출하였습니다. 국민들은 현명했습니다. 그 어려움들을 감내하고 또 감내했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힘들게 이룩한 민주화이고 정권교체인만큼 스스로 그것을 부인하고 깨뜨릴 수는 더더욱 없었던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지도력과 국민들의 참고 인내한 결과로 외환위기 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깊었습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부실기업은 물론 많은 우량기업들도 헐값에 외국에 팔려 나갔고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화되었으며 수많은 국민들이 신용불량자로 전락하였습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하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은 참으로 멋진 하나의 드라마였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믿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군부독재와 합당함으로, 김대중 대통령은 유신본당과 손잡음으로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습니다. 그처럼 노무현 후보도 자신이 없었던지 재벌정치인 정몽준씨와 손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선거 전날 정몽준씨는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습니다. 다시 수구세력에게 권력이 넘어갈 수밖에 없는 위기중의 위기였습니다. 수구세력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고 진보세력, 민주화 세력은 초긴장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위기에 처한 진보진영은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하여 노무현 후보를 대통령에 당선시켰습니다. 이보다 더 완벽하고 깨끗한 승리는 없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힘을 빌린이가 없으니 정치적 부담감도 없었습니다.
과거 김대중 대통령은 ‘권위주의 청산’이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권위주의란 권력자가 국민들 위에 군림하는 전 근대적인 현상입니다. 권력자가 그러하니 국민을 대하는 공무원의 자세도 그러하고 조금만 힘이 있는 자들은 그 힘으로 권위적 이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 권위주의입니다. 그러나 사실 김대중 대통령도 권위주의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독재정권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도 그러해야 했고 또한 그의 성품도 그러하였습니다. 이러한 김대중 대통령의 숙원을 풀어준 이가 노무현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가 권위주의를 탈피하였습니다. “대통령이 너무 가볍다”, “대통령이 체신머리가 없다”고 비난을 받을 정도로 그는 권위적이지 않았습니다. 많은 권위주의자들이 노무현 대통령의 탈 권위에 당황한 나머지 그를 탄핵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국민의 정서를 너무 몰랐습니다. 국민은 정치인들의 생각 보다 훨씬 선진화된 정치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였습니다. 정권이 다시 바뀐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실용주의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나는 이명박 대통령의 가치관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당연한 것을 이제야 말합니다. 그동안 실용주의를 말하기에는 원칙을 세우는 일이 더 급했었습니다. 그러나 원칙을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무엇을 위한 실용주의인지, 누구를 위한 실용주의인지, 누구에 의한 실용주의인지 정말이지 원칙을 지키는 실용주의이기를 바랍니다.
김홍한 목사의 <이야기 신학16호> -2009년 8월 16일
이 글을 쓰고 12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을 지났고 지금은 문재인 정부다. 그리고 또 대선이 다가온다.
이명박 대통령, 국민이 선택했다. 利(이)를 택한 것이다. 민주주의 보다 이익을 택한 것이고, 義(의)보다 利(이)을 택한 것이다. 見利思義(견리사의/이익 앞에서는 먼저 의를 생각한다.)해야 하는데 利(이)만 보았다. 국가를 이끔에 경제는 엄청나게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義(의)다. 국가는 利(이)를 말 해서는 안 된다. 義(의)만 말 해야 한다. -<맹자> 양혜왕1장 참조-
박근혜 대통령, 역시 국민이 선택했다. 박근혜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박정희의 망령을 선택한 것이다. 다행히 그의 몰락으로 박정희의 망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문재인 정부 이야기는 다음기회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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