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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무척 길군요...그러나 이 어두운 밤도 끝날 때가 있겠지요? 그래요 해는 곧 뜰 것입니다. 밝아오는 새벽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
성경본문 : | 행8:14-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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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 들꽃교회 |
성령 받음(임재)
행8:14-17
2022.1.9 들꽃교회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사도행전8:14-17)
1.지금은 성령시대입니다.
2.성령의 임재가 무엇인가?
3.임재가 중요한 이유는?
4.임재를 못 받는 사람들은?
5.몸에 나타나는 임재는?
6.마음에 나타나는 임재는?
7.임재와 기도의 관계
1.지금은 성령시대입니다.
인류의 시대적 구분은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시대를 거쳐 지금은 플라스틱시대입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지금이 플라시틱시대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지금은 구석기시대야”하면서 살지 않았던 것처럼 시대의 분류는 먼 후손들이 할 것이기 때문이죠.
기독교의 시대적 구분은 하나님이 직접 역사하셨던 구약시대, 예수님이 직접 육신의 몸으로 역사하셨던 예수시대, 그리고 성령님이 직접 함께하시는 오늘날의 성령시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삼위의 하나님은 한분이시기 때문에 그런 시대 구분은 무의미합니다. 다만 인간의 입장에서 펀의상 구분한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가 흐를수록 사람들과 함께하기를 원하셨고, 자신을 경험시켜 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음성’으로 함께 하셨고, 신약시대에는 사람의 ‘몸’으로 직접 함께하셨고, 그러나 인간의 몸으로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 만날 수 있기에 시간과 공간을 넘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도록 ‘마음’에 성령님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실 때 사람들이 그 음성을 듣고 보고 만지고 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는 성령님을 듣고 보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때에도 자기 두 눈으로 보면서도 “귀신이다.”라고 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도 자신이 성령님을 경험하고 있으면서도 성령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머... 내 입이 왜 이래.. 주책맞게..”하면서 방언이 나오는 자신의 입을 탁탁 치던 장로님을 본적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예수님은 땅에, 성령님은 마음에 점점 사람들과 가까이 오셨습니다.
2.성령의 임재가 무엇인가?
임재(臨齋)의 한자어는 임할임(臨):임하다, 내려다보다, 낮은 데로 향하여 대하다, 비추다, 다스리다, 어루만지다, 본떠 쓰다. 있을재(齋):재계하다, 공경하다, 엄숙하다, 공손하고 삼가다.입니다. 사도행전1:8절에 ‘임하다’는 헬라어 ‘에펠돈토스’로 오다, 엄습하다, 접근하다, 덮치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임재란 성령님의 생각, 감정, 의지에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임재란 내가 낮아지고 성령님께서 높아지는 것입니다.
임재란 내가 죽고 성령님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임재란 성령님이 보고 느끼시는 것을 나도 느끼는 것입니다.
임재란 성령님의 생각, 감정, 의지에 예민하게 반응하는것입니다.
임재란 실질적인 성령체험의 시작입니다.
임재란 성령님이 들어오시는 통로가 열리는 것입니다.
임재란 성령님 안에 내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임재가 시작됩니까?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3:17)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성령님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영이 깨어있는 사람은 그 자리, 그 모임에 지금 성령님이 임재하여 계신지 아니면, 성령님이 오실 수 없는 자리인지를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영이 더욱 민감한 사람은 성령님이 바람처럼, 파도처럼 모임 가운데 움직이는 것까지도 느낄 수 있습니다. 모임 가운데 성령의 임재가 없다면 그것은 기독교 모임이 아니고 그냥 세상 사람들의 친교, 사교모임과 같은 것입니다.
3.임재가 중요한 이유는?
