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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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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2장 1절: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보통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교회부흥으로 본다.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로 부흥이 된 건지, 아니면 하나님의 본질이 아닌 이질로써 세상적인 미신적인 프로그램에 의한 장기자랑에 의해서 부흥이 된 건지 잘 살펴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오늘날 속화된 교인들처럼 목사들처럼 교회부흥을 그렇게 보는 것이냐?
교회라고 할 때 하나님의 의사단일에 맞추어진 것을 무형교회라고 한다. 신앙중심 마음중심 소원 목적이 하나님의 의사단일에 적중성으로 맞추어진 것을 무형교회라고 한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모든 소원 목적 취미 추구성 지향성이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들어간 것도 있고, 안 들어간 것도 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 속에도 이질이 있는 것이다.
교회 목사님의 신앙이라는 원 줄기가 세상으로 나가 있으면, 세상 쪽으로 소원 목적을 품고 나가 있으면 그 교회의 각 교인들이 아무리 도덕성이 좋고 해도 그것은 이질이라고 한다. 교회 전체적으로 보면 이건 큰일 날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고쳐졌으면 희망이 있는 거다. 자꾸 고쳐갈 수가 있는 거니까. 그런데 그렇게 볼 줄을 모르고 교인들도 그렇고,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그렇고 교회에 사람이 많으면 그 교회가 부흥이 된 것으로만 본다. 이게 문제다. 그 교회가 잘못됐다고 하는 건 나중 문제고 교회를 그런 시각으로 보는 그 자체가 기준 척도가 잘못됐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세상 속화된 교인들처럼 교회를 그렇게 보시지 않고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고 당부를 한다. 그러면 외식이 뭐냐? 껍데기 운동. 성경구절로 엮어나가면 껍데기가 돼버린다. 이걸 꼭 알아야 한다.
‘어떤 말끝에 성경구절을 붙이느냐’에 따라서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서 성전을 건축하라고 하는 것이 성경에 있는데, 성전은 온 교회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 척도에 그 설계에 맞추어지는 것이 신령한 성전이다. 그 성전을 만들라는 의미로써 그 성경이 있는 것이다.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성령님께서 거하실 신령한 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육에 속한, 세상에 속한 인도자들은 가르치기를 예배당 집을 건축을 하면서 그걸 성전이라고 한다.
신령한 성전은 하늘에 속한 것이고, 예배당은 땅에 속한 것이다. 예배당은 교인들이 모여서 예배를 할 수 있는 하나의 처소이다. 그러나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받는 장소라는 의미에서 예배당이 하나님 앞에 성물이 된다. 거룩하게 쓰임이 되는 그런 면으로 들어가 있다. 그러나 성전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인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예배당을 말하자면 다른 용도로 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예배당을 다른 용도로 쓰는 사람들이 참 많다. 예배당은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만 사용하고 그 외에 다른 일들은 가능하면 다른 장소에서 하는 게 바람직하다. 물론 예배당이 우상시되는 건 아니지만 가능한 한 예배당은 성도들이 모이는 장소로 깨끗하게 쓰여져야지 이상한 사람들이 들어와서 쏘장이 되고 만담장이 되고 하면 사람들의 인식이 난잡해진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은 성령님이 거하시는 전이기 때문에 몸을 깨끗하게 거룩하게 구별되게 써야 한다. 자기 몸이 기쁨을 가지더라도 말씀에 의한 그 정신 사상에서 춤도 나올 수 있고 노래도 나올 수 있는 거지만 진리의 깨달음이 아닌 다른 곳으로부터 기쁨을 얻어서 하나님보다 늘 그 재미로 살려고 하는 것은 벌써 달라졌다.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고 했는데, 누룩은 부풀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견적 가식적 눈에 보이는 위주로 행동 활동을 강조하는 이 정신이 들어가서 사람 자기 속에서 그 정신으로 부풀려서 나가는 것을 주의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이 들어있고, 그 정신 사상 소원 목적 모든 취미성이 천국 쪽으로 부풀리는 그 누룩이 돼야 하는데 그게 아닌 땅 쪽으로, 세상 쪽으로 부풀리는 것을 주의하라 그 말이다.
