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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정체성, 투쟁 방식>
영화 <프리즌 이스케이프>는 무려 404일 동안 나무로 열쇠를 만들어서 15개의 철문을 열고 감옥을 탈출한 세 사람의 실화를 필름에 담은 작품이다.
이렇게 말하면 흥미진진한 감옥 탈출기 같지만, 실은 정치범들의 이야기다.
1978년 (백인인) 팀 젠킨스와 스티븐 리는 남아공의 악명높은 인종차별정책에 맞서 모든 인종의 화해와 평등을 위해 싸우다가 체포되어 각각 징역 12년, 8년 형을 언도 받고 정치범 전용 감옥인 프리토리아 교도소에 수감된다.
프리토리아 교도소는 잔인한 수형생활과 물샐틈 없는 경비 시설로 유명하며, 이제껏 단 한 명도 탈출에 성공한 적이 없는 곳이다.
팀과 스티븐은 이곳에서 이미 오랫동안 수형생활을 하고 있던 (정치범) 데니스를 만난다.
팀과 스티븐이 탈옥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하자, 데니슨은 '불가능'하다고 답하면서, 자신은 '양심수'이기 때문에 끝까지 감옥 안에서 저항할 것을 천명한다.
반면 팀과 스티븐은 자신들은 '전쟁 포로'이며 따라서 반드시 감옥을 탈출해서 외부 세계에 나가 남아공정부와 계속 투쟁할 것을 천명한다.
동일한 정치범이지만 한쪽은 스스로를 '양심수'로, 다른 한쪽은 '전쟁 포로'로 자기 정체성을 규정한 것이다.
이후 팀 젠킨스는 404일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50개의 나무 열쇠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이 중에는 열쇠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무려 1년이 넘었던 것도 있었다.
마침내 필요한 열쇠가 다 만들어지자 감옥에서 의기투합한 세 사람이 탈출을 감행하여 15개의 철문을 열고 탈옥에 성공한다. 영화의 백미는 마지막 철문 앞에서, 준비한 열쇠가 무용지물이 되자 아예 벽을 부수고 탈출하는 장면이다.
이렇게 해서 팀 젠킨스와 스티븐 리는 1979년 12월에 탈옥에 성공하고, 국경을 넘어 마침내 영국에 도착하여 아파르헤이트가 종식되는 1991년까지 투쟁을 이어간다.
한편 양심수로 감옥에 끝까지 남았던 데니슨 역시 1991년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된다.
데니슨과 팀이 선택한 투쟁 방식 중 무엇이 더 옳은가를 판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데니슨이 양심수로서 선택한 투쟁 방식과, 팀과 스티븐이 전사로서 선택한 투쟁 방식 모두 큰 고통과 희생이 수반되는 싸움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다만 공공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와 그 규정에 맞춰 삶의 방식을 결정해야 하는 데 있어 각자의 선택지가 있으며, 그 선택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혹자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해방 이후 지난 75년 간 청산되지 못한 (소위) 적폐 세력과의 싸움이 지금도 계속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자신을 그 적폐와의 싸움에 임하는 전사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자신을 적폐 세력에 포섭되거나 동화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부단히 검열하고 격리하는 양심수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누가 더 옳고 그르냐, 낫고 못하냐를 따지며 논쟁하는 것은 무익하다.
각자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 있고, 그 방식에 맞춰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게 살면 된다.
우리의 진짜 적은 적폐이지, 서로 다른 전선에서 적폐와 싸우는 양심수 혹은 전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프리즌 이스케이프>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탈출하자는 팀과 스티븐의 요청을 거절한 데니슨은, 그러나 두 사람이 무사히 탈출하도록 돕기 위해 간수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한다.
그것이 양심수로서 그가 감옥 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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