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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누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183 추천 수 0 2021.09.21 11:3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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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0:38-42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038-42: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 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41-42: 예수님을 모셔놓고 왜 많은 일에 근심을 하고 바쁘다고 신경을 쓰면서 말씀을 잘 받는 형제까지 미워하고 툴툴거리고 은근히 자기 일을 안 도와준다고 하면서 예수님까지 야속하게 보고 있을까?

 

오늘날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영접해 놓고 말씀을 듣는 일에 전념하지 않고 말씀 받는 시간을 빼먹으면서 뭐가 그렇게 바쁘냐? 평소에 성경을 안 읽느냐? 이건 오늘 바빠서 교회에 못 갑니다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니 자기가 어려울 때 예수님이 봐 주겠느냐?

 

예수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 말씀이 너를 지키신다는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자기 속에서 인격화 되어서 그 주장성으로 사니까 자기의 모든 것이 보존이 된다는 것이다. 반석 위에 세우는 것은 다 보전이 된다 그 말이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서 자기를 반석 위에 세울 줄을 모르고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은 것처럼 사고방식이 그러니 어떻게 세워지겠느냐? 그렇게 되면 첫째는 사람이 안 세워진다. 사람이 안 세워지면 그 가정도 세워지지를 않는다. 가정이 안 세워지면 기독교 사회가 어떻게 세워질까? 안 세워진다.

 

항상 원리를 거스르고 뭐가 그렇게 바쁜지? 그러니까 사람은 목사가 구태여 저주나 축복을 안 해도 말씀에 의해서 자기가 복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저주스런 사람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사람이 깨닫지를 못하면 멸망을 당해가면서도 그걸 모른다. 가르쳐 줘도 억지를 피운다. 설교를 듣는 시간에 딴 거 적고 딴 놀이를 하는 게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혜를 가지려고 하지를 않고 딴 짓을 하고 있다면 그건 마귀 짓이다. 믿음으로 못 들어간다. 모두 다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전 신경을, 전 인격을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데 써야 한다.

 

예수님을 모셨으면 천국의 말씀부터 듣고 그 말씀에 의해서 주님의 의사를 따라서 무엇이든지 순종을 하면 자기가 복된 사람이 된다. 어디를 가든지 복된 사람이 된다. 그런데 마르다는 음식을 자기 입에 맞도록 만들면서 이것도 예수님의 입맛에 맞겠지. 저것도 예수님의 입맛에 맞겠지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의사성을 물어보지 않고 자기 기준대로 저 색깔, 저 모양새가 예수님의 눈에 맞겠지?’ 하는 사고방식이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도 그런 사고방식으로 해서는 안 되고, 봉사를 하는 것도 진리 깨달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식 자기 위주로 하는 것도 안 된다. 잘못된 것이다.

 

마르다는 자기 입맛, 자기 위주, 자기 눈에 맞도록 하느라고 분주하다. 그냥 음식 장만처럼 보이지만 이 안에는 복합적인 뜻이 많이 들어있다. 교회마다 예수님을 모셔놓고 생명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하지를 않고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분주한 것도 여기에 해당이 된다.

 

예수님을 모셔놓고 무슨 짓을 하느냐? 예수님은 무슨 일을 시키느냐? 지금 이 장면에서 당신 앞에서 말씀을 들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신앙관이 말씀 쪽으로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를 않고 자꾸 딴 짓을 한다. 이러면 사람이 신앙에 정착이 안 된다. 자기 양심 이성 모든 소원 목적이 붕붕 떠 있고 세상바람을 자꾸 타려는 마음이 들어 있지 정착이 안 된다. 정착이 안 되면 나중에 어느 귀신이 물고 갈 런지 모른다. 자기는 똑똑타고 그런 바람을 타는 것 같으나 귀신이 물고 가게 돼 있다.

 

예수 믿으면서 자기 위주로 분주하면 안 된다. 말하자면 교회 안에서 진리 사모성이 아니고 이방정신과 사상을 끌어다가 어떻게 재미있게 만들어볼까?’ 하고 분주한 거. ‘어떻게 맛있게 만들어볼까?’ 예수님이 그런 맛을 즐기는 것이냐? 교회를 가만 보면 그런 식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불러다가 온 교인들이 유치원생이 되어서 예수님 앞에 짝짜꿍하며 예수님을 웃기려고 하는 식이다.