며칠 동안 차 안에 있는 온도계가 영하10도를 오르락 내리락 할 만큼 추웠습니다. 평소에는 손에 잘 잡히지도 않던 마당의 길고양이가 현관문만 열리면 집안으로 쏜살같이 들어와서 안 나가려 합니다. 집 밖과 집 안의 공기부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측은지심이 많은 우리 집 여성동지들은 몇 시간씩 고양이가 집안에서 자고 가도록 자비를 베풉니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3) 성령의 임재를 구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엄동설한에 따뜻한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무슨 일이든 성령의 임재 안에서 할 때와, 그냥 내힘으로 할 때의 차이는 마치 한겨울에 집 안에서 하는 것과 집 밖에서 덜덜 떨며 하는 것 같은 차이가 납니다.
임재를 구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성령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임재를 구하는 것은 영적인 능력의 통로를 여는 것입니다.
임재를 구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임재를 구하는 것은 인간적인 실수를 줄이는 것입니다.
임재를 구하는 것은 악한 것으로부터 막아주는 성령의 보호막을 치기 위해서입니다.
임재를 구하는 것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임재를 구하는 것은 성령님의 인격을 경험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님은 성령님을 만날 수 있다, 경험할 수 있다는 나의 믿음만큼 임재하십니다. ‘성령님 오시옵소서’하고 말로 초청할 때 오십니다. 때로 성령님이 강권하여 오시기도 하지만, 그것은 옆에 더욱 강력한 믿음의 사람이 있어 성령님을 구할 때 옆사람까지 성령충만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4.임재를 못 받는 사람들은?
똑똑한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비판적이고 부정적이고 교만하여 성령님의 임재를 못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연구를 해 보니 성령의 임재라는 것은 심리적인 요인으로 마음속에 나타나는 자기암시 같은 것이다.” 하며 자신이 정한 어떤 기준과 생각에 맞지 않으면 거부반응을 보입니다.
놀랍게도 목회자들 가운데에도 성령은 믿지만 임재는 거부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평소에 성령님을 찬양하고 성령이 불로 임하시기를 기도하고 설교까지 하면서도 정작 성령이 임재하여 방언을 하게 한다거나 쓰러뜨리면 거부반응을 보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점잖은(?) 방법이 아닌 비인격적인 방법이라며 성령님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을 본적도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과거에 일부 부흥사들이 “성령받으라~ 여기에서는 개도 성령을 물고 다니는데 성령을 못 받으면 개만도 못한 것이다.”라거나 사람을 강제로 쓰러뜨리거나 심리적으로 흥분을 시켜서 조작하고 유도했던 안 좋은 선례 때문에 성령의 임재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생겨서 그런 것 같습니다. 임재와 성령님에 대한 오해와 무지가 만든 생각이 잘못이지 성령의 임재가 문제있는 것은 아닙니다.
임재가 주는 그 풍성한 축복을 모르기 때문에 임재를 사모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가 없는 교회 공동체를 보면 온갖 세상 문제들의 축소판 같습니다. 권력과 암투와 비방과 파당과 시기와 질투와 미움이 가득합니다. 성령의 임재가 이런 것들을 덮어버려야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데, 임재가 없으니 교회가 세상에 민폐를 끼치는 것입니다.
5.몸에 나타나는 임재는?
성령님과의 만남을 임재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몸과 마음에 임재하시기도 하고, 예배의 현장에 임재하시기도 하고, 가정이나 공동체에 임재하시기도 하며 그 강도나 방법이나 시간은 매우 매우 다양하여 어떤 한 가지로만 단정하기는 힘듭니다. 일상적 임재가 있고 상황적 임재가 있고 전이의 임재가 있고 불처럼 부어지는 임재 등등 매우 매우 다양하고 복합적입니다.
