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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 하듯이

에배소서 김기석 목사............... 조회 수 231 추천 수 0 2021.10.29 21: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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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엡6:5-9 
설교자 : 김기석 목사 
참고 : 2021/01/31 청파감리교회 http://www.chungpa.or.kr 

그리스도께 하듯이
엡6:5-9
(2021/01/31, 주현 후 제4주)

[종으로 있는 이 여러분, 두려움과 떨림과 성실한 마음으로 육신의 주인에게 순종하십시오. 그리스도께 하듯이 해야 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답게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십시오. 사람에게가 아니라 주님께 하듯이, 기쁜 마음으로 섬기십시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각각 그 갚음을 주님께로부터 받게 됨을 여러분은 아십시오. 주인 된 이 여러분, 종들에게 이와 같이 대하고, 위협을 그만두십시오. 그들의 주님이시요 여러분의 주님이신 분께서 하늘에 계신다는 것과, 주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십시오.]

∙지금 우리의 현실
‘주님, 우리를 꾸짖어 주십시오.‘ 오늘은 마치 형편없는 성적표를 받아들고 집에 돌아온 아이와 같은 느낌입니다. 어린 시절 낫을 들고 산에 올라가 베어낸 싸릿대로 회초리를 만들어 아버지 앞에 가져갔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매라도 청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죄 없는 사람들의 피를 흘리고, 온갖 우상을 섬겨 땅을 더럽힌 이스라엘의 죄를 벌하셨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여기 저기 흩어진 채 이방 민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돌이킬 줄 몰랐습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영원히 몰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로 인해 더럽혀진 당신의 이름을 회복하기 위한 행동에 돌입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맑은 물을 뿌려 깨끗하게 하고, 새로운 영을 넣어 주며,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겔36:25-26). 지금 우리에게도 주님의 자비하심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사랑제일교회, 인터콥에 이어 아이엠 선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대규모 확진자가 나오면서 개신교회가 복음이 아니라 바이러스를 전파한다는 비아냥을 듣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개신교회를 향해 ‘지긋지긋하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이제 분노의 대상이 아니라 염증을 일으키는 집단처럼 인식되고 있습니다. 가짜 뉴스와 음모론의 진원지가 되고 있습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일까요? ‘다른 복음’을 전하고, 따르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 사용하는 무기가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두려움입니다. 사탄은 우리 속에 처벌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어 우리를 마비시킵니다. 생을 경축하거나 즐기지 못하게 만듭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스스로 시야가 좁아지고, 타인을 따뜻하게 바라보지 못합니다. 다른 하나는 성공과 성취를 약속함으로 욕망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욕망은 언제나 달콤합니다. 욕망은 배타적이어서 다른 이를 배려할 여지를 빼앗아 갑니다. 욕망에 확고히 사로잡히는 순간 우리는 다른 이들을 다 잠재적 경쟁자 혹은 적으로 보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번영의 신학에 사로잡힌 이들은 이 두 가지 사탄의 무기를 사용하여 자기를 확장해 왔습니다. 두려움과 욕망 자극, 채찍과 당근인 셈입니다. 복음의 옷을 입고 있지만 그건 사도 바울이 말하는 ‘다른 복음’입니다.

많은 이들이 자기 자녀들이 영어에 능숙하고 세속에 물들지 않고 큰 돈을 들이지 않고도 유학을 다녀오고 출세의 길을 걷게 만들고 싶어합니다. 아이엠 선교회는 바로 그런 사람들의 욕망에 정확히 기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치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대단히 자본주의적입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비정상을 정상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이제 비정상이 비정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비상상황입니다. 발터 벤야민은 현대는 자본주의가 종교가 된 시대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신앙을 제 자리에 세워야 할 때입니다. 참된 신앙은 부푼 욕망을 제어하고 더 큰 질서 속에서 자기 삶을 바라보도록 해줍니다.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평화롭게 공존하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처지에 깊이 공감하고, 그들을 위해 사랑의 수고를 다하지 않는다면 어찌 믿는 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벼랑 끝에 내몰린듯 위태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자영업자 한 사람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교회 현판에 날달걀을 던졌습니다. 이건 정말 상징적 사건입니다. 프랑스 혁명이 벌어졌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수도원으로 몰려가 수도원을 허물었던 사건이 떠오릅니다. 지금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빛과 소금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함께 등 돌리고 욕하고 빠져나가면 그만일까요? 아닙니다. 묵묵히 사막에 나무를 심는 사람처럼, 입은 다물고, 예수 정신을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할 때입니다.

