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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아2: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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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42624 |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
아 2:8~13, 성령강림 후 열넷째 주일, 2021년 8월29일
저는 주일 공동예배 때의 설교를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 올립니다. 바로 이전 주일까지 올린 설교는 915편입니다. 제가 은퇴하기 전까지 1천 편은 올릴 수 있을 겁니다. 지금까지 올린 설교 중에서 「아가」를 본문으로 한 설교는 없습니다. 오늘 설교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가능성이 큽니다. 「아가」는 남녀사랑을 주제로 하기에 성경 공부라면 모를까 주일 공동예배의 설교 본문으로 삼기에는 어렵습니다. 「아가」를 읽어본 분들은 그 내용이 노골적이라서 성경에 포함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놀랍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아 7:7~9은 이렇습니다.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송이 같구나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네 유방은 포도송이 같고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 이 포도주는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끄럽게 흘러내려서 자는 자의 입을 움직이게 하느니라.”
어떤 이들은 「아가」를 알레고리 방식으로 해석합니다. 에로틱한 묘사는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 또는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부분적으로는 그렇게 읽어도 괜찮은 내용이 있으나 전체를 그렇게 읽기는 힘듭니다. 어떤 이들은 「아가」를 고대 유대인 사회의 혼인 잔치에서 행해지는 노래극이나 연극 대사라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내용이 고대 중동 문헌에도 나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내용을 굳이 성경으로 채택할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사춘기 청소년을 비롯한 모든 연령대의 가족 구성원이 함께 읽고 은혜를 나눠야 할 성경이라 하기에는 분명히 어울리지 않는 구석이 있습니다. 불편하게 들리더라도 겁먹지 말고 일단은 있는 그대로 읽는 게 좋습니다.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
전체 8장에 이르는 「아가」 중에서 비교적 순화된 방식으로 묘사된 오늘 설교 본문 아 2:8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
“내 사랑하는 자”라는 표현은 「아가」 전체에 가장 많이 나옵니다. 사랑하는 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구구절절 나옵니다. 이어지는 9절도 “내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 ”라고 했고, 10절도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고 했습니다. 11절과 12절에서는 만나지 못했던 겨울이 지나고 만날 수 있는 봄이 왔다는 사실을 짚었고, 이어지는 13절에서 이렇게 다시 “나의 사랑”을 노래합니다.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는 문장은 문학적으로도 멋집니다. 여기에 멜로디를 입히면 달콤한 ‘세레나데’(Serenade)가 되겠지요. 무화과나무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 향기가 퍼집니다. 황홀한 순간입니다.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연인을 향해서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고 속삭입니다. 그 순간 그 두 사람에게는 다른 그 무엇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땅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쾌락에 속하는 순간입니다.
「아가」가 말하는 남녀사랑은 육체성의 강조에 그 특징이 있습니다. 육체의 아름다움과 그 열정을 곳곳에서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이런 육체적인 사랑을 불편하게 여깁니다. 그럴만합니다. 기독교는 오랫동안 영육 이원론에 근거하여 육체적인 사랑을 수준 낮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종의 금욕주의를 기독교적인 가르침으로 받아들인 겁니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에서 주인공 소녀 알리사는 사랑하는 사촌 제롬의 구혼을 거부하고 수녀원에 들어가 살다가 젊은 나이에 죽습니다. 남녀사랑보다는 하나님 사랑이 바로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눅 13:24)이라고 여긴 겁니다. 바른 선택이었을까요? 이 소설에서 앙드레 지드는 당시 가톨릭교회의 금욕주의적 신앙을 비판한 겁니다.