무리라 할 때는 제각각 소원 목적이 다르고 취미도 다르고 구하는 것도 다르다. 그러니까 오구잡탱이로 많은 무리가 모여진 것은 부흥이 아니고, 어떤 계기 즉, 사단의 시험이 들어가면 산산조각이 나버린다.
교회는 목사에게 의사단일로 맞추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의사단일 쪽으로 맞추는 것이다. 목사에다 맞추면 나중에 싸움판이 난다. 인본주의가 된다. 오늘날 교회가 그래서 싸움이 나고 야단법석이 나는 거다. 교회는 하나님의 의사단일에 밀착을 시켜야 한다. 그래야 아닌 말로 목사가 죽더라도 성도 하나마다 하나님의 단일로 살아갈 수가 있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들이 자기 식으로 따라오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건 못쓴다.
목자를 따라간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건데, 주님의 양떼들은 주님을 따라간다. 그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그 말씀이 있기 때문에 따라가는 거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이 없으면 예수를 따라 갈 필요가 없는 거다. 그러니까 말씀이 먼저 위주요 기준이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의 말씀도 없는데도 ‘아이고 우리 목사님’ 한다. 그렇게 따르는 것은 못 쓴다. 이건 인본주의요, 큰 시험에 들어가게 된다. 사람 못 쓰게 된다.
많은 무리가 모여진 그 속에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할 것 없이 모두가 제각각 다르다. 생각도 다르고 생활방식도 다르고 성격도 성질도 다 다르다. 배운 것도 각자가 다 다르니까 주장도 다 다르다. 그래서 많은 무리들 속에는 언제든지 의견대립이나 소동이나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잠재해 있는 거다.
대전에서 공부하는(주-매 주 정례적으로 김경형목사님이 진행하는 성경 및 신학공부 모임) 목사님들 중에는 진리를 받는 것 같으나 속은 딴 게 있을 수도 있다. 왜 그러냐? 나를 스승으로 모신다면 모든 면에서 의논이 들어가야 하는 건데 일을 먼저 저질러 놓고 보고가 들어온다. 이게 뭐냐? 이렇게 되면 앞으로 간섭해줄 게 못 되는 거다. 그러니까 사람이 많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분쟁이 나면 걷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먼저 주의할 것을 말씀을 한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누룩은 부풀리는 것. 부풀리는 소리가 많다. 가령 ‘한국은 세계로!!!!’ 이거는 부풀리는 소리다. 그 속에 담겨있는 사상을 알아야 한다. 교회 안에서 부흥회 때 청년들이 좀 있으면 ‘한국의 청년들아!!!’ 하면서 부풀릴 수가 있는 거다. 그러면 그 소리를 듣고 각자가 다 사명감을 받는 거다. 사명감을 받아서 막 나가는 거다.
이건 잘못됐다. ‘재미있다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일생이 그만 망가진다. 사람이 사는 각자의 인생의 삶의 노정에는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만드실 때 구원노정을 넣어서 지은 것이다. 구원을 염두에 두고 인간 자기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감정을 좇아 그렇게 나가는 것은 구원의 길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존재 자체가 평생을 살아도 그림자처럼 살게 되는 거다. 그림자는 실물과 활동은 똑같이 하지만 그림자가 빛 앞에 있으면 그 그림자는 실물의 뒤로 간다. 그런데 그림자와 같은 사람이 있다. 우리는 부풀어 오르는 것을 정말 조심해야 한다.
‘외식을 주의하라.’ 외식은 위선이고, 배우들의 연극이다. 연극도 위선이다. 누룩은 밀가루 반죽이나 술을 만들 때 부풀어 오르게 하는 데 쓴다. 그리고 삭힌다. 소다역할을 한다.
