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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5:25-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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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40642 |
“딸아!”
막 5:25~34, 성령강림 후 다섯째 주일, 2021년 6월27일
열두 살 난 딸 아이가 중병에 걸렸다는 말을 (가버나움으로 추정되는) 회당 책임자인 야이로에게 듣고 예수님은 그 사람의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에워쌌습니다. 매우 어수선한 장면이 연출되었을 겁니다. 인기 있는 정치인이나 연예인에게 몰려드는 군중들을 생각해보면 됩니다. 어떤 여자가 조심스럽게 예수님에게 접근해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습니다. 예수님과 악수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었겠지요. 요즘이라면 스마트폰으로 셀카 찍으려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그 와중에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내 옷에 손을 댄 사람이 누구신가요?”하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언급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에워싸서 밀고 당기는 상황이니 특별한 의도 없이 누구라도 옷에 손을 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옷에 손을 댄 여자를 확인하려고 둘러보았습니다. 이 여자는 두려워하면서 예수님에게 속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니 자기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이겠지요.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평안히 돌아가서 건강하게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 본문인 막 5:25~34절에 나오는 이야기의 요약입니다.
12년 혈루증 여인
마지막 구절인 34절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 구절에는 마가복음을 비롯하여 신약성경에 나오는 복음서 전체의 핵심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제가 다시 34절을 읽어볼 테니까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으로 들어도 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이 여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딸아!”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딸은 하나님의 딸이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세상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아들이거나 딸입니다. 우리의 세상살이에서는 그런 차원이 대개 무시됩니다. 하나님의 딸이라는 호칭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 여자를 세상의 관점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대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여자에 관한 세상의 관점은, 즉 이 여자의 적나라한 실존은 25, 26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5절에 따르면 이 여자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았습니다. 하혈 증상입니다. 이로 인해서 이 여자는 오랜 세월 빈혈에 시달렸을 겁니다. 보기에 따라서 큰 병이 아닌 것 같으나 실제로는 정상생활하기가 어렵습니다. 만성 편두통이나 심한 만성 위장장애도 비슷합니다. 더군다나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여성들의 하혈 증상을 부정한 병으로 보았습니다. 그것 자체가 죄였습니다. 율법이 그렇게 규정합니다. 이 여자는 죄의식에 갇혀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성 소수자의 상황과 비슷할지 모릅니다. 부끄러운 병을 자그마치 12년이나 앓았으니 그의 몸과 정신이 얼마나 피폐해졌을지 상상이 갑니다.
26절에 따르면 이 여자는 의사들을 찾아다니느라 더 큰 어려움에 떨어졌습니다. 당시 문헌에 나오는 의사들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이중적이었습니다. 천사와 같은 의사도 있었고, 지옥에 떨어질 의사도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좋은 의사를 만나지 못했나 봅니다. 가진 것을 다 허비하였고, 아무런 효험도 없었으며, 병만 더 중해졌습니다. 이 여자는 지금 완전히 나락에 떨어진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런 신세가 되면 주변 사람들도 떠나고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삶을 포기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던 차에 이 여자는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 소문도 여러 가지였습니다. 예수가 혹세무민한다는 소문도 없지 않았습니다. 이 여자가 들은 소문은 좋은 소문이었나 봅니다. 오늘 이야기 바로 앞에는 소위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 사건은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 소문이 인근에 파다하게 퍼졌고, 이 여자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자기 인생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완전히 막혀 두문불출하던 이 여자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용기를 내어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예수 앞에 나서서 대성통곡하면서 도와달라고 울부짖지는 않았습니다. 예수의 몸에 직접 손을 대지도 못했습니다. 부끄러워서 그랬을까요? 예수 옷깃만 살짝 만졌다고 합니다. 그녀의 생각을 28절이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이런 문장을 우습게 생각하는 이들도 없지 않습니다. 예수의 옷에 손을 댄다고 해서 12년 된 난치병이 갑자기 치료된다는 말은 누가 봐도 유치해 보입니다. 자연과학과 의학의 관점에서 이런 생각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몸을 비롯한 만물이 늘 이런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과학적인 논리로만 해명되는 건 아닙니다. 