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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대 합리주의의 싸움
1127년 김부식이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거기에서 그는 송나라가 망해가는 모습을 목도했다. 송나라(북송)의 휘종과 흠종은 금나라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적병을 군사로서 막아야 하는데 그들은 그럴 군사가 없었다. 도교적 신비주의에 흠뻑 젖어있던 휘종과 흠종, 그리고 대신들은 호언장담하는 도사 곽경 이라는 자에게 수도 경비를 맡겼다. 군사가 아니라 도술로서 적병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결과는 비참했다. 송나라는 망하고 휘종과 흠종을 비롯한 왕족 470여명과 3천명의 대신들은 금나라에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나마 흠종의 동생 조구가 간신히 남으로 도망하여 남송을 세우게 된 것이다.
송나라의 몰락을 현장에서 보고 돌아왔는데 고려의 형편은 어떠했던가? 송나라처럼 고려에도 풍수지리설과 도참설, 음양오행설 등의 신비사상이 유행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묘청과 정지상, 백수한 등이었다. 그들은 합리적 근거가 없고 믿을 수도 없는 신비적인 주장으로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자고 주장하였다. 그곳에 궁궐을 짓고 천도하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고 금나라도 저절로 항복할 것이며, 그밖에 많은 나라가 와서 조공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자신들의 주장이 먹혀들지 않자 여러 가지 술수로 뜻을 관철하려 하였으나 그나마도 어려워지자 평양을 중심으로 난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신채호 선생은 묘청의 난을 “조선 역사 일천년래 제일대사건” 이라 하면서 묘청과 김부식의 대립을 “낭가(郎家)와 불교 양가 대 유교의 싸움이며, 국풍파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라고 하였으나 실은 “신비주의대 합리주의”의 싸움이며 혼란한 시류에 부합하여 권력을 잡고자 하는 이들과 이를 저지하고자 하는 이들의 권력싸움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엄혹한 식민지시대에 초라해질 대로 초라해진 우리민족의 기상을 살리고자 고군분투했던 신채호선생의 눈에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정한 묘청은 참으로 귀감이 될 만한 인물이었고 그의 몰락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사건이었을 것이지만 그것은 바램일 뿐 현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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