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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후6: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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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40410 |
“지금”, 은혜와 구원
고후 6:1~13, 성령강림 후 넷째 주일, 2021년 6월20일
기독교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바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이 바울이나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기록되었습니다. 기독교 교리의 중요한 내용은 대부분 바울의 편지에 근거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칭의론이나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론을 비롯하여 종말론과 부활론, 은사론 등등, 대부분의 기독교 도그마가 이에 해당합니다. 바울을 빼고는 기독교 현상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위대했던 바울도 생전 당시에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교회 안과 밖에서 어려움을 당하다가 기원후 60년대에 죽었습니다. 그가 어디서 죽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바울이 50년경에 세웠던 고린도 교회 마저 바울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한 유랑설교자들에게 영향받은 교인들은 바울을 노골적으로 적대시했습니다.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고후 2:5)라거나 “불의를 행한 자”(고후 7:12)라는 표현이 이들을 가리킵니다. 고린도 교회는 신앙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었습니다. 고전 1:12절에 따르면 고린도 교회 안에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가 있었습니다. 방언 등의 은사를 강조하는 열광주의 신자들도 많았습니다. 우상에 바쳐졌던 음식을 먹어도 되는지 아닌지로 인해서 서로 다투기도 했습니다. 바울과 연관해서 불거진 직접적인 문제는 사도권입니다. 바울은 예수님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인물이니 사도의 권한을 부여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바울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 일부가 오늘 설교의 본문입니다. 이 본문은 종교 언어로 포장된 그럴듯한 가르침이 아니라 바울이 처한 실존적인 고백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어떤 태도로 자기 삶을 받아들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은혜의 때, 구원의 때
바울의 최대 관심은 복음의 본질을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복음의 본질이 명확해지면 교회 안에서 불거진 다른 문제들은 저절로 해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복음의 본질을 말한다는 것은 교회가 나아가야 할 큰 방향을 잡는다는 뜻입니다. 본문 2절에는 기독교인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문장이 나옵니다. 이런 문장은 우리가 외워두는 게 좋습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이 문장에서 키워드는 은혜와 구원입니다. 복음의 본질을 분명하게 가리킵니다. 복음은 은혜를 은혜답게, 구원을 구원답게 경험하게 하는 능력이 아니겠습니까. 이것 말고 복음에서 더 중요한 게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말 성경이 ‘은혜’라고 번역한 헬라어는 ‘유프로스덱토스’입니다. 이 헬라어 단어는 헬-영 사전에 acceptable로 나옵니다. KJV은 우리말 성경의 ‘은혜 받을 만한 때’를 ‘the accepted time’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루터도 이와 비슷하게 번역했습니다. 이 두 성경의 표현이 우리말 성경보다 더 정확한 번역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말 ‘은혜’로 번역되는 헬라어는 ‘카리스’(고후 1:2, 6:1, 13:13)라고, 따로 있습니다. 크게 보면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졌다는 사실 자체가 은혜이니 ‘은혜 받을 만한 때’라는 우리말 번역도 틀린 건 아닙니다.
바울은 은혜와 구원에 관한 문장을 쓰기 전에 이와 관련된 구약의 한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사 49:8절입니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여기서 ‘은혜를 베푼다’라는 표현은 헬라어 ‘덱토스’의 번역입니다. 이 덱토스라는 단어도 ‘유프로스덱토스’와 거의 비슷한 뜻입니다. 바울이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토씨만 바꿔서 똑같이 사용한 것입니다. 바울이 인용한 이사야 선지자의 표현에 따르면 하나님의 은혜는, 즉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진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마치 아이의 말에 어머니나 아버지가 귀를 기울이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때에 여러분은 그런 경험을 하셨습니까?