수도원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세속의 모든 삶을 포기합니다. 「아가」에서 묘사된 일체의 경험을 거부합니다. 남자나 여자 모두 옷을 단조롭게 입습니다. 화려하고 개성 넘치게 입는 현대인들과는 완전히 다른 복장입니다. 어떤 수녀원에는 거울이 없고, 어떤 수녀원에는 가족도 만나지 못하게 합니다. 수도자들이 수의인 베옷을 입는 수도원도 있습니다. 자신들의 몸에서 일어나는 본능적인 현상을 극도로 절제함으로써 기독교 영성 안으로 깊이 들어가려는 노력입니다. 준비된 이들에게는 가장 높은 수준의 생명 경험입니다. 중세기 때는 옆에서 보는 사람이 괴로울 정도로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방식으로 수행하는 여성 신비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다른 사람의 몸에 난 고름을 입으로 빨아서 치료하거나 폐결핵 환자들과 함께 살면서 환자들의 가래를 먹습니다. 자기들이 몸의 한계를 완전히 극복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한국교회의 신앙적 특징을 한 마디로 규정한다면 청교도적 경건주의입니다. 청교도(puritan)는 그 단어가 가리키듯이 순수한 신앙을 지키려는 영국의 개신교도들입니다. 그들은 영국 국교인 성공회의 박해를 피해서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이 청교도 신앙과 미국의 부흥 운동이 결합해서 미국 교회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신앙적 특징은 도덕적 순결성과 복음 전파를 통한 교회 부흥입니다. 한반도에 처음 복음을 들고 온 미국 선교사들은 모두 이런 전통에 서 있었습니다. 술과 담배를 금했고, 전도와 교회 부흥을 중요한 교회 정책으로 삼았습니다. 이런 정책이 나쁜 건 아닙니다. 문제는 이런 정책을 절대화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신앙적인 차원에서 청교도적 경건주의로 무장했기에 오늘날 주로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교회는 동성애를 적대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성애자의 성적 경향성을 절대화함으로써 동성애자의 성적 경향성을 악마화하는 겁니다. 최근 미군 철수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 권력을 다시 잡은 탈레반 정권이 여성에게 부르카를 강요하는 것과 동성애자들을 향한 한국교회의 태도가 근본주의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몸의 미학
어느 쪽이 옳을까요? 이성애자들이 옳은가요, 동성애자들이 옳은가요? 둘 다 옳은가요? 한쪽은 성적으로 병들고 방탕한 사람들인가요? 여기서 우리가 신학적으로 정리해야 할 문제는 인간의 몸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질문이 아닙니다. 창조론에 근거하면 인간의 몸은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우리의 영혼만이 아니라 우리의 몸도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몸이 없으면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본질에서 선하다는 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몸도 선합니다. 몸을 통해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아가」가 묘사하는 내용 역시 근본적으로 몸의 아름다움, 즉 미학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과 조각은 남녀 육체를 완벽하게 구현함으로써 그런 몸의 미학을 극대화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다윗상」이나 「피에타상」을 보십시오. 에로티시즘도 몸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노력입니다. 만약 인간에게 에로티시즘이 없다면, 즉 성적 욕망이 없다면 적지 않은 부분에서 인간의 온전한 삶을 살아낼 수 없을 겁니다. 그런 현상이 극대화되면 마치 거식증에 걸린 사람처럼 극히 불안하게 생존할 뿐입니다.
에로티시즘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eros’에서 왔습니다. 에로스는 사랑의 신, 또는 관능의 신을 가리킵니다. 이와 반대되는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아가페는 신적인 사랑이자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어떤 부분에서 이런 구분이 가능하기는 하나 사랑을 에로스와 아가페로 완전하게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큰 범주에서 본다면 사랑은 하나입니다. 그 사랑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거꾸로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친구를 향한 친근감이나 동지의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예술가에게는 예술을 향한 열정으로 나타납니다. 그 열정이 에로스입니다. 그런 여러 사랑의 한 요소로서 에로티시즘이 나타납니다.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아담과 이브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 2:25)고 합니다. 이런 상태가 가장 원초적인 남녀관계입니다. 유럽 어딘가에는 누드촌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들이 이런 원초적 사랑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벌거벗은 상태를 부끄러워하게 된 이유는 창 3:1절 이하에 나옵니다.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이브는 뱀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인식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과일입니다. 눈이 밝아진다는 말에 혹하여 그들은 그 열매를 겁 없이 먹었습니다. 뱀의 말대로 눈이 밝아져서 자신들의 벗은 몸을 인식하게 되었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아담을 찾으셨습니다. 아담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이후로 인류는 자기 몸을 가리고 살았습니다. 몸의 아름다움을 부끄럽게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게 죄의 결과입니다. 우리의 삶이 끝나면 우리는 다시 옷을 완전하게 벗게 될 것입니다. 원초적인 자아가 드러나도 부끄러움을 모르게 될 것입니다.
아직 죽기 이전, 종말이 오기 이전, 더는 감출 수 없는 그 절대 순간이 오기 이전에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만드신 몸의 아름다움과 그 매력을「아가」가 노래하듯이 노래할 수 있을까요? 기독교의 청교도적 경건주의에 나타나는 금욕주의는 대답이 아닙니다. 금욕주의는 인간의 몸에서 발현되는 에로티시즘을 억지로 감추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감춰봐야 감춰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위선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안소니 퀸(Anthony Quinn)과 지나 롤로브리지다(Gina Lollobrigida)가 열연한 프랑스 영화 「노틀담의 곱추」는 이런 사태를 고발합니다.
