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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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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스다, 무자비한 희망고문의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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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神祕)가 사라진 곳에 신화(神話)가 자리잡는다.
진실(眞實 )이 떠난 곳에 전설(傳說)이 찾아온다.
자유케 하는 진리를 쫓아낸 곳에
자유를 억압하는 전통(傳統)이 자리한다.
특권적 자비나 허위의 자비가
그늘이 있는 눈물나는 자비를 대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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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스다,
자비의 집,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자, 혈기 마른 자가 누운
동병상련의 정이 넘쳐흐르는 곳.
형식과 전통만 남은 예루살렘이 낳은
그들만의 신념과 신화가 넘실거리는 곳,
그렇게 이웃 간의 살가운 정이 넘치다가도
'가끔' 물을 움직여 치유를 준다던 천사가 내려올 때면
'곧' 산산조각 나고 마는,
대단히 위태롭고 팽팽한 긴장을 머금은,
절반의 평화, 위장된 평화가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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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밀치고, 이웃을 짓밟고, 형제를 고발하지 않으면
쉼을 누릴 수 없는, 비정한 연못.
희망을 가질 수도,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게 만드는,
희망 고문이 날마다 벌어지는 곳,
가장 무자비한(unmerciful) 집, 베데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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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실낱 같은 희망의 문 하나 보여주고
그 문을 통과한 영웅들의 신화를
날마다 새롭게 재생산해내며
우리 같은 사람도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다고 학습시키면서
희망고문을 가하고 있다.
친구도, 동료도, 가족도 다 버려야
통과할 수 있는 그 좁은 구원의 문으로,
오늘도 베데스다 주위로
우리를 유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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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가 그 무자비한 베데스다는 아니었을까.
좀더 특출나게 봉사하거나 기도해야
가끔 있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로 낙점된다는
신화를 만들어내는 못,
그래서 교인들이 베데스다 주위에서 떠나지 못하고
그 기약 없는 '가끔'만 기다리며 사는
종교중독자가 되게 한 것은 아닐까.
요행히 먼저 그 성공 같아 보이는 연못에 뛰어든 자를
무턱대고 하나님의 복 받은 자로 인정하던 곳,
그리하여
가진 자들에게는 (형제의 고통과 필요에 무감케 하는) 마취제를
못 가진 자에게는 (피안과 낙원의 보상만을 갈망하게 하는) 진통제를 투여하여 종교적 희망고문을 가하던 곳,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실 때
다른 형제보다 먼저 자기 자신만을, 자기 자식만을
못에 넣어달라고 요구하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못,
나만, 내 가족만, 내 교회만, 내 나라만 독점하는 예수로 만드는
천박한 기도를 믿음의 기도라고 가르친 곳,
그래서
결국 얻을 것 다 얻고나서는 배은망덕하게도
"저 사람이 내가 안식일을 어기도록 사주한 예수란 사람이오"
하며 그를 '팽'시키는 곳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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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예수를 그렇게 모질고 탐욕스럽고
이미 가지고 누리고 있는 자들의 기득권을
악착 같이 옹호하는 자로 만들었으니
오늘 주님이 세상에서 외면당하고
심지어 조롱과 냉소의 대상이 된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
내가 대접하지 않는 그분을
누가 대접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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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기려고, 더 가지려고, 더 높아지려고, 더 빨리 가려고
안달하는 나 때문에
주님은 오늘도 쉬지 못하신다.
우리가 예수님만을 '항상' 찾아가
더불어 '쉼'을 누릴 수 있는 '자비의 집'
베데스다로 인정할 때
그래서 그 쉼을 나누는 사람이 될 때
주님도 고른 숨을 쉬시며
잠꼬대 하면서
낮잠을 즐기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나님을 안식일도 없이 일하게 만든 것은
일을 우상화 한 우리 자신이다.
음식의 거세가 금식이고
생식기의 거세가 할례라면
일의 거세가 안식일이고
땅의 거세가 지계표 이동 금지다.
내가 창조주가 되기를 거절하고
절대의존적 존재인 피조물이 되는 일이 안식이고
그것이 사랑의 출발이다.
진정한 사랑은 안식의 사람이 되는 것이고
안식을 나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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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1-18이 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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