 

마르다의 이 신앙사상을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그 정신이 수은성이냐, 시은성이냐? 시은성이다. 은혜를 베푸는 자이다. 예수를 믿어도 수은성으로 믿는 사람이 있고, 시은성으로 믿는 사람이 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영접은 했으나 그 신앙지식이 고쳐지지를 않았다.

 

시은성으로 들어가 있는 인간은 자기를 못 고친 것이다. 수은성으로 돼 있어야 말씀을 받지 시은성으로 들어가 있으면 말씀을 못 받는다. 은혜를 못 받는다. 시은성이면 자기 주관성이 꼿꼿하게 서 있어서 은혜를 못 받는다.

 

예수님 위주, 구원 위주가 아니라 항상 자기 위주. 일을 하는 데도 자기 위주, 생활을 하는 데도 자기 위주, 주일날 교회에 나오는 데도 자기 위주. 그러니까 자기의 상황에 따라 교회에 나오기도 하고 안 나오기도 하고, 바쁘면 안 나오고, 또 집에 손님이 오면 안 나오고. 이건 자기 위주다. 이러면 은혜를 못 받는다.

 

자기가 교회에 나오기 싫다는 마음을 가지면 이상하게 상황이 주일마나 안 가지도록 만들어진다. 그게 하나님의 예정이라면 예정이다. 차가 안 가고자 하면 선다. 가고자 하면 달아난다. 시동이 걸리면 가기가 쉽다. 시동이 꺼지면 서기 쉽다. 그런 것처럼 자기 속에서 파워가 꺼져 있으면 모든 것은 서기가 쉽다. 예수 믿는 이치를 알아야 한다. 몸이 약하면 밥을 제 때 안 먹은 거고, 또 몸이 약해지면 감기에 걸리기 쉽고, 그 다음에는 병원에 가야 되고, 그러면 병원에 돈을 갖다 주어야 한다. 그러면 얼마나 손해가 많으냐?

 

한 가정에서 가족들의 신앙노선의 길이 다를 경우 이것을 넓혀서 확대시켜서 보면 마르다의 신앙정신과 마리아의 신앙정신이 다른 것과 같은 거다. 한 가정인데도 마리아의 노선 즉, 진리생명의 노선이 있고 사역위주의 노선이 있는데, 마르다는 시은성을 가진 노선이니 예수님을 위해서 재미있게 뭘 자꾸 만들어 내려는 것이다.

 

신앙에는 진리신앙 생명의 노선이 있고, 세상성적인 일에 분주히 돌아가는 세상 육적인 비진리적인 신앙노선이 있다. 즉 주님이 인정을 해주는 신앙노선이 있고, 인정을 안 해주는 신앙노선이 있음을 여기서도 발견을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우리 궁극교회에도 말씀을 듣고 깨달음을 받고자 하는 교인도 있고, 같은 궁극교회 교인인데도 이유가 많은 교인도 있다. 이건 노선이 다른 거다. 한 교회 안에서도 신앙정신 사상의 노선이 다른 거다. 이유가 많으면 은혜를 못 받는다. 이러면 궁극교회에 다니더라도 예수 믿는 걸 힘들어 하게 된다.

 

오늘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앙정신 사상이 주님의 인정이 들어 있는 건지 아닌 건지 느껴야 한다. 마르다의 신앙이 아무리 분주하고 이 반찬 저 반찬 집어먹어가면서 재미있다고 해도 그걸 따라가면 안 된다. 마르다는 지금 이 장면에서 은혜를 못 받고 있다. 그러나 마리아는 선택을 바로 한 것이다. 잘한 것이다.

 

혹 예수님이 마르다의 집에 들어가시면서 마르다에게 내가 배고프니 얼른 간단히 식사를 준비해서 가져와라. 내가 옆에서 도와줄께하면서 예수님이 마르다와 같이 앉아서 일을 한다면 모르지만 지금 예수님이 들어간 것은 그게 아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선택을 바로 한 것이다. 진리생명의 말씀의 사모성, 이거는 최고의 선택이다. 구원선택은 최고의 선택이다. 이건 빼앗기면 안 된다. 예수님이 잘한 것이라고 말씀을 했으니까. 마리아는 가치판단을 잘한 것이다.

