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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18-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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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기석 목사 |
참고 : | 2020/12/25 청파감리교회 http://www.chungpa.or.kr |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마1:18-25
(2020/12/25, 성탄절)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나서,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서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다. 요셉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주님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 들여라. 그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이르시기를,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요셉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서, 주님의 천사가 말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아들을 낳을 때까지는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아들이 태어나니, 요셉은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혁명의 씨앗이 담긴 노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세상 곳곳에서 벼랑 끝에 내몰린 듯 위기에 처한 사람들, 그리고 외로운 이들과도 함께 하시길 빕니다. 차마 성탄의 기쁨을 노래하기 어렵습니다. 4년 넘게 비닐하우스 일하던 캄보디아 노동자 속헹 씨가 영하 18도의 혹한에 난방이 되지 않는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자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음의 원인이 간경화증이라는 보도를 보았습니다만 어쨌든 무정한 세상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셈입니다. 조금 더 잘 살아보고 싶어 찾아왔던 이 땅에서 그의 꿈은 무참하게 무너졌습니다. 억울함을 풀어달라며 여전히 차가운 거리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분들도 많습니다. 공의와 정의가 무너질 때 의인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이게 우리의 적나라한 현실입니다. 그러하기에 더욱 주님을 우리 가운데 모셔야 합니다. 우리 삶의 지향을 바로 하고, ‘아벨‘로 상징되는 사회적 약자들을 귀히 여길 수 있는 세상을 열기 위해서라도 주님을 우리 중심 가운데 모셔야 합니다.
부활절에 이어 성탄절까지 비대면 예배로 드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FM 라디오는 성탄절기에 맞는 곡들을 선정하여 내보내고 있지만, 일상의 자리에서는 성탄 분위기를 느낄 수 없습니다. 5명 이상 모임이 금지되고 있기에 그 쓸쓸함은 더욱 깊어만 갑니다. 어쩌면 첫 번째 성탄절의 분위기가 이러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유대인들은 아기들이 태어날 때면 마을 악사들이 그 집 주위에 둘러서서 환영의 연주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탄생은 달랐습니다. 환영받지 못한 탄생이었습니다. 산모가 몸을 누일 곳조차 없었습니다. 그 황량하고 외롭고 두려운 밤이 떠오릅니다. 세상의 구원자는 그렇게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의 빛은 그런 어둠을 찢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누가복음은 목자들이 한 밤중에 천사와 하늘 군대가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고 말합니다.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눅2:14). 주님이 태어나신 시간이 밤인지는 알 수 없지만 교회 전통은 오랫동안 주님 탄생의 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 거룩한 밤 O Holy Night‘, ‘거룩한 밤 고요한 밤’이라는 곡이 대표적입니다. 독일어로 성탄을 나타내는 단어는 바이나흐튼Weihnachten입니다. ‘성스러운 밤‘이라는 뜻입니다. 밤은 어둠의 시간, 불확실한 시간이기도 하지만, 침묵의 시간, 집중된 시간, 성숙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첫 번째 성탄절 하면 들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 하늘에서 들려온 노랫소리, 아름답고 목가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떠오릅니다. 그러나 천사들이 부른 노래에는 실은 혁명의 씨앗이 담겨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변방에서 태어난 아기가 로마의 평화라는 거짓 평화를 깨뜨리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평화는 군사력에 근거한 평화였습니다. 로마 시인 비르길리우스는 서사시 <아이네이드>에서 로마의 평화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오 그대, 로마인이여, 힘으로 나라들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 평화의 길을 부과하고, 정복된 자들을 살려주고, 거만한 자들은 짓밟는 것이 그대에게 맡겨진 일이다.“(리차드 A. 호슬리, <크리스마스의 해방>, 손성현 옮김, 다산글방, p.64에서 재인용)
굴복하기를 거부하는 이들을 짓밟는 것을 소명으로 여기라는 말은 얼마나 두려운 말입니까?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무엇을 주고 빼앗는 것은 로마인의 결정에 달려 있고,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에게 굴복하는 것은 신들이 미리 정해 놓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황제의 절대권력은 결과적으로 그를 신적 존재로 격상시켰습니다. 베들레헴의 외로운 밤에 태어난 예수는 그런 황제가 다스리는 세상에 정반대의 질서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성탄절은 바로 그런 칠흑같이 어둠을 찢고 별 하나가 탄생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름이 곧 소명
요셉과 마리아는 어둠을 찢고 그 빛이 도래하도록 한 통로였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약혼녀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이들에게 당신의뜻을 전하기 위해 꿈이라는 또 다른 현실을 사용하실 때가 있습니다. 꿈에서 우리는 비합리적인 경험을 하곤 합니다. 꿈에서는 저도 수영선수처럼 넓은 호수를 자유롭게 오가기도 하고, 아무리 달려도 지치지 않습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꿈을 통해 메시지를 전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제부터 벌어지는 사건은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혹은 불필요한 사건이라는 뜻일 겁니다.
천사를 통해 마리아가 잉태했다는 소식을 들은 요셉은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습니다. 마태는 그가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소개합니다.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지만 많은 것이 생략된 표현입니다. 요셉도 번민의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배신을 당했다는 쓰라림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자기 분을 주체하지 못하며 길길이 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설핏 든 잠결에 그는 천사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주저하지 말고 마리아를 맞아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천사는 이어 아기의 이름을 두 가지로 일러줍니다. ‘예수’와 ‘임마누엘’이 그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름 속에 이미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주님의 운명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마치 독수리가 날개를 펼쳐 새끼들을 받아 업어 나르듯이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인도하셨다(신32:11)고 고백했습니다. 이사야는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 불 속을 걸어가도 동행하며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노래했습니다(사43:2). 시편 시인은 “내가 비록 죽음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시23:4)라고 고백했습니다. 임마누엘이신 주님은 땅에 내려와 인간의 동행이 되신 분이십니다.
