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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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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1장 1절-4절: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1절: 예수님께서 기도문을 주신 것처럼 세례요한은 자기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은 없다. ‘너희들도 기도를 이렇게 하라’고 한 것은 없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예수님처럼 안 가르쳤다고 해도 세례요한의 사상이 제자들의 기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세례요한이 제자들에게 ‘기도는 이렇게 하라’ 하고 가르친 것은 없으나 세례요한이 가르치고자 하는 그것, 세례요한의 그 신앙사상이 제자들의 기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무슨 일을 하는가 봐라. 그리고 너희들의 소원도 내가 하는 일과 같은 것이라면 그게 너희들의 기도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기도는 자기가 소원하는 것을 가지고 하는 것이니까 세례요한이 가르치는 사상과 그의 기도와는 무관치 않은 것이다.
하루는 세례요한이 요단강 근처에서 세례를 줄 때에 유대 종교인들에게, 또는 무리들에게 책망을 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리이까’ 하니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옷 두 벌 있는 자는 없는 자에게 주고.’ 그러니까 옷이 두 벌이 있으면 한 벌을 주라는 말인데 그러면 이게 옷을 보고 하는 말이냐? 글자적 액면적인 그런 말은 아니다.
세례요한이 ‘먹을 것이 있는 자는 나누어 주고, 세리에게 정한 세 외에는 더 받지 말고, 군인들은 국가에서 정한대로만 받고 강폭 하여 빼앗지 말고’ 했고, 또한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금식기도를 한 것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양심에서 나오는 도덕성으로라도 표면적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하자 그 말이다. 세례요한의 정신이 그런 것이다. ‘조금 있으면 메시아가 오시는데 그 메시아를 영접하려면 마음의 준비라도 바로 해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그런 정신 사상으로 활동을 했으니까 그것이 곧 기도로써 가르친 것과 같은 것이다.
세례요한과 그의 제자들의 금식은 회개에 따르는 금식이고, 바리새교인들의 금식은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기 위한 금식이다. 그리고 그들의 기도 역시도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기 위한 기도이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곧 메시아가 올 텐데 그 분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정신도 몸도 마음도 깨끗이 청소를 하자는 것이다. 자기 집에 손님이 오면 방청소라도 깨끗이 해 놓듯이 그런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염원하는 것이 있다. 믿던 안 믿던 모든 사람들이 ‘나는 이렇게 되었으면’ 하는 염원성이 있는데 이것을 전부 기도로 보면 된다. 기독교인들은 꼭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지 않아도 그런 염원성이 그의 기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도의 대상이다. 기도의 내용도 문제지만 대상이 문제다. 어느 대상 앞에서 그렇게 하느냐?
세상 모든 사람들의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냐? 염원성이 뭐냐? 자기 소원대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다 기도다. 그게 없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곧 세상에서 부귀 명예 영광을 얻고 살다가 가는 것이다. 그것이 아닌 사람이 있느냐? 그런데 세상에서 부귀 명예 영광을 얻고 가기 위해서는 세상 모든 조건이 자기에게 맞아야 한다.
기독교인들도 예수님보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갖다달라고 한다. 기도도 그렇고, 금식기도도 그렇고, 교회도 키워달라고 한다. 그게 바로 기도다. 염원하는 게 기도다. 사람이 걱정은 왜 하느냐? 안 이뤄지니까 ‘어떻게 해서 나의 소원을 이룰까?’ 하는 걱정이다. 이것도 기도다. 공부도 그렇고, 결혼도 그렇고 세상 부귀 명예 영광을 얻으려고 하는 이것도 기도다. 그런데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셨는데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2절-4절: 여기에서 보면 세상에서 부귀나 명예나 영광을 얻어서 행복하게 잘 살다가 가라는 말은 없다. 그런 말이 없으니까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기도는 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 세상을 구하고 세상을 자랑하는 기도는 마귀가 좋아하는 기도다. 마귀는 자기가 그런 걸 실현시켜 주지도 못하면서 해 줄 것처럼 말을 한다. 마귀의 수법이 그렇다. 마:에서 예수님에게도 그런 식으로 시험을 걸었다. 또한 표현은 다르지만 에덴동산에서 마귀가 ‘선악과를 따먹으라’ 한 것도 예수님께 시험을 건 것과 내용이 똑같다. 그 목적이 똑같다. 다 세상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교인들 거의가 거기에 넘어진다. 우리는 그런 기도를 하면 안 된다.
