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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2:25-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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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기석 목사 |
참고 : | 2020/12/27 청파감리교회 http://www.chungpa.or.kr |
시므온의 결정적 순간
눅2:25-35
(2020/12/27, 성탄 후 제1주)
[○그런데 마침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므로,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고, 또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계셨다. 그는 주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할 것이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가 성령의 인도로 성전에 들어갔을 때에, 마침 아기의 부모가 율법이 정한 대로 행하고자 하여, 아기 예수를 데리고 들어왔다. 시므온이 아기를 자기 팔로 받아서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하였다. "주님, 이제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 종을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가게 해주십니다.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모든 백성 앞에 마련하셨으니, 이는 이방 사람들에게는 계시하시는 빛이요,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시므온이 아기에 대하여 하는 이 말을 듣고서, 이상하게 여겼다. 시므온이 그들을 축복한 뒤에, 아기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으며, 비방 받는 표징이 되게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칼이 당신의 마음을 찌를 것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가난한 부부의 헌신
세상의 빛으로 오신 주님이 은혜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천천히 시간의 강물을 건너다 보니 벌써 52번째 징검돌 위에 섰습니다. 이제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새해입니다. 아슬아슬한 나날이었습니다. 자칫 발을 헛디딜까 무서워 주위를 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자책과 후회에 사로잡히곤 하는 연말 무렵 선물처럼 다가온 성탄절은 우리에게 하늘로부터 시작되는 근원적 희망을 품고 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빛을 향해 한 걸음씩 함께 나아가자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 마음에 도사린 날카로운 무기들을 내려놓고, 다른 이들과 함께 평화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 손에 악기를 들라고 말합니다. 평화의 길을 끝까지 걷기 위해서는 믿음과 인내와 용기가 필요합니다.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지중해 세계를 장악했던 로마는 스스로 신의 나라를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세상의 질서를 해체하기 위해 가장 연약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여린 듯 보여도 대지를 들어올리며 모습을 드러내는 새순처럼 예수님은 어둠을 찢고 별처럼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여드레가 되는 날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법에 따라 정결예식을 행하고 아기를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레위기 성결법전은 아기를 출산한 여인들은 삼심삼 일 동안 집에 머물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레12:4). 산혈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기한이었습니다. 아기의 봉헌 또한 성경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어머니의 태를 처음 열고 나온 것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다 하나님께 바쳐야 했던 것입니다(출13:2, 12). 물론 그것은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가난했기에 정결법의 규정에 따라 어린 집 비둘기 두 마리를 드렸습니다. 누가는 요셉과 마리아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신실한 사람들임을 이런 제의 참여 기사를 통해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령에 이끌리는 사람
그 후에 누가는 시므온을 등장시킵니다. 그를 소개하는 말은 세 가지입니다. ‘의롭고 경건한 사람‘,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 ‘성령의 감화 속에 사는 사람‘이 그것입니다. 그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남이 없었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품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란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는 메시아의 도래를 갈망하던 사람입니다. 시므온이라는 이름은 ‘경청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하늘과 땅의 작은 기미라도 예민하게 알아차리는 새벽의 사람입니다.
누가복음의 예수 탄생 기사를 유심히 보면 성령께서 그 중심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잉태도 성령에 의한 것이었고, 마리아가 유대 산골에 사는 엘리사벳을 찾아갔을 때 뱃속의 아이가 뛰노는 것을 보고는 성령이 충만하여 마리아를 축복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므온도 그리스도를 보기 전까지는 죽지 않는다는 성령의 지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가 시대적 우울에 갇히지 않고 오히려 기대에 찬 마음으로 살았던 것은 성령의 은총이었습니다. 그 운명의 날 그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고, 깨닫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깊이 접속되도록 하십니다. 성령은 또한 우리를 짓누르고, 우리 생명력을 고갈시키는 것들을 제거해 주십니다. 죄책감, 무기력, 절망감, 나태함, 두려움 등 모든 부정적인 것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 삶을 바꾸어 놓는 강력한 힘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불의한 현실에 대해 분노하고, 세상의 아픔을 덜어내기 위해 사랑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게 만듭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이들의 특색은 무엇입니까? 자기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구하지 않습니다. 조바심 내지 않고 인내합니다. 약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넘어진 사람 곁에서 기다려주고 때가 무르익으면 일으켜 줍니다. 우울감에 빠진 이들에게 하늘의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사람들을 갈라놓는 장벽들을 허물어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고 사랑하게 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드는 죽음의 문화에 저항합니다. 시므온은 아마도 긴 생애 동안 생명의 샘이신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한 채 사람들의 마음에 희망을 불어넣었을 것입니다.