곤고한 세월을 보내는 이들은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 같아 낙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사라에게 쫓겨나 광야에서 방황하던 하갈은 울부짖는 아들 이스마엘을 보며 깊이 절망했습니다. 하갈은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비통한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우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소설가 이승우 선생은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이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땅의 신음소리는 하늘에서는 가장 큰 소리. 못 들을 수 없다.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숱하게 내보냈던, 언어가 되지 못한, 될 수 없었던 신음소리를 그분이 친히 듣고 있었다는 말이 그녀의 내부에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들었습니까, 당신이? 그녀는 터져나오는 울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울었다.“(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p.71)
천사는 비통하게 울고 있는 하갈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이를 안아 일으키고, 달래어라. 내가 저 아이에게서 큰 민족이 나오게 하겠다”(창21:18). 하나님이 눈을 밝히시자 하갈은 그곳에서 샘을 발견했습니다. 하갈은 물을 길어 아들에게 먹였습니다. 샘은 이미 그곳에 있었지만 절망의 어둠이 그 샘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들으시는 하나님, 보시는 하나님, 동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시간 속에 들어와서 고통 받는 인류의 희망이 되셨습니다.
∙프로불참러
임마누엘이신 주님은 세상에서 고통 받는 이들의 동행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절박한 처지의 나환자, 청각 장애인, 시각 장애인, 보행 장애인, 굶주린 무리, 불결하다고 취급받던 사람들, 이방인 곁에 늘 함께 계셨습니다. 요즘 인기를 얻고 있는 개그맨 조세호씨에게 한때 ‘프로불참러’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어느 날 가수 김흥국씨가 “너 000 결혼식에 왜 안 왔냐?“고 힐난조로 묻자 그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제가 알지 못하는 사람인데요”라고 대답했다지요? 이 어이없는 상황이 개그의 소개가 되어 다양하게 변주되면서 그는 프로불참러라는 캐릭터로 한동안 인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제가 이런 우스갯소리를 하는 까닭은 ‘프로불참러‘라는 말이 제 양심을 찔렀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계신 곳은 세상의 궁벽진 곳, 그늘진 곳, 아픔의 자리이건만 우리는 한사코 그런 곳을 피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쾌적하고 안전하고 편안한 곳만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부재중’ 팻말만 내걸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마음이 아뜩해집니다. 2천 년 전에 이미 세상에 오신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다가오고 계십니다. 매년 성탄절을 기념하는 것은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사건을 현재화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워드 서먼이라는 분의 ‘크리스마스의 과제’라는 시가 바로 그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천사들의 노래가 조용해질 때
하늘의 별들이 사라졌을 때,
왕들과 왕자들이 편안히 머무를 때,
목동들이 그들의 양떼에게로 돌아갔을 때,
크리스마스의 과업은 시작됩니다.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고치며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고
옥에 갇힌 사람들을 풀어주며
나라들을 다시 세우며
사람들 가운데 평화를 가져오며
마음에 음악을 만들어 냅니다.“
(로사 신현림 엮음, <아일랜드 축복 기도>, 사과꽃, p.79)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외로운 이들에게 따뜻하고 정감어린 엽서를 보내거나 마음을 담은 작은 선물이라도 보내보십시오. 그늘진 곳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것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번거롭고 마음이 내키지 않을지라도 일단 아픔의 자리에 한번쯤 들러보십시오.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사는 이들이야 다른 이들의 존재가 그렇게 소중하게 다가오지 않을지 몰라도, 고독한 이들에게는 누군가가 건네오는 평안의 인사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을 겁니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이들이야말로 성탄의 종을 울리는 이들이라 하겠습니다.
∙다리 놓는 사람
주님이 오심을 기뻐하는 이들은 이제 스스로 주님의 동행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에 원하시는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마가는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세우신 까닭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그들을 내보내어서 말씀을 전파하게 하시며,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막3:14-15). 척박한 역사의 대지에 하나님 나라의 꿈을 심고,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풀어주는 것이야말로 주님의 제자로 부름 받은 이들의 소명입니다. 그 소명을 잘 감당할 수 있는 비결은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라는 말 속에 그 답이 있습니다. 비전을 함께 나누는 이들이 곁에 있어야 우리는 쉽게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게 됩니다. 고립되었다는 느낌이야말로 절망의 뿌리입니다. 홀로 있는 시간도 물론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좋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은 그 꿈을 공유하는 이들과 자꾸 만나야 합니다. 그 꿈을 엮어야 비전이 되고, 비전이 구체화될 때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당장 처리해야 할 일에 급급해서 영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못합니다. 영혼은 끊임없이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우리를 자꾸만 갈라서게 만듭니다. 꽤 많은 이들이 세상과 자기를 연결하는 다리가 끊겼다고 느낍니다. 그 분리된 느낌이 곧 소외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과 땅을 잇는 다리가 되신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허무시어 서로 통하게 만드셨던 것처럼 우리도 ‘다리 놓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다리를 놓을 수 있을까요? ‘사랑의 수고’(살전1:3)를 해야 합니다. 사랑은 ‘하나 되게 하는 힘’입니다.
성탄절은 우리에게 사랑의 모험을 시작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의 과제 앞에 서 있습니다. 고난 받는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 곁에 다가서고, 더 이상 억울한 죽음이 발생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진력해야 합니다. 그 쓸쓸했던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기억합니다. 예수님을 외롭게 하지 않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통해 땅의 신음소리가 줄어들기를, 또한 주님의 평화가 세상에 스며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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