물리학이나 생물학, 그리고 의학도 세상 전체를 해명하는 유일한 잣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현대 물리학도 확률로만 옳은 학문입니다. 예를 들어 코로나19 바이러스 백신을 맞으면 항체가 생성될 확률이 80~90%로 나타납니다. 항체가 생성되더라도 바이러스를 완전히 막아내지 못합니다. 의학적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 중에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과정을 통해서 생명이 연장된 사람이 있습니다. 확률적으로 아주 낮지만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그걸 보통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몸을 비롯하여 사회 현상과 역사와 세상과 우주는 우리가 그 깊이를 다 파악할 수 없을 정도의 근원에 닿아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예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는 이 여자의 생각을 존중합니다. 더 나아가서 이 여자의 믿음이 부럽습니다. 그의 생각과 행동에서 일상의 구원론적 깊이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여자가 손을 댄 예수의 옷은 소소한 사물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늘 대할 수 있는 사물들입니다. 책과 책상, 밥그릇, 자전거, 시계, 사진기, 신발, 커피, 토마토, 블루베리, 나무와 꽃, 바람과 햇살 등등입니다. 이런 소소한 사물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의 옷일 수 있습니다. 거기에 손을 대면 우리는 생명의 근원에 접속되는 겁니다. 이런 일을 시시하게 여기는 사람은 세상이 말하는 화끈한 일에, 예를 들어서 대통령 선거 등등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겠지요. 운이 좋으면 그 화끈한 일을 성취할 수는 있겠으나 그런 데만 매달리면 우리 인생에서 정작 중요한 일과는 거리가 멀게 됩니다. 모처럼 유럽 여행을 간 사람이 그들의 다양한 문명과 문화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백화점에 가서 일류 브랜드 옷이나 상품을 사는 일에만 관심을 두는 태도와 비슷합니다.
전인 구원
29절은 이 여자가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그 현상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신문 보도처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그녀의 병이 완전히 나은 것일 수도 있고, 앞으로 언젠가 치료될 것이라는 확신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12년 동안 매달렸던 그 문제가 자기 인생에서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여자에게는 몸의 병도 힘들지만, 그 병으로 인해서 벌어지는 비인간적인 상황이 더 힘들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혈루증을 앓는 여자는 당시에 부정하다는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런 사회적인 시선만 없었다면 이 여자가 재산을 다 쏟아부으면서까지 여기저기 의사를 따라다니지 않았을 겁니다. 오늘날 가난도 가난 자체보다는 무능력한 사람이라는 평가가 더 힘들게 하는 거 아닙니까. 무능력한 게 아니라 청렴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면 아무도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을 겁니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라는 표현은 단순히 몸이 치료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전인 구원을 경험했다는 뜻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를 좀더 분명하게 설명해야겠습니다.
33절에 따르면 이 여자는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면서 예수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말했다고 합니다. 이 문장은 특이합니다. 우리말 성경은 이 여자가 ‘사실’을 여쭈었다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실’이라는 단어를 KJV은 ‘truth’라고 번역했고, 루터는 ‘Wahheit’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λ?θεια’입니다. 이 알레테이아는 요 14:6절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 ”라고 할 때의 그 진리에 해당합니다. 철학적이고 함축적인 의미가 담긴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화에서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여자에게 일어난 일은 단순히 병이 치료되었다는 사실(팩트)이 아니라 그녀의 인격 전체가 새로워지는 궁극적인 복음 사건(이벤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즉 이 여자는 예수님에게 “당신이야말로 저에게 참된 생명을 주시는 진리입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 경험으로 그녀는 두려워하고 떨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진리를 일상에서 자주 경험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이 여자의 난치병이 치료되었다는 사실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 병은 치료되었다고 해도 우리는 다시 병들어 죽습니다. 병만이 아니라 다른 문제로 다시 고통당합니다. 평생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애를 쓰다가 인생이 끝납니다. 12년 동안 의사를 쫓아다니느라 재산을 다 쏟아부은 이 여자처럼 말입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평생 온갖 염려와 걱정과 욕심, 그리고 미움과 혐오를 안고 사는 겁니다. 참된 의미에서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인생을 끝내는 겁니다. 그게 자연스러운 인생살이라고 착각하면서 말입니다. 이 여자는 다행스럽게 자신의 전체 인격이 달라지는 진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사실(알레테이아)을 여쭈니”라는 고백은 그녀만이 아니라 이 이야기를 전하는 마가복음 공동체 모든 사람의 고백이고, 오늘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딸아!”