누룩과 외식 이 두 가지가 사람 속에 있으면 즉, 예수 믿으면서도 말하자면 허풍성 영웅성 허영심이 들어가면 그건 다 세상 쪽으로 향해져 있는 것인데 ‘사명감을 받았다느니’ 하며 세상에서 어떤 큰일을 이루려고 하게 된다. 예수님은 ‘너 사명 받아라’ 이런 게 아니라 ‘사람 좀 만들어지자’ 하는 것인데 외식자들이 젊은이들을 보고 ‘너 사명 받았다’ 하며 종교 세상적인 쪽으로 내몰게 되면 사람 망해먹는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 목사를 잘못 만난 것이다. 그런 희한한 꼴을 많이 본다.
교회 인도자는 교인들에게 첫째는 옳은 지식을 줘야 한다. 그러면 옳은 가정생활, 옳은 사회생활을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옳은 지식이 아니라 감정과 흥분을 일으켜서 허영심 영웅성 허풍성을 집어넣으니 사람이 못 쓴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인 즉은 신앙이라고 하면서 세상정신을 잔뜩 불어넣는 가르침을 주의하라는 것이다.
바리새파와 사두개 교인들은 자기들 스스로가 잘못된 것을 의식하면서도 일부러 ‘우리가 외식신앙을 넣어주자.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도록 하자’ 그렇게 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들의 외식을 조심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원 궁극적 신령세계에서의 영능의 실력적인 결과를 미리 염두에 두시고 그들의 교훈을 따라 살면 결과가 그렇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되어질 결과를 미리 내다보고 그들의 신앙사상은 사단 마귀가 꾀이는 짓과 똑같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가르침은 임시적인 이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영원히 허영심 허풍성이다.
하나님이 알아주지 않는, 그러면서 세상이 알아주는 이게 다 외식이다. 예를 들면 우리교회에는 여기저기에서 진리의 말씀을 듣기 원해서 오신 분들이 많은데, 이걸 보고서 만일 다른 교인들이 진리가 좋아서 모인 것은 모른 채 ‘저 교회 목사가 장기가 좋은가 보다’ 하고 본다면 내가 나쁜 사람이 되는 거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보는 척도 기준이 문제냐? 보는 척도 기준이 문제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보고서 ‘어느 교회에 사람이 많이 모였구나. 부흥됐구나’ 하고 보는 눈은 이미 비뚤어졌다. 설교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가 안 나온다면 그 교회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해도 그건 무리들에 불과하다. 예수님은 그렇게 보신다. 그냥 무리로 보신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 목적인 우리의 속성이 인격성이 성품이 하나님처럼 온전케 되는 이것을 모르면 교회 안에서 마귀가 가르치는 수법을 모르게 된다. 마귀는 교회 안에서 성경구절을 가지고 교인들을 통째로 먹어버린다. 이단자들이 그 이치를 알기 때문에 목사부터 넘어뜨린다. 목사가 그들의 말대로 하게 되면 그 교회 교인들은 자동적으로 그 목사를 따라간다.
뱀이 어금니가 있느냐? 없다. 그러니까 안 씹고 삼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뱀이 개구리나 쥐를 잡아먹을 때 발가락부터 먹는 게 아니라 머리부터 먹는다. 우리에게 그런 것을 통해 마귀의 수법을 말해준다. 즉 거짓 자들이나 이단자들이나 세상에 속한 목사들이 우리교회를 집어삼키려면 먼저 목사부터 집어삼킨다. 그 교회 인도자부터 삼켜야 한다. 그러면 교인들은 그 목사를 따라가는 거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교회 안에서 힘을 쓰는 교인들을 하나하나 잡아먹는다. 그러면 교회 안에 분파가 생긴다. 마귀의 수법을 알아라.