개인적으로 임재하실 때 몸에 나타나는 현상을 대충 정리해 보면, 온몸이 뻣뻣해지거나 팔이나 손이 뻣뻣해집니다. 몸의 일부가 따뜻해지거나 뜨거워지거나 온몸이 뜨거워질 때도 있습니다. 반대로 시원해질 때도 있습니다. 따뜻하거나 포근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시원한 바람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전기에 감전되듯 찌릿찌릿해지기도 합니다. 몸이 떨리거나 흔들리는 진동이 오기도 합니다. 몸의 근육이나 눈꺼플같은 부위가 떨리기도 합니다. 뒤로 넘어질 것처럼 균형감각을 잃기도 합니다. 집회 가운데 그냥 뒤로 넘어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갑자기 노곤해지며 큰 하품이 나오기도 합니다.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집니다. 몸에 힘이 뻣칩니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거나 입이 돌아가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입에서 이상한 말이 나옵니다.(방언) 그럴 때는 억지로 참지 말고 입에서 힘을 빼면 방언이 자유롭게 나옵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릅니다.
성령의 임재는 개인마다 차이가 있으며 이밖에도 다양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어떤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나타남은 더 주님을 바라보게 하고, 더 주님과 친밀하게 되며, 새로운 심령을 갖게 합니다. (6845)
6.마음에 나타나는 임재는?
성령님이 임재하실 때 마음에 나타나는 현상을 대충 정리해 봅니다. 정확하게는 영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마음에 알 수 없는 기쁨과 흥분이 일어납니다. 내 안에 잠복된 악한 영과 마음의 상처같은 치유되지 않은 감정이 충돌하여 일시적으로 괴로움과 통증을 느끼기도 합니다. 마음이 찡해지면서 온몸이 공중에 붕 뜨는 것 같은 아득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어떤 감미로운 향기를 맡기도 합니다. 아, 이것이 바로 거룩이라는 것이구나 하는 느낌이 옵니다.
주님의 임재가 마음에 충만하면 내 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나는 주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성령님은 그런 나의 잘못된 심령을 고치고 새로운 심령을 갖도록 이끌어 가십니다. 그 순간에 겸손히 순종함으로 성령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성령님의 임재를 그 현상에서 끝내면 안 되고 더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작업이 없으면 임재를 육체로 경험하는 짧은 체험으로 끝나고 맙니다. 임재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지만 그 임재의 깊이를 더하는 것은 내 몫입니다.
성령님이 마음에 임재하시는 것은 주님의 마음을 느끼게 하며 나의 어떤 부분을 만지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맞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주님의 마음을 내 안에 자리잡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나의 내면의 뿌리에서부터 변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마음에 나타나는 현상은 여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점점 많아지고 있지만, 성령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임재 가운데 들어가는 성도는 점점 찾아보기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좋습니까? (6846)
7.임재와 기도의 관계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충분히 기도해야 합니다. 집을 깨끗이 치우면 아이들이 “엄마, 집에 누구 와요?” 집을 깨끗하게 치우고 손님을 맞이하는 것이 손님에 대한 예의 아닙니까? 기도는 성령님을 모시기 위해 마음의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성령님을 정중하게 초청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주도적으로 주님의 임재를 구하는, 성령님을 초청하는 기도는 통성기도나 방언기도 처럼 소리를 내서 하는 ‘소리기도’입니다. 소리기도는 여럿이 함께 모여서 기도할 때 성령님이 강하게 임재하십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 소리기도를 10분 정도 하면 마음이 정화되고, 20분 정도 계속하면 얕은 임재 가운데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10분, 20분씩 소리를 내면서 기도할 수 있는 교인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주도적으로 나를 임재 가운데로 끌고 들어가는, 깊은 임재의 기도는 ‘침묵기도’나 ‘관상기도’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기도하기 위해 침묵하는 순간부터 분심이 마음을 점령하여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합니다. 기도가 아니라 공상을 하다가 말죠. 처음부터 침묵기도를 할 수는 없습니다. 먼저 소리기도나 방언기도로 마음을 정화시킨 다음에 조용한 기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기도와 찬송이라는 방법이 가장 빠른 지름길입니다. 기도와 찬송의 양이 어느 정도 채워져야 성령님의 임재가 가능한 상태가 됩니다. (6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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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1.The Renovare Spiritual Formation Bible(두란노)
2.햇볕같은이야기 6839-6847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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