바울이 인용한 이사야 선지자의 표현에 따르면 ‘구원의 날’은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날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실 때만 구원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돕는다는 사실은 아무에게나 경험되지는 않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 없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자기가 똑똑해서 공부도 잘하고 돈도 잘 벌고 다른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오히려 인정받으면서 산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인들에게는 이런 특징이 더 두드러집니다. 우리는 아는 것도 많고 가진 것도 많습니다. 앞으로 자기 인생을 멋지게 펼칠 기회도 널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이라는 말이 하찮게 들릴 정도입니다. 이런 생각이 옳을까요? 겉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으나 속으로는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부자들도 삶이 불안하기는 가난한 사람과 다를 게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이름을 떨치면서 사는 나름 전문가들도 남에게 인정받지 못할까 하여 초조해합니다. 미모가 뛰어난 사람들은 미모에 더 신경 씁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세속적인 차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병들었을 때 병이 낫고, 사업이 망했을 때 사업을 다시 일으키고, 자식들도 다 잘되게 한다는 식입니다. 그런 바람이야 인지상정이지만, 그리고 담임 목사로서 저도 여러분의 일상이 다 잘되기를 바라고 그렇게 기도도 하지만, 그게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말씀의 근본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그런 차원에서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생각하면 언젠가는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문제들은 하나님보다는 세속 권력이 더 잘 해결해줄 겁니다. 우리 인생의 크고 작은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서 우리의 삶 자체가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여전히 불안하고 허무하고 외롭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은 세상살이에서 당하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차원이라면 바울은 철저하게 실패한 인물입니다. 그는 예수 믿은 뒤에 죽을 때까지 고생만 했습니다. 그의 인생은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도우신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4~5절에서 우리는 그가 어떤 어려움을 당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충 몇 단어만 열거하겠습니다. 환난, 궁핍, 고난, 매 맞음, 갇힘, 난동, 수고로움, 자지 못함, 먹지 못함이 그것입니다. 그는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시고 자신을 도우신다고 말하는 겁니까? 그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무조건 믿고 보자는 광신자인가요?
하나님의 의
이에 대한 대답을 여러분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 대답이 옳은지 아닌지를 확인하시라는 뜻으로 저의 생각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의 생각이 아니라 바울의 생각을 해석해서 전달하는 겁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앞 구절인 고후 5:21절에서 그리스도론의 핵심을 짚었습니다. 그 핵심이 바로 우리가 찾는 대답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는 사실이 바울에게는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곧 은혜이며 구원이며, 도우심이었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진수였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생명 세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외국 여행을 준비하는 모임이 있다고 합시다. 고등학교 동창이라도 좋고, 교회 단체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들은 여행 계획을 짰습니다. 준비할 것도 많습니다. 여행 경비 때문에 신경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장소에 관해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코로나19 사태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 나라에 입국할 수 있도록 허락받는 일입니다. 백신 접종이 완료된 사람에게만 입국의 자유가 보장되는 제도가 시작되었다면 모든 여행객의 꿈은 백신 접종 완료일 겁니다. 하나님의 의는 일종의 백신 접종 완료 증명서와 같습니다. 이게 해결된 사람은 코로나19 시대에도 설레는 마음으로 해외여행 출발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이런 설명으로 충분하지 않은 분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의가 실제로 무슨 뜻인지에 관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살이에서 어떤 일을 요구받습니다. 평생 그런 요구를 따라가면서 삽니다. 학생들은 높은 점수를, 노동자들은 노동의 강도를 요구받습니다. 대통령은 거의 신적인 능력을 요구받습니다. 세상은 사람의 능력을 심사해서 등수를 매깁니다. 높은 등수를 받으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거기까지는 어쩔 수 없습니다. 문제는 높은 등수나 점수를 얻지 않으면 인간의 품위 있는 삶이 불가능하다는 고정관념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는 말은 그런 점수나 등수에 상관없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품위를 누릴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세상이 요구하는 높은 등수와 점수에 매달리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세리나 죄인들처럼 낮은 점수를 받은 사람들과 더 가깝게 지내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말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눅 5:32)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품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품위가 바로 하나님의 의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게 과연 말이 되나요? 세상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만으로 우리가 실제로 품위 있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여기 대학교 강의실을 상상해보십시오. 거기에 교수와 학생이 있습니다. 누가 봐도 교수는 등수가 높은 사람이고 학생은 낮은 사람입니다. 교수는 지적으로 교만할 수 있습니다. 공부 못하는 학생을 무시하기도 합니다. 그의 영혼은 늘 불안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학생은 실력이 부족하지만, 지적인 호기심이 강합니다. 친구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예수 믿는 학생이라고 합시다. 그는 친구나 교수를 모두 하나님 안에서 형제와 자매로 여깁니다. 경쟁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사랑을 베풀 대상들로 여깁니다. 남에게 인정받고 사랑받으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남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겁니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는 허락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이게 쉽지는 않을 겁니다. 저도 여전히 멀었습니다. 그러나 방향만은 분명합니다. 그 방향을 향해서 꾸준히 나아갑니다. 이렇게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셨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기에 바울은 ‘지금’이 바로 은혜(받아들여짐)의 때요 구원의 날이라고 말할 수 있던 겁니다.