그런데 우리 입장에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이 아닌 교회는 성경에 보면 아예 밖으로 나가있는 성전 밖의 교회다. 생명권 밖의, 진리통치 밖의 교회다. 우리에게는 그건 값어치가 없다. 그러니까 마귀가 그런 교회에서 별 희한한 짓을 다 해 먹는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는 깨닫도록 해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영생권 안으로 넣어야 한다. 잘 깨닫게 해야 한다. 옳고 그른 것이 진리지식에 의해서 판단이 나야 한다. 그러니까 지식을 주는 자가 옳은 지식이라야 한다. 그런데 이 말이 ‘우리교회는 헌금도 강요를 안 하고, 뭣도 안 하고 하기 때문에 옳다’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다. 성경을 가지고 지식적으로 사람의 속이, 정신이 구별이 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걸 보고 ‘저 교회는 나쁘다’ 하거나, 그런 걸 가지고 남의 흉허물을 잡으면서 ‘우리교회는 안 그렇다’ 하는 것도 안 된다. 전도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마귀가 에덴동산 안에 들어와서 꾀였다. 그런 것처럼 마귀가 교회 안에 들어와서 교인들을 꾀이려면 성경을 가지고 목사를 붙잡고 해야 한다. 그래서 마귀수법이 언제든지 거짓 종들을 붙잡고 ‘세상 쪽으로 이루라’ 하며 세상의 영광 쪽으로 몰고 가는 식으로 역사를 한다.
그렇게 해서 설령 그 세상영광을 마귀가 사람을 통해서 주었다고 할지라도 땅의 그 영광을 얼마나 가지고 살 수가 있겠느냐? 순간이요 잠시다. 영원히 가는 게 아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영능의 실력으로 얻어지는 영광이기 때문에 이 영광성은 영원히 간다. 이런 걸 모르면 자기가 누구의 역사에 등용되고 이용되는 줄도 모른다. 이용되고 있으면서도 이용되는 줄을 모른다.
마귀가 뱀의 입을 열어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할 때 그 순간 그들이 스스로 ‘따먹는 것이 옳다’ 하며 넘어간 것이냐, 하와의 마음속에서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며 손이 자꾸 가서 따먹은 것이냐, 아니면 소원이 돼서 딴 것이냐? 소원이 돼서 딴 것이다. 그런데 자기는 옳다고 하면서 그렇게 한 것이 저주받고 타락되고 인류 전체에게 천추만대에 두고두고 가슴을 치며 후회된 일이 아니었더냐? 하나님 앞에 말씀을 거스르는 하나가 천추만대에 한이 된다.
아브라함은 다 잘 했는데 뭘 안 쪼갰느냐? 작은 새 하나를 안 쪼갰다. 작은 새니까 ‘이까짓 거 뭐 가를 것이나 있나?’ 하고 안 쪼갰다. 그 후로 그 즉시로 하나님의 저주가 내렸다. ‘너의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400년간 이방인의 손에서 살리라.’
아브라함 하나가 죄를 지은 것이지 그의 후손은 그런 죄를 안 지었는데 왜 후손들이 노예로 살아야 하느냐? 왜 그런 표현으로 말씀을 하실까? 그 소리를 들은 아브라함이 새를 쪼개지 못한 그것이 얼마나 한이 될까? 그런데 우리 모두가 자기의 잘못을 용서를 잘 해 주고 남의 잘못은 그냥 넘어갈 일인데도, 용서할만한 일인데도 ‘죽일 놈 살릴 놈’ 한다.
우리는 남의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자기를 검토해 보고 자기를 살피는 게 옳다. 그리고 ‘나는 저런 잘못을 안 저질렀지만 다른 면에 잘못이 있다’ 하면서 남의 잘못을 내 잘못으로 여기고 하나님 앞에 깨닫고 고치고 가는 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인물이다. 정말 폭 넓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다. 이 사람이 지도자감이다. 지도자가 되려면 남의 사정도 알아야 한다. 자기 쪽에서 일방적으로 공격하면 안 된다. 그런 성격도 고쳐야 하고 저런 성질도 고쳐야 한다.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이 하는 것의 결과가 어떻게 된다고 하는 것을 알았다면 자기 지식으로, 자기 눈으로 보는 면에서 보암직 먹음직 탐스럽게 보인다고 해서 그것을 따먹었겠느냐? 오늘날 자기가 그 에덴동산에 아담 하와와 같이 있다고 한다면 자기는 안 따먹을 것 같으냐? 똑같다. 왜 똑같으냐? 지구를 축소시키면 오늘날 이 땅에 두 가지 지식이 있는데 즉, 교회 안에 크게 보면 두 가지 지식이 있는데, 생명과가 아니면 선악과의 가르침의 두 지식이 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을 보면 생명과를 먹을 줄 아느냐? ‘예수 믿어 세상에서 부자 되고 병 낫고 세상에서 만사형통’ 하는 그리로 많이 치우쳤다. 그러니 선악과를 따먹을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런데 그게 선악과인줄을 아느냐? 모르고 있다.