예수님은 이 여자를 “딸아!”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의 딸입니다. 이제 그녀는 더는 의사를 찾아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치료비를 준비하려고 빚을 낼 필요도 없습니다. 죄인이라는 평가도 개의치 않게 되었습니다. 진리를 알았으니 더는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34절에서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세 마디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딸로 신분이 바뀐 사람에게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라.”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1)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너무 흔하게 들어서 여러분에게 시큰둥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시늉은 했을지 몰라도 믿어보지 못했기에 그런 겁니다. 믿음은 일종의 백척간두에 서는 사건입니다. 이 여자를 보십시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으면서 치료비로 돈을 다 쓰고 병은 더 중해진 상태에서 예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마지막 희망을 예수에게 걸었습니다. 천만다행입니다. 마지막 희망을 사기꾼에게 걸었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인생살이에서 추구하는 여러 옵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닙니다. 가끔 그런 방식으로 교회를 다니는 분들이 있습니다. 등산 동아리 활동을 하듯이 교회 동아리 활동을 하는 겁니다. 죽은 다음에 혹시나 모를 천국에 가려고 보험을 드는 심정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믿음이 불가능합니다. 믿음의 능력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구원을 얻지도 못합니다. 마약 같은 사이비 구원에 만족하겠지요. 세상의 모든 일상을 포기하거나 무시하고 교회 활동에만 전념하라는 뜻으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은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이건 영혼의 문제입니다.
백척간두의 심정으로 마지막 희망을 건다는 말을 쉽게 이해하려면 현재 여러분의 소유가 다 없어지는 순간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순간이 닥쳐도, 아니 그런 순간에서만 가능한 믿음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제자들은 가족과 직업과 재산을 포기하고 예수를 따랐다고 합니다. 그들이 바보가 아니라면 모든 것을 버려야 할 정도로 믿고 따라야 할 특별한 대상을 발견했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2)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문장에서 구원은 치료(힐링)받았다는 뜻입니다. 육체의 힐링이자 영혼의 힐링이었습니다. 그제야 그녀는 평안을 선물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실을 그녀에게 확인해주셨습니다. “휘파게 에이스 에이레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에이레네는 히브리어 ‘샬롬’입니다. 그녀는 12년 동안 평화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당연합니다. 자기 병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놓고 말할 수도 없었고, 아무리 고쳐보려고 해도 안 됐습니다. 매 순간 노심초사하면서 살았습니다. 샬롬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인생이었습니다.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서 그녀는 치료받아 평화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과 이후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지금 설교를 듣는 여러분의 마음이 복잡할 겁니다. 이런 평화로운 삶이 말처럼 잘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아십니다. 예수를 믿는대도 여전히 영혼이 혼란스럽고 복잡합니다. 일이 잘 풀리면 풀리는 대로, 안 풀리면 안 풀리는 대로 우리의 삶이 요동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성경이 말하는 저런 평화는 실제적인 우리의 삶에서는 아예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대충 세상이 말하는 차원의 평화만 알지 예수로 인한 평화가 무엇인지 실제로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만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여러분 옆에 함께하신다고 상상해보세요. 외롭거나 가난해도 기쁘고 평화로울 겁니다. 문제는 우리가 예수를 절대적인 대상으로 경험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핸드드립 커피 맛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그 설명을 들어도 실감할 수 없는 거와 비슷합니다.
3)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마지막으로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하게 살아가시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병은 단순히 혈루증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모든 악한 세력입니다. 온갖 억측과 망상과 피해의식과 자기 과시와 자기 집착입니다. 우리의 인생 경험에 따르면 그런 악한 세력에서 벗어나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딸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소중한 삶을 탕진하게 만드는 병에서 벗어나서 영적으로 건강하게 살아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사는 세상이 되도록 서로 노력하고 연대해야 합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공정하지 못해서 화만 난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신가요? 자신의 인생만 잘 안 풀리는 듯하여 짜증이 난다고요? 정말 그런가요? 예수를 만나기 전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그랬습니다. 이 여자는 하나님의 딸로 인정받았습니다. 자, 이제 우리도 남은 인생을 하나님의 딸로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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