 

예수 믿으면서도 가치판단을 잘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건 좋게 말하면 못 듣고 못 깨달아서 그것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미련해서 그렇다. 예수를 믿으면 그 깨달음성이 1년이 가고 2년이 가고 나이가 들면 들수록 풍부해져야 정상인데 1년 믿어도 그만, 10년을 믿어도 그만이라면 이건 문제아다. 기형아다. 기형적인 신앙은 사람노릇을 못한다. 교인노릇도 못한다.

 

최고의 선택을 했느냐? 절대로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마르다에게 몇 가지만, 혹 한 가지만 하라는 것은 그 때 당시로는 음식장만을 하든지 말씀을 듣든지 한 가지만 하라는 것이다. 즉 음식장만을 하는데 시간을 다 빼앗기면 안 된다는 말씀이다. 말씀을 듣고 은혜 받는 시간을 더 가지라는 의미이다. 이것저것 맡아서 봉사활동을 하느라고 일생을 헛되게 보내지 말고 신령천국의 말씀의 은혜를 받는 목적에 더 시간을 가져라 그 말이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집을 떠나신 후에는 누가 더 깨달은 은혜가 많을까? 마리아다. 마르다는 말씀을 못 들었으니 은혜를 못 받았고, 마리아는 말씀을 받고 그 마음 가운데 진리생명이신 예수님의 은혜가 그대로 머물고 있다. 그런데 은혜를 못 받은 마르다는 예수님이 가신 후에 원망불평과 심통이 나고 심술이 난다. 은혜를 못 받으면 이렇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신앙을 좋아하시고 어떤 신앙을 책망하시는지도 알아야 한다. 마르다와 마리아 중에 어떤 신앙에 눈물과 고통과 한숨과 후회가 나올까? 여기서 누구의 신앙이 그럴까? 마르다다. 그러면 어떤 신앙이 기쁨이 충만할까? 마리아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자기에게 구원이 되는 기회는 항상 오는 게 아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마르다의 집에 들른 것이니까 은혜 받는 기회가 항상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자기, 그리고 다른 사람을 은혜를 못 받게 하면 안 된다. 즉 충성봉사 하라고 다그치는 사고방식은 영원히 손해될 짓이다. 위주가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충성봉사 자체는 좋은 건데 그게 목적이 돼서 신앙이 그렇게 되면 안 된다.

 

그런데 많은 목사들이 모든 교인들이 자기 교회에 충성봉사를 하기를 원하지만, 그러니까 신앙의 원리를 모르는, 이룰구원을 모르는 지식에서 자기 교인들이 충성봉사만 하길 바란다. 이건 예수님이 원하는 신앙은 아니다.

 

깨닫는 족족, 커가는 족족, 성장되는 족족 자기가 은혜 받은 것에 감사해서 충성봉사가 나오는 것은 아름답다. 안에서 나오는 것으로 되는 것은. 주님께서는 그런 것을 받으시는 거지 맨날 충성봉사 안한다고 두들겨 매면 그거 어디 쓰겠느냐? 충성봉사가 잣대가 돼서 그걸 잘 하는 사람은 믿음이 있다고 하게 되면 벌써 잣대 기준이 틀린 것이다. 그렇게 되면 깨닫지도 못하고, 속에서 은혜를 받은 것도 없다. 그리고 충성봉사 강조를 안 한다고 해서 깨닫는 것도 없고 충성봉사도 없다면 그게 뭐냐?

 

어느 쪽이 강조가 되고, 자기 속에 들어가야 바로 되겠느냐? 지금 이 말이 깨닫지도 못하면서 사람이 바로 안됐다면 그럴 바에야 아예 충성봉사나 하라는 말이냐? 이건 원리적으로 틀린 것이다. 봉사 충성 사랑 봉사심이 나오는 것도 자기가 된 속에서 나와야 아름다운 것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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