선악과는 눈에 안 보인다. 생명과도 눈에 안 보인다. ‘너희들 앞에 생명 길이 있고, 사망 길이 있다’ 교훈으로 그렇게 들어가는 건데 이건 눈에 안 보인다. 그러나 ‘생명 길, 넓은 길’ 하는 성격 성질은 보인다. 교훈을 하는 사상을 보면 보인다.
생명 길 좁은 길은 찾는 이가 적고 가기가 힘들다. 그래서 ‘길이 아닌가 보다. 길이 없나 보다’ 한다. 온 교회가 하나님의 의사단일적으로 나가는 이것이 생명 길 좁은 길인데 이 길을 가는 교인들이 별로 없다. 이 사람 저 사람들이 다 자랑하고 좋아하는 세상 물질적인 성악과의 길로 교회가 단체적으로 막 간다. 이게 눈에 보이느냐?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생명 길 사망 길을 아느냐? 믿는 사람이라야 그걸 아는 건데, 교인들이 정신적 교훈적으로 신앙 사상적으로 이걸 모르니까 자기가 예수 믿고 가는 길이 생명 길인지, 세상 넓은 길 사망 길인 줄을 모른다.
어쨌든 아담과 하와의 그 결과를 그들의 인생 삶으로, 또는 시대적 역사로 보여줬는데도 오늘날 자기가 그걸 보면서 현실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안 믿는 사람들과 똑같은 자기 주관적 지식으로 예수님을 끌어다가 자기 식으로 믿고 있으니 영의 눈이 밝은 사람이 이것을 보면 ‘네 인격이 망하는구나’ 하게 된다 왜? 저주받고 타락된 지식을 자꾸 먹으니까 그 사람은 망하는 거는 빤한 거다. 천 날 만 날 그렇게 예수를 믿어도 신앙 믿음이라는 깨달음은 없는 것이다. 안 된다. 사람 망하는 것을 모르고 자기 세상살이 사업을 이뤄 달라고 하고 있으니 이것은 아담 하와가 따먹고 저주받고 타락된 선악과 먹은 사상과 똑같은 질이다.
지금 자기가 하나님의 뜻으로 살고 있는지, 자기의 주관적으로 살고 있는지를 생각을 해야 한다. 남의 얘기가 아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의 자기의 소원 목적과, 예수님을 믿은 후의 자기의 소원 목적과, 또한 예수 믿고서 진리지식을 안 후의 소원 목적이 같을 수가 없다. 같다면 이건 못 깨달은 것이다. 예수 믿기 전이나 후나 진리지식을 받은 후나 여전히 세상 것에 대한 소원 목적이란다면 자기는 여전히 마귀의 꾀임에 선악과를 먹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 경우는 자기 교회 목사의 설교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의 문제다.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내가 주는 말은 영을 위해 주는 말이다. 영의 말이다’ 하니까 무리들이 다 도망을 갔다. 그러니까 그들이 육으로 알아 들었다는 것이다. 세상살이 잘 되는 쪽으로 알아 들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너희들도 가려느냐?’ 하니까 베드로가 한 말이 ‘영생의 말씀이 있사오니 내가 어디로 가리이까’ 했다. 그러니까 무리들이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들을 때 ‘목적을 어디에 두고 들었구나’ 하는 게 금방 나오는 거다.
대전에서 가르칠 때 목사님들이 장감성 여러 곳에서 왔는데 그 분들이 진리말씀을 들을 때 가만 보면 순복음교회 목사님들이 아멘소리를 제일 많이 한다. 아멘을 잘 하니까 은혜를 받는 것 같다. 그런데 깨달아서 아멘이냐, 아니면 자기 식에 끌어 붙여서 자기들 생각에 옳으니까 아멘이냐? 이게 있는 거다.