그런 기도를 안 하면서 살아봐라. 그러면 밥을 못 먹느냐? 세상기도를 함으로써 사람이 더 불안해진다. 그런 기도를 함으로써 자기 스스로 마귀를 끌어들이는 시험거리를 만들게 된다. 기도하는 게 세상의 이런 저런 조건을 생각하다 보면 밤잠을 못 자고 ‘이래볼까, 저래볼까’ 하게 된다. 그런 것은 자기에게 아무 유익이 없는데도 스스로 시험거리를 만들고 스스로 시험에 걸려든다.
혹시 들의 짐승이나 날아가는 새들이 말하자면 세상 부귀 명예 영광을 얻고 싶다는 기도를 하거든 예수 믿는 너도 그런 기도를 하라. 그런데 짐승들은 그런 기도를 안 해도 잘 산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니 새보다 더 귀하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와, 오늘날 예수 믿는 자기의 기도와,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의 소원 목적과 염원성과 내용 면에서 같으냐, 다르냐? 달라야 하느냐, 같아야 하느냐? 달라야 되는데 오늘날까지 이 말씀이 나올 때까지 자기 속에서 갖는 염원성이 안 믿는 사람들과 같았느냐, 달랐느냐? 이방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것과 같다면 그 속정신 사상이 이방정신 사상과 똑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은 하늘의 뜻, 하늘의 것으로만 들어 있는데 자기가 땅의 것으로 들어 있다면 자기는 밟히게 돼 있다. 마귀의 이용물이고, 귀신들의 장난감이고, 너는 정신적 인격적 차원이 밟히게 돼 있다. 저질적인 차원이다. 이런 사람을 어디에 쓰겠느냐? 쓰레기 같은 사람을 어디다 쓰겠느냐?
예수님의 소원 목적과 안 믿는 사람들의 소원 목적은 다르다. 그러면 오늘날 예수 믿는 자기의 기도가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와 달라야 하느냐, 같아야 하느냐? 예수님과는 단일이 돼야 하고, 안 믿는 사람들과는 구별이 돼야 한다. 안 믿는 사람들은 땅의 소원 목적을 가졌으니 땅의 것을 구하고, 우리는 하늘에 속하고 하나님의 자녀이니 하늘의 것을 구해야 한다.
하늘의 것을 구하면 땅의 것은 따라오게 돼 있다. 그런데 땅의 것을 구하면 하늘 것이 따라오는 게 아니라 얻어맞는다. 땅의 것을 구하는 것은 그 정신이 선악과 따먹는 것이다. 하늘의 것을 구하면 그건 생명과 따먹는 사람이다.
믿는 우리는 일터에서도, 농사를 지을 때도, 장사를 할 때도, 공부를 할 때도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땅의 것을 구하기 위해서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런 것들은 하늘의 사람으로 하늘의 것을 구하는 것으로 전부는 활용물이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활용을 하려면 잘 알아야 하니까 공부도 하는 거고 장사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 믿는 사람들은 목적이 세상 것들이기 때문에 그 목적이 잘 되려면 자꾸 그 면으로 욕심을 내야 한다.
공부를 하는 건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똑같지만 그 목적이 다르다. 우리는 활용성이고 안 믿는 사람들은 누림성이다. 안 믿는 사람들은 그게 이뤄져서 이 땅에서 천국처럼 살아보자는 것이고, 우리는 이뤄졌던 안 이뤄졌던 활용 면에는 다 똑같다.
‘이렇게 기도하라. 아버지여.’ 왜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가 되느냐? 우리가 육신의 아버지를 왜 아버지라고 하느냐? 자기를 낳으셨기 때문에. 육신의 아버지는 나를 신체적 육신으로 낳아서 먹이고 입히고 교육을 하고 보호를 하니까 아버지이다. 그러나 아무리 육신의 아버지라도 자식의 영까지 아버지가 만든 것은 아니다. 자기의 영은 육신의 아버지와는 상관이 없다. 자기의 영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니까 하나님이 만드셨다. 그러기 위해서 그 방편으로 육신의 아버지를 통해서 육신의 몸을 입게 한 것이다. 육신은 일반적으로 죽으면 다 썪는다. 육신의 아버지는 아무리 좋아도 죽으면 갖다 내버린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육신의 아버지인데 그 속에 신앙주격이 들어있는 영이 살아있는 아버지는 역시 영이 살아있는 아들을 좋아한다.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성장되는 이것을 영의 아버지는 좋아한다. 그런데 그 면을 모르면 부자지간이라도 죽은 자식을 데리고 사는 것처럼 썩는 냄새가 나고 구더기가 들끊는다. 영의 눈으로 보면 현실에서 신:의 그게 다 보이는 거다. 부모의 처지, 자식의 처지, 가정의 처지가 다 보이는 거다. 못 보면 모르는 거다.
