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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는 모든 목회자에게 가장 힘이 나는 일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어려운 과제다. 말씀을 전한다는 일은 가장 소중한 사명이면서 동시에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일인가?
문제는 대부분 청중은 설교자 본인이 생각하는 것의 십분의 일도 설교에 귀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극소수의 천재 설교자를 제외하면 설교를 성공(?)한다는 것은 보통 목회자들에겐 불가능 그 자체이다. 물론 어쩌다 한 번 홈런을 칠 수는 있어도 일타 선수가 아닌 다음에야 매번 잘 할 수는 없는 법이다.
탁월한 설교자가 된다는 것은 성경 본문해석은 수준급 학자, 호소력, 감동에서는 거의 연예인 급의 전달력, 영성은 극소수의 영성가 수준을 갖추어야 가능한 일이다. 대부분의 설교자의 현실은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 설교자 절대 다수는 신학자도, 연예인도, 영성가도 아닌 보통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설교방식은 참으로 비효율적인 교육방식이다. 미래에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다른 교육방식을 병행해야 할 것이다. 소통만큼 좋은 교육방식은 없다. 소통이 되면 즐겁고 모이고 싶지만, 소통이 안되면 "고통"이 남는다. 지금 설교의 현실이 사실 대부분 그렇다.
참고로 1세기 가정교회에 지금 형식의 일방적인 설교란 보편적이지 않았다. 원시적 예배 형태에서는 사도나 방랑 교사들이 돌아다니며 가르쳤다. 그들은 매우 카리스마적이었을 것이다. 또한, 지역 교회에 속한 교사들이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여럿이 말씀을 나누고 소통하는 방식도 꽤나 흔했다는 점이다. 지금의 설교방식은 아마 4세기 이후에 나온 듯한데, 언제부터 지금의 설교방식이 보편화되었는지 나도 궁금하다.
설교란 말은 사실 성경엔 없다. "전하다", "전파하다", "가르치다", "논하다"는 표현이 있지만, 이는 겹치는 부분은 있어도 현대의 설교와 같은 방식이 아니다. 아마도 어떤 방식이 있다기 보다는 카리스마적인 교사는 즉흥적이고 선지자적이고 선동적이었을 것같고, 아볼로같이 헬라적 교육을 많이 받은 교사는 수사학이 강하고 강론 중심이었을 것같다. 바울은 아마도 이 둘의 방식 모두를 사용한 것 같다. 시대가 변해 설교라는 정형화된 형식이 생기고 지루해지기 시작한 듯 하다.
나는 “설교”가 없는 가정교회를 꿈꾼다. 얼마나 사람들이 설교를 싫어하면,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면 “설교하지 말라”고 할까! 예배가 찬양과 기도와 함께 말씀을 묵상하고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나도 설교 시간에 졸지(?) 않을 것 같다. 이렇게 될 수만 있다면 “말재주가 좋은 설교자”가 아니라 말씀으로 탄탄하게 준비된 사역자가 빛을 발할 것이다. 이건 가정교회 형태로 가능한 일이다.
솔직히 나 역시 설교를 듣는 것이 곤욕스러울 때가 많다. 본문에 대한 관찰이 있고, 본문을 충분히 묵상하고 소화하여 영적으로 도전을 주는 방식으로 설교하는 이를 만나기란 무척이나 어렵다. 불편함의 경험을 줄이기 위해 그 시간에 딴 생각을 하거나 졸음으로 도망가는 이가 충분히 이해된다.
매주 설교해야 하는 목회자들이 불쌍하다. 능력부족인데도 주님 시키셨으니 해야만 하고, 아무리 열심히 준비해도 성도들의 반응이란 설교를 들었는지 말았는지 상관없다는 표정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성도들도 불쌍하다. 집중하기 어렵고 졸리기만 한, 혹은 동의하기 어려운 내용의 설교를 매주 들어야 하니 말이다. 어쩔 수 없다면 이젠 기대를 버리고 서로를 측은하게 여기자. 목회자는 설교시간에 딴짓하거나 조는 성도도 그 자리에 나온 것 만으로 감사히 여기자.
우리 평범한 목회자들, 아자, 아자 화이팅!
목회란 버티는 것이다!
이민규 목사 (그소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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