이에 반해서 현대사회는 에로티시즘을 지나치게 부각함으로써 오히려 인간 몸의 미학을 훼손시켰습니다. 몸의 상품화, 성의 상품화가 그것입니다. 몸과 성이 존재의 차원이 아니라 도구의 차원으로 떨어졌습니다. 돈만 주면 얼마든지, 또는 폭력적으로라도 손에 넣을 수 있는 어떤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실제 성매매업이나 이와 유사한 영역이 그렇게 작동됩니다. 성의 왜곡이자 착취이고,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 창조 능력에 대한 저항입니다. 보기에 괜찮은데도 성형수술을 하거나 주름살을 인공적으로 없애는 처치도 여기에 속합니다. 웬만하면 몸의 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이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하신 몸의 미학을 아는 사람의 태도가 아닐까요?
함께 가자
저는 「아가」가 남녀 사이의 에로스를 다루고 있으나 더 근본에서는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 몸에 대한 직관이자 노래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의 한 요소가 에로스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뿐입니다. 인간 몸에는 성적인 욕망만이 아니라 다른 욕망도 많습니다. 식욕도 욕망입니다. 만약 맛있게 먹을 줄 모르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비싼 음식만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맛의 깊이를 느낄 줄 아는 게 중요합니다. 포도주나 맥주를 깊은 맛으로 마시는 사람이 있고, 그냥 취하려고 마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커피나 차도 그렇고, 밥도 그렇습니다. 저의 밥 먹는 속도는 늦습니다. 소화 능력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맛을 느끼려고 그렇게 먹습니다. 밥을 먹으면서 「아가」의 표현대로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몸으로 살아가는 모든 순간을 황홀한 느낌으로 경험하고 싶은 겁니다. 하늘과 달과 해와 고양이와 해바라기와 대추와 사과와 포도와 바람 소리와 빗소리와 새벽녘 벌레 소리, 그리고 연필과 물병과 마스크와 손수건과 책과 신발과 손톱깎이와 곰팡이와 바이러스까지, 특히 함께 살아가는 가족과 교우와 이웃과 지인들을 “나의 어여쁜 자”로 느끼고 싶습니다. 이게 가능할까요? 죽는 순간에는 당연히 가능할 텐데, 살아있는 동안에도 가능할까요?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 세상을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로 느끼면서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나 가장 크고 결정적인 이유는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충분하게, 에로스적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넉넉하게 받았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걸 먼저 알고 느끼는 게 중요합니다. 자기에게 없는 걸 억지로 베풀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요 3:16절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생을 얻는다는 겁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영생은 하나님의 품, 즉 그의 존재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품으로부터 멀어진 이유는 죄와 죽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었기에 우리는 영생을 선물로 얻습니다. 영생은 곧 죄와 죽음에서 해방된 사람들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은폐된 생명입니다. 그 생명을 믿음으로 기다리고 희망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삶의 환희를 경험할 것입니다. 자기에 대한 미련과 염려에서 벗어나고, 자기 소멸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났으니 당연히 삶의 환희를 노래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아가」 2:10절을 하나님이 저에게 속삭임의 방식으로 들려주시는 사랑의 밀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가」의 내용이 남녀사랑인데도 성경으로 채택된 데에는 고대 유대인들이 이런 구절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 어떤 구절보다 더 생생하고 깊이 있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경험한다면 친구들이 다 떠난들 무엇이 외로울 것이며, 어려운 형편에 떨어진들 무엇이 불행하겠습니까.
우리 교회 교우 중에서 자기의 늙은 아내를 “왜 이리 예쁘냐.”라고 말하는 교우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삶에 대한 경지가 높아 보입니다. 이왕 그렇게 부를 거면 오늘 「아가」의 표현대로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라고 부르면 더 좋겠지요. 다른 교우들도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해도 속마음으로만은 그렇게 대하면 좋겠습니다. 손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로 느껴진다고 합니다. 당연합니다. 이제 앞으로 더 나아가서 몸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그런 느낌으로 대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삶의 모든 순간이(Carpe diem) 여러분에게 이렇듯 짜릿하게 경험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죽음마저도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로 경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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