믿음의 부모는 자식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린다. 즉 ‘목사로 만든다’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깨끗이 거룩으로 살게 하는 것이 제물이다. 거룩으로 놓이는 것이 제물이다. ‘목사 한다. 충성봉사 한다’는 것만 제물로 보지 말고 하나님 앞에 거룩으로 놓여지는 것이 제물이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받으시니까.
그런데 이방 세상 사람들은 부모가 자식을 어디에 제물로 바치는가 하니 ‘세상에서 돈 벌고 잘 살고’ 하는 세상 밑으로 자식을 제물로 밀어 넣는다. 바친다. 이렇게 되면 세상정신이 그 자식을 다 잡아먹는다. 정신적 차원에서 하는 말이다. 세상은 우상이다. 그러니 그렇게 하는 것은 우상에게 자식을 갖다 바치는 겪이다.
예수 믿는 부모가 자식에게 ‘세상에서 돈 잘 벌고 열심히 부자로 살아라’ 하는 건 자식을 세상 제물로 놓여지게 만드는 것이다. 즉 우상이다. 구약에 보면 우상 앞에 산 자식을 태운다. 세상정신으로 불타게 만드는 것을 보여주는 거다. 세상에서 부자로 살려니까 세상정신으로 불에 타야 한다. 그게 우상 앞에 제물로 바쳐지는 것이다. 우리는 말씀에 불이 붙어서 하나님 앞에 거룩한 제물로 놓이는 것이다.
현실에서 이런 부모가 있고 저런 부모가 있음을 영의 눈으로 봐라. 보이면 ‘자식을 어떻게 기르고, 어떻게 교육을 해야 되겠다’ 하는 것이 나오는 거다. 못 보면 자식을 우상으로 다 집어넣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는 것도 알아야 한다. 이걸 모르면 안 당할 고생을 만들어서 생고생을 하다가 죽게 된다. 영의 눈이 어두워서 그런 일이 발생이 되는 거다.
영의 눈이 어두우면 사람을 못 알아본다. 자기도 못 보고, 자기를 못 보면 남도 못 본다. 사람을 못 본다. 이것은 소경이다. 눈을 떴지만, 밥을 찾아먹고 갈 데를 가고 하지만 이건 영의 눈이 어두운 소경이다. 소경은 하는 것마다 부딪히게 된다. 주님과의 의사대립이다.
‘아버지’라 할 때 첫째는 육신적으로 낳은 아버지, 두 번째는 인간 우리를 영육 결합체로 만드셨고,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었던 영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살리시고 새로 태어나게 하셨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역사로 영능의 실력자로 만들어서 신령천국을 유업으로 줘서 영원히 영광중에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있다.
그러니까 육신의 아버지가 한 일이 큰 거냐, 하나님 아버지가 하신 일이 더 큰 거냐? 하나님 아버지가 하시는 일 중에 육신의 아버지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의 방편으로 과정으로 쓰는 거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가 크고 그 다음에 육신의 아버지다. 그래서 육신의 아버지의 명령보다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이 더 큰 거다. 그런데 이걸 모르면 육신의 아버지의 명령만 쫓아가다가 자식도 얻어맞고 그 자식의 부모도 얻어맞고 다 얻어맞게 된다.
육신의 부모도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공기를 마시고, 육신의 자식도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그 공기를 마신다. 그런데 육신의 아버지도 하나님의 뜻 말씀을 모르니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큰 것으로 여긴다. 그건 틀렸다.