“지금”
이 대목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관점은 바울에게서 은혜의 때와 구원의 날이 ‘지금’이라는 사실입니다. 은혜와 구원이 옛날에 한 번 일어났다거나 미래에 일어난다는 게 아니라 바로 ‘지금’ 일어나는 겁니다. 지금 여기서 은혜와 구원을, 즉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설교한 내용보다 지금 말씀드리는 내용이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지금 여기에 ‘리얼리티’로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중요하기에 바울은 “보라 지금은”(behold, now)이라는 표현을 두 번 반복했습니다.
‘지금’을 숫자로 표기하면 2021년 6월20일 오전 11시50분(?)입니다. ‘지금’은 이런 숫자 표기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지난날의 모든 시간이 ‘지금’에 연결되고, 이후의 모든 시간도 역시 ‘지금’에 연결됩니다. 과거의 시간이 흘러서 지금이 되었고, 지금은 미래로 이어집니다. 빅뱅 이후 그 무한한 시간이 ‘지금’ 안에 들어왔습니다. 지금은 시간의 차원만이 아니라 공간의 차원에서도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여기 우리가 예배하는 이 공간은 거의 무한에 가까운 우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우리가 계산해낼 수는 없으나 연결된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각자의 인생을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지금’은 지난날의 여러분이 살아온 삶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앞으로 살아갈 미래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과거와 미래가 ‘지금’ 안에 들어 있습니다. 신비로운 순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신비로운 차원의 시간인 ‘지금’을 하이데거는 독일어로 ‘Augenblick’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순간’이라는 뜻입니다. 이 순간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때이기도 하고, 죽는 때이기도 합니다.
‘지금’이 은혜의 때이며 구원의 날이라는 말은 지금 여기서 이미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우리가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는 이미 영생을 얻은 겁니다. 지금도 여전히 삶이 고단하고 짜증 나는 일도 많은데, 무슨 영생이냐, 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시간에 관한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시간을 양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질적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시간을 길이만 보는 게 아니라 시간의 깊이로 들어가는 겁니다. 여러분이 살아온 세월이 얼마나 긴지 생각해보십시오. 30년, 40년, 60년, 70년이 되었을 겁니다. 길이를 잴 수 있나요? 인생을 지나온 분들은 모두 압니다. 지난 시간이 한순간(Augenblick)이었다고 말입니다. 제가 죽는 순간에 한평생을 한순간으로 경험할 것입니다. 45억 년이 된 지구도 한순간입니다. 그 한순간을 깊이 있게 바라보면서 영생을 경험하는 사람이 있고, 거기에 매달려서 허무 속으로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의 실제 인생살이가 한순간이니 큰 의미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우리 일상의 매 순간이 의미 충만합니다. 우리의 학교생활, 가정 살림, 노동, 정치, 예술, 문학 등등, 그리고 숨쉬기와 걷기와 먹고 배설하기 등등, 모든 일상은 소중합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신비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게 보이지 않는다고요? 제가 무슨 말을 더 보탤 수 있겠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그걸 느끼지 못한다는 말은 눈을 감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니면 진한 선글라스를 끼고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라고 고린도 교인들을 권면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로 경험한 사람의 영혼이 얼마나 풍요로운지를 바울은 8b~10절에서 운율을 갖춘 시(詩) 문장으로 묘사했습니다. 마지막 문장인 10절만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저도 죽기 전에 바울의 이런 경지에 이르고 싶습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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