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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구약시대 레위인, 고용된 제사장, 그는 그를 고용한 집안이 번성하면 다행이지만 혹 어려워지거나 재앙이 임하면 쫓겨나게 되고 심한 경우에는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고용된 사제들은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실상은 힘없는 약자이고 가난한 민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보다는 힘 있는 자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나마 고용되지 못한 레위인들은 거지처럼 떠돌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혹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정의를 말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중세 서구 기독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랫동안 성직자 임명권을 세속권력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고위 성직자들중에는 도무지 자격이 없는 자들이 임명자에 대한 충성도에 의해서 임명되었습니다. 20세도 안 된 이가 교황에 임명되기도 하였습니다. 교회 타락의 가장 큰 원인은 교회가 세속권력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중국철학을 공부하다 보니 역시 그러한 모습이 보입니다. 儒家 사람들은 세도가에 빌붙어 살면서 그 집안의 모든 일을 관장해 주고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충성을 합니다. 禮로서 그 집안의 관혼상제를 주관해 주고, 음악으로 주인을 즐겁게 해주며, 활쏘기(射)와 말 타기(御)를 익혀서 유사시 주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군인의 역할을 하고, 글(書)을 익힘으로서 가정교사 내지는 문서 수발을 하고, 수(數)에 밝아 주인의 재정을 관리해 주는 청지기의 역할입니다. 이들도 역시 사사기 18장의 제사장처럼 고용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아마 유가 사람들도 그를 고용한 집안이 크게 번성하면 대우를 받지만 반대인 경우에는 쫓겨나거나 경우에 따라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였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목회자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제의 기능과 儒의 기능이 섞여 있습니다. 예언자전통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체계가 잡힌 기성교회에 몸담고 있는 목사들일수록 예언자의 역할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안정된 교회의 중직들은 메시지를 받는 입장이 아니라 자신들이 선호하는 메시지를 요구하는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목사의 메시지는 축복과 위로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현상유지, 질서유지에 맞추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구조적 모순을 깊이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윤리적인 설교도 도를 지나치면 안 됩니다. 적당히 봉사할만한 여건을 조성하여 면죄부를 부여해야 합니다. 풍부한 교양과 세련된 행동으로 교우들은 물론 지역유지 및 정관계 인사들의 중재자 역할도 수행해야 합니다. 이러한 요구에 잘 적응한 목사들은 더 크고 조직화된 교회에 스카웃됩니다.
목사의 능력(?)여부에 따라서 목사가 교회의 최고 권력자가 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마치 중세에 교회권력이 세속권력을 압도했던 적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목사의 권력은 교회밖에까지 확장되기도 합니다.
목회자의 모습이 매우 다양합니다. 신비주의자가 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가 있습니다. 사회구원을 주장하는 자가 있고 개인구원에 중점을 두는 자가 있습니다. 기독교만이 완벽한 진리라는 근본주의자도 있고 타종교에 대해서 관대한 이도 있습니다. 또한 꼭 불교의 禪僧같은 목사도 있고 완고한 유가의 선비 같은 목사도 있으며 신기 들린 무당 같은 목사도 있고 꼭 연예인 같은 목사도 있습니다.
성격이 불같이 급한 목사도 있고 마음씨 고운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목사도 있습니다. 동리사람들의 대소사를 일일이 챙기는 이장님 같은 목사도 있습니다. 항상 깔끔한 정장차림의 목사가 있는가 하면 시골 촌부나 막노동꾼 차림의 목사도 있습니다. 밤낮으로 엉덩이가 문드러지도록 경전에 파고드는 목사가 있는가 하면 무릎에 굳은살이 붙도록 밤낮으로 기도에 몰두하는 목사도 있습니다. 또 한 부지런히 발로 뛰는 목사도 있습니다. 목사는 세상일도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 TV의 오락프로는 물론이고 신문의 광고문구 까지도 빠짐없이 보는 목사도 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좌우의 대립이 극심하던 때에 어떤 이는 서북청년단이라는 우익테러단체를 구성하여 그 정점에 있었던 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좌익에 투신하여 대구 10월 항쟁을 이끈이들도 있었고 북한에서 고위직에 오른 목사도 있습니다.
목회활동을 함에 어떤 이는 기업의 최고 경영자처럼 교회를 이끄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작은 공동체를 꾸려 가족처럼 살아가는 이도 있고 개인교사 같이 한 사람 한 사람에 관심 갖는 이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가치관과 목회관을 갖고 있는 목사가 만나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신선한 배움을 얻기도 하고 도무지 극복할 수 없는 높은 담이 있음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예 처음서부터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애써 회피하던지 그러려니 하고 인정하고 넘어가기도 합니다.
나는 어떠한 목사일까? 오늘 나의 모습은 결코 나의 의지로 이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몰으셨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 앞으로 하나님께서 어느 쪽으로 어떻게 몰아가실지, 그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은 설렙니다.
- 김홍한목사의 <이야기 신학 17호>(2009년 9월 1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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