우리가 깨달으려면 세상공부도 좋지만 사람공부가 최고다. 사람을 알게 하는 공부가 최고다. 하나님 말씀을 모르면 사람공부가 안 된다. 세상공부는 일하는 공부, 먹는 공부, 만드는 공부다. 그거 빼놓으면 없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누구 이름이?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누구에게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누구의 아버지가 거룩하냐? 하나님 아버지가 거룩하니 자기 아버지를 거룩히 존경하고 받들 사람이 누구냐? 바로 나다. 그러니까 자식이 믿음이 없고 지저분하게 살면 하나님 아버지가 거룩히 여김을 받겠느냐, 욕을 먹겠느냐? 우리에게 ‘하나님이 욕을 먹겠구나’ 하는 게 많이 있을 수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욕을 먹을까? 예수 믿는 사람이 잘하면 거룩히 여김을 받겠지만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아버지가 욕을 먹겠느냐?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게으르고, 미련하고, 깨닫지 못하고, 교회에 오는 것도 들쑥날쑥하고 그러면 마귀가 와서 ‘네가 하나님의 자녀냐?’ 할 게 아니냐? 예수 믿으면서 자기 몸을 관리를 못해서 늦게 일어나고, 제 때 밥 안 먹고 해서 날마다 아프고, 성질만 팍팍 부리고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겠느냐?
우리의 아버지, 자기 아버지가 거룩하냐? 그러면 자기가 거룩해져야 한다. 말씀으로 씻김을 받고, 말씀으로 지혜가 자라고, 예수님처럼 자꾸 성장되고 커 가면 하나님께서 그 자식에게 무엇을 안 맡기시겠느냐?
사람이 착실하고 부지런하면 오만 군데서 일거리가 들어온다. 즉 돈이 따라온다. 그런데 게으르고 성격도 못 고치고 하면 설령 좋은 일거리가 와도 빼앗긴다. 다른 사람이 나를 아는 고로 그런 좋은 일거리를 안 맡긴다. 좋은 일거리는 딴 사람이 다 가지고 가고 ‘너는 이거나 하라’ 하고서 나쁜 일거리를 맡길 수가 있다.
사람이 자라면서 이런 것도 저런 것도 할 수 있으면 그게 자기 실력이 되는 거다. 그게 자기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그 일 끝에 칭찬이 오고, 사랑이 오고, 돈이 따라 들어온다. 좋은 신랑감도 따라오고, 좋은 아내감도 따라오고 한다. 자기가 세상에 가지고 온 게 있느냐? 하나도 없다. 전부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좋은 것을 못 받느냐? 누구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냐?
거룩한 하나님 아버지는 세상물질을 다 만들었지만 사실은 하나님 아버지는 물질과는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물질을 만들어 놓은 것은 우리의 영능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성도의 영능의 실력을 키우는 하나의 매개물들이다. 사람과 만나는 매개물, 깨닫는 매개물 활용물 사용물 이용물이다. 이용 활용을 하면 할수록 자기의 구원거리가 올라간다. 실력이 커진다. 깨닫는 실력, 활용하는 실력이 커진다. 사람을 위해서 사용하는 실력이 커진다.
물질을 잘 활용하는 사람은 속이 넓다. 그런데 그 물질을 자기가 꽉 쥐고 있으면 그 사람 손에 물질이 들어가면 안 나오니 그 사람은 물질을 활용을 못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사람을 못 부린다. 회사의 사장일수록 사람을 잘 부리려면 돈에 욕심을 버려야 한다. 사장일수록 돈에 욕심을 가지면 그 회사는 망하게 돼 있다.
성경에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에는 많은 뜻이 포함돼 있는 건데, ‘옷을 하나 만들어도 네가 입는 것처럼, 음식을 만들어도 네가 먹을 것처럼 하라’는 뜻도 들어있다. 그런데 시장에서 옷을 하나 사서 입으면 엉망인 게 많다. 단추를 하나 달아놔도 금방 떨어진다. 집에 와서 다시 꿰매야 한다. 그러면 만든 사람은 욕을 먹게 된다. 일반적으로 욕을 먹어서 잘 되는 집은 없다. 무슨 장사든 장사를 할수록 정성이 들어 있어야 한다.
우리 아버지는 물질과 상관이 없는 분이다. 그러니까 당신의 자녀들이 자꾸 물질을 달라고 보채면 거룩한 하나님 아버지를 물질 쪽으로 자꾸 떨어뜨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내 쪽으로 끌어당기는 거다. 하나님을 세상 소원성을 가진 내 쪽으로 자꾸 끌어들이는 것이다.