∙어떤 만남
그런 그에게 마침내 결정적인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시므온은 강보에 싸인 한 아기를 보는 순간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려온 분이 눈앞에 계심을 알아차렸습니다. 그것은 번개처럼 찾아온 계시의 순간이었을 겁니다. 카이로스입니다. 어떻게 알아보았는지를 묻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알아차림이야말로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입니다. 시므온은 아기를 받아 안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주님, 이제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 종을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가게 해주십니다.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모든 백성 앞에 마련하셨으니, 이는 이방 사람들에게는 계시하시는 빛이요,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눅2:29-32)
그는 마침내 자기의 마지막 시간이 다가왔음을 알아차렸습니다. 해가 뜨면 달빛이 스러지는 것처럼 자기의 시간 여행이 끝났음을 직감했던 것입니다. 강보에 싸인 아기는 세상에서의 고단한 여행 다 마치고 영원한 집으로 돌아갈 때가 왔음을 그에게 일깨워주는 징표였습니다. 시므온에게 마지막 시간은 달콤한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한껏 살아낸 사람이 영원한 포구에 닻을 내리는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신비한 말입니다. 어떤 말로도 그 신비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문득 느보산 비스가 봉우리에 섰던 모세가 떠오릅니다. 그는 탈출 공동체가 들어가 살게 될 가나안 땅을 내려다보았습니다. 40년 동안 꿈꾸었던 땅이 저 앞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가 그곳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출애굽의 대업을 완수하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욕심조차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종들이 운명입니다. 모세는 그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자기의 운명을 알기에 모세는 비감한 시선으로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을 겁니다. 저는 시므온의 고백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고 싶습니다. 작고한 시인 이형기 선생님의 ‘낙화’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봄 한 철/격정을 인내한/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분분한 낙화…/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지금은 가야 할 때”
꽃이 져야 열매가 맺히듯, 앞물결이 뒷물결에게 자리를 내주듯 시므온은 그 아기에게 자기 운명의 배턴을 넘겨줍니다. 그리고 요셉과 마리아에게 이 아기가 이방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빛이고,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예언 속에 이미 예수께서 온 세상의 빛임이 예고되고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운명
의롭고 경건한 사람 시므온의 시선은 아기를 넘어 그 부모에게도 미칩니다. 그들이 함께 감내해야 할 시련의 시간이 예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으며, 비방 받는 표징이 되게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칼이 당신의 마음을 찌를 것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눅2:34-35)
아기의 운명이 순탄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어우렁더우렁 사람들과 섞여 살면 고난을 당하고 박해를 받을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빛으로 오신 예수는 어둠을 어둠으로 폭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삶은 거울처럼 사람들의 모습을 되비쳐줄 것이었습니다. 옛말에 ‘무감어수無鑑於水 감어인鑑於人‘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에 비추어 볼 게 아니라 타자들을 통해 자기를 보아야 제 모습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의 실상을 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만든 허상을 실상인 듯 여기고 삽니다. 그래서 투명하게 자기를 드러내주는 사람을 보면 적대감을 품습니다. 예수의 삶이 순탄하지 않을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속생각을 드러낼 운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만하면 잘 사는 것 아니냐고 자부하던 이들의 위선을 드러내는 빛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자기의 실상과 대면한 사람들은 예수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일어선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시므온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 아기가 결국에는 사람들의 비방 받는 표적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모의 입장에서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의 선언처럼 들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은 새로운 세상을 열어야 하는 이들의 운명이었습니다. 예수의 길은 그런 것입니다. 신앙의 길은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흙길이 아니라 가시밭길이거나 자갈밭길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좁은 길이고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 길은 외로운 길이기도 합니다.
정릉감리교회의 한희철 목사는 몇 해 전 큰 결정을 앞두고 DMZ 길을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걸었습니다. 기도하고 생각하고 침묵하는 인고의 시간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표지판 하나를 만납니다. 햇볕에 바래고 이끼가 달라붙은 낡은 표지판이었습니다. 그 표지판이 어쩌면 자기 신세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일까요? 그는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폭풍 속 흔들려도/꺾이지 않게 하시고/외발로 선 시간/막막하지 않게 하소서.” ‘외발로 선 시간’이란 표현이 그가 목회자로서 감내해온 만만치 않은 시간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올립니다.
“머무는 이 없어도 좋습니다.
초라하면 어떻습니까.
갈림길 끝
길을 찾는 누군가에게
가야 할 곳 제대로 가리키는
바른 표지판이게 하소서.”
(한희철, <한 마리 벌레처럼 DMZ를 홀로 걷다>, 꽃자리)
예수님은 우리 앞에 영생을 가리키는 표지판으로 우뚝 서 계십니다. 우리가 방향을 잃지 않도록 안내하는 표지판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짐을 대신 지고 함께 그 길을 걸으시는 동행자이십니다. 한 해의 끝자락에 섰습니다. 우리는 바른 길을 걷고 있는지요? 욕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내닫고 있지는 않는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길로 삼았으니 그 길이 비록 좁다 해도 끝끝내 그 길을 따라 걸어야 합니다. 가끔 멈춰 서서 뒤쳐진 이들을 기다리기도 하고, 지친 이들을 곁부축하며 함께 걸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지나칠 정도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거친 언어와 표현들이 세상을 어지럽힙니다. 낡은 것들과 이별해야 할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시간이 도래했습니다. 예수님을 품에 안고 축복했던 시므온처럼 주님을 우리 가슴에 모시고 이 덧거친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이끌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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