∙함부로 vs. 정성스럽게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를 바치는 사람입니다. 그런 방향 전환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믿음의 세계에 입문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믿음의 사람인지를 알아볼 수 있는 표징은 무엇일까요? 말끝마다 성경을 인용하는 것도, 식당에서 식사 기도를 하는 것도, 길거리에서 전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된 사람은 무엇보다 다른 이들을 존중하고 아끼게 마련입니다. ‘치인사천治人事天 막약색莫若嗇‘(도덕경 59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데 아낌만한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아낌이야말로 진리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인색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라, 세상의 어떤 사람도, 어떤 것도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함부로‘는 ‘생각함이 없이 마구’ 혹은 ‘되는 대로’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 대비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정성스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을 하든, 누구를 대하든 정성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이들을 보면 마음이 저절로 밝아집니다. 그 마음 하나 얻지 못한다면 천하에 없는 말을 한다 해도 허사일 뿐입니다.

에베소서 5장과 6장은 믿음에 들어선 사람들, 곧 빛의 자녀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더 나아가 다른 이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줍니다. 남편과 아내, 자녀와 부모, 종과 주인의 관계가 예시되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순종과 존중의 윤리라 할 수 있겠습니다. 순종을 요구하는 것은 가부장적 질서를 강화하기 위한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순종의 밑절미는 아낌과 사랑입니다. 만해 한용운은 ‘복종‘이라는 시에서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만/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라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복종하고 싶어서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 달콤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마음이겠지요.

∙비인간으로 취급되던 사람들
오늘 본문은 종들과 주인의 윤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혹은 초대 교회가 왜 종의 존재를 허용했냐고 화를 내시지 마십시오. 모든 텍스트는 그 시대와 세계관을 반영하게 마련입니다. 당시에는 노예 제도가 자연스러운 사회 제도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지던 때였습니다. 물론 종이나 노예로 전락한 이들의 비참한 처지를 모른 척 해서는 안 됩니다. 노예로 태어난 사람들도 있었지만 전쟁 포로로 잡혀오거나 절대 빈곤에 떨어져 노예로 전락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노예들은 물론 존엄한 인격으로 대우받지 못했습니다. 로마가 자랑하는 문명은 노예 노동에 상당 부분 의지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liberal arts‘는 흔히 ‘인문학‘이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어원을 보면 자유인들이 하는 기예를 뜻합니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 말에 대비되는 것은 ‘servile arts‘입니다. 이건 노예들이 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나무를 하고,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집을 짓고, 온갖 허드렛일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필수 노동입니다. 그러나 1세기 로마의 식민 도시들 어디에서도 노예들은 존중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을 인간으로 대우한다는 것은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상당히 다양한 계층의 사람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부자도 있고 가난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수공업자, 노동자, 교역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노예들도 있었습니다. 집 주인이 신자가 되어서 덩달아 믿게 된 노예들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주인이 신자가 아닌 데도 신자가 된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 말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노예 혹은 종들은 비인간 혹은 반시민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관점에서는 당연한 일처럼 여길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혁명적 사고의 전환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가 사회에 점진적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은 3세기에 해방 노예 출신인 칼리스투스가 로마의 감독, 즉 교황으로 선출된 일(최종원,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홍성사, p.93)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새로운 윤리
본문의 첫 구절인 “종으로 있는 이 여러분”은 평범해 보이지만 실은 놀라운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사도는 종들을 사유의 능력이 있는 주체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사람으로 존중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출애굽 공동체와 언약을 맺은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감격합니다. 애굽 땅에서 오랫동안 강제 노역에 시달리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인이 부과한 일, 곧 할당량을 채우는 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던 사람들입니다. 노동의 기쁨이 있을 리 없습니다. 관료들은 그들의 처지를 감안하지 않았습니다. 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파도 일터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온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당신의 계획을 일러주시며 그 뜻을 따를 생각이 있냐고 물으십니다. 당신의 뜻을 일방적으로 부과하지 않고 동의를 구하신 것입니다. 그들을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자유인으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사도 역시 종들을 존엄한 인격으로 대합니다. 그래서 종들에게 “두려움과 떨림과 성실한 마음으로 육신의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권면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이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답게‘ 진심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여전히 신분상으로는 종이지만 사도는 그들의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하는 척하지 말고 진심으로 그 일을 감당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의 노동 윤리에도 적용할 수 있는 권고입니다. 기왕 해야 할 일이라면 투덜거리지 말고 기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애감이 줄어듭니다. 사도는 어떤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가 아니라 주님께 하듯이 기쁜 마음으로 섬기라고 말합니다.