소원성으로 기도로 하나님을 자꾸 내 쪽으로 끌어당기면 말하자면 하나님이 땅으로 뚝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거룩해지겠느냐? 계:에 ‘하늘의 별들이 바람에 익지 않은 선과일이 떨어지듯이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진다’고 했다. 차원이 떨어졌다 그 말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늘로부터 진리의 빛을 받아서 발광체로 있어야 할 텐데 그 위치에서 그 존귀에서 땅으로 뚝 떨어졌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그건 별이 아니다.
교인들의 소원 목적이 땅으로 떨어졌다면 이건 성도가 아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그 모양이다. 진리를 받아도 자기의 소원 목적이 땅에 있으면 이거는 땅에 떨어진 별이다. 땅의 소원 목적을 가지고 땅의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차원이 낮고, 신앙 믿음이 안 올라가고, 사람이 저질로 보이게 된다. 남이 그렇게 하는 게 아닌 자기가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이 값이 없다. 그러면 그런 사람이 세상으로 가면 영광을 얻겠느냐? 교회로 하나님께로 오면 영광을 얻겠느냐?
거룩한 하나님 아버지를 물질 이하로, 자기의 차원으로 끄집어 내리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건 예수 믿어도 타락이다. 자기 머리 위에 하나님이 있어야 할 텐데 물질이 자기 머리 위로 올라가 있고 하나님을 땅으로 끄집어 내려서 ‘하나님, 물질을 나에게 주십시오’ 이렇게 됐으니 하나님을 자기 발바닥으로 끄집어 내린 격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신령한 존재이시고, 만물을 창조하셨고,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고 계시고, 모름이 없으시고, 만능의 능력자요 심판자요 세상 마지막이 되는 날까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의 성령으로 우리를 하나님 당신처럼 본질적으로 거룩하게 만드는 분이다. 그래서 예수 믿는 기독자들은 이방인들처럼 세상에 있는 것을 구걸해서는 안 된다. 구걸한다고 주는 것이냐? 그런 게 아니다.
세상을 달라고 구걸하는 자는 거지다. 우리는 이방인들처럼 세상에 있는 것을 구걸하면 안 된다. 세상을 구걸하는 거지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거지의 아버지가 된다. 우리는 거지의 자식이 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창조의 근원과 진행과 마지막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역사이니 우리 또한 믿음생활이 거룩한 하나님 당신을 닮는 쪽으로 소원 목적이 가야 한다. 우리가 일을 하는 것은 구원을 이루는 매개물이다.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소원성이 아니고 일을 놓고 너도 나도 만나서 구원의 대화의 매개물이다.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던, 어떤 직을 가져도 거기에는 사람이 있으니 부지런히 대화를 하고, 부지런히 하나님 쪽으로 밀착시키는 일을 하라. 이 일을 잘하면 그 사람이 목사다. 그런데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일을 하면서 ‘힘들어서 죽겠네. 돈은 적고 일만 시키네’ 하고 있다면 일은 안 하고 돈을 많이 주는 데가 어디냐? 일은 안 하고 신발 주고 옷 주고 잠재워 주고 하는 데가 어디냐? 교도소다. 그런 데로 들어가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하나님을 닮는 소원 목적으로 사는 것이, 그런 도덕성 그런 취미성 이게 하나님 아버지가 거룩히 여김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정신 사상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너를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거룩 쪽으로 돼 나가야 하는데 그게 아닌 세상 길바닥에 앉아서 ‘돈 한 푼 주십시오’ 하고 구걸을 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신령계와 물질계를 만들어 놓은 것은 자타의 구원에 활용하라고 주신 것인데 달라고만 하고 있으니 하나님 아버지가 너를 진짜 얻어먹는 거지로 만들 수도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타락된 세상에서 거지행세를 하고 있는데 가만 두시겠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입어야 하나님 아버지가 거룩히 여김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야 하나님 아버지가 거룩히 여김이 되는 것이다.
속성적으로 인격적으로 성품적으로 거룩한 하나님을 닮아야 복 있는 사람이다. 사람이 복된 사람으로 돼 있어야 복이 따라다니는 거지 사람은 저주받을 사람으로 돼 있는데 복을 달라고 하면 뭐가 되겠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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