권정생 선생님이 들려주신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권선생이 어느 날 가까운 시내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버스비가 모자라 완행열차를 탔습니다. 아주머니 한 분이 극구 사양하는 데도 자리에 앉으라고 권해서 자리에 앉았습니다. 무심코 혹시 교회 나가시는 분이 아니냐고 묻자 아주머니는 그렇다면서 묻지도 않은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의성 지방의 한 시골 교회 집사님인 그 아주머니가 한 십 년쯤 전에 겪은 일이라며 들려준 이야기는 이러했습니다. 어느날 몹시 바쁘게 집안일을 하고 있는데 거지가 구걸하러 왔습니다. 일에 몰두하고 있던 아주머니는 자기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지금은 바쁘니 다른 데나 가보라고 박대를 하며 거지를 내쫓았습니다. 거지가 돌아서 나가는 뒷모습을 힐끗 보니 놀랍게도 틀림없는 예수님이었습니다. 놀란 아주머니가 하던 일을 그만두고 허겁지겁 쌀을 한 대접 떠서 달려나갔지만 거지는 그새 어디론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동네를 다 뒤져보아도 허사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아주머니는 주저앉아 통곡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아주머니 눈에는 어떤 낯선 사람도 다 예수님으로 보여서 정성껏 대접을 하곤 했습니다. 이야기 끝에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 사람이 다 예수님으로 보이니까 참 좋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드리고 싶어예.“(권정생, <우리들의 하느님>, 녹색평론사, 1997, p.116-7) 이 마음이 천국의 마음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눈가림이 아니라 마음으로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원리는 주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주인도 종이라 하여 함부로 대하면 안 됩니다. 위협적인 언사나 폭력으로 그에게 굴욕감을 안겨주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가 누리는 경제적 넉넉함을 계급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며칠 전 신문에서 아파트 경비실에 에어컨 설치하는 것을 반대하는 연판장을 돌리는 사람들 이야기를 보고 놀랐습니다. 이건 단순한 비용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인간을 대하는 방식의 문제입니다. 잠언은 ”가난한 사람을 조롱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17:5a)라고 말합니다. 서양 속담에 ‘하나님은 우리가 이웃을 바라보는 그 눈으로 우리를 보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나보다 못한 처지에 있다 하여 그들에게 모멸감을 안겨주는 일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자기 행동을 설명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아낌과 존중이 우리 몸에 밸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니겠습니까? 오늘의 교회가 향기가 아닌 악취를 풍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이제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주님의 몸이 될 때입니다. 주님께서 부족한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기를 청할 뿐입니다.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면서 주위를 명랑함과 따뜻함과 사랑으로 물들이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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