그런데 그 분들이 어디서 다 튕겨져 버렸느냐 하니 내가 예언 방언에 대해 말을 하니까 다 도망을 가버렸다. 그렇다면 내가 다른 말씀을 전할 때는 그 말씀이 옳은 거고, 예언 방언에 대해 말할 때는 내가 귀신이 들려서 한 말이지? 그러니까 그들이 다 도망을 간 거지? 내가 하는 말은 진리이치를 두고 하는 말인데, 그렇다면 예언 방언에 대해 하는 말에도 아멘이 돼야 하는데 그만 이상하게 들리는 거다.
성경에 있는 예언 방언은 그대로 믿는 거고, 그 속에는 우리의 구원의 이치와 도리가 들어 있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자기의 예언 방언은 구원의 이치와 도리가 들어 있느냐 하면 없다. 마귀의 방언, 귀신의 방언이 많다. 그런데 내가 하는 말을 듣고 그들이 말하기를 ‘어? 예언 방언이 성경에도 있는데 그걸 부정을 하네’ 한다. 그래, 예언 방언이 성경에 있다는 말은 맞다. 내가 성경에 있는 그걸 부정하는 게 아니라 오늘날 잘못돼 있는 그걸 지적을 하는 거다. 그런데 다 도망을 갔다.
방언이 문제가 아니라, 예언이 문제가 아니라 성경을 한 이치 한 이치 바로 알아야 거기에서 예언도 나오고 방언도 나오는 거다. 진리지식을 모르는 예언 방언은 무당과 똑같은 거다. 기독교 신앙은 기준이 있는 거다. 그런데 그걸 모르는 거다. 그러니 세상에는 여러 가지 사건이 막 몰아치는 곳인데, 성경은 그걸 헤쳐 나갈 수 있는 게 다 들어 있는 건데 그렇게 깨달으려고는 하지 않고 그걸 해결해 달라고 금식기도니 철야기도니 하고 있으니 이건 억지요 데모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니 내가 말을 안 해도 척 아신다. 그런 분인데 내 사정을 잘 아는 분이 왜 안 주느냐? 그렇다면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가로막힌 게 있다는 것이다. 그 가로막힌 것을 헐어야 되겠는데, 인간 자기 주관성으로 된 그 신앙이 가로막힌 것인 줄을 모른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고집인지?
그래서 깨달으면서 바뀌며 바로 들어오게 하려면 그 고집을 꺾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디까지 치고 들어오느냐? 사람의 몸까지 치고 들어온다. 병원침대에까지 눕혀놔도 그 고집을 깨지를 못한다면 너는 짐승이다. 그래서 오늘날 거짓된 교회가 많은 것이다.
가정으로 보면 진리를 따른다고 하는 자기가 있고, 또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세상정신으로 믿는 가족도 있고, 또 식구들 중에는 안 믿는 식구도 있다. 그렇다면 이 가족들이 어떤 사람들끼리 한 편이 괴겠느냐? 진리를 따른다고 하는 자기 편은 없고 종교성을 가지고 세상적으로 믿는 가족이 안 믿는 사람과 단짝이 된다. 그래서 그들이 바로 믿는 자기를 공격하게 돼 있다. 원리가 그렇다.
그래서 인간표현으로 말한다면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내가 그들 쪽으로 가면 되는 거냐? 이렇게 되면 그들 편이 되는 거고, 내 편이 되게 하는 것은 그들을 진리로 깨닫게 해서 주님께 밀착시키는 것뿐이다. 그렇게 하는 방편은 먹는 것으로, 또는 대화로 유도하며 예수님께 데리고 가는 거다. 진리로 안 믿는다고 해서 무턱대고 끊는 건 안 된다. 왜냐? 예수 믿는 나에게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비뚤어진 게 있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끊지 못하는 거다. 내가 바로 서면서 서서히 깨닫도록 하면서 가는 거다.
에덴동산에 생명과와 선악과가 있었듯이 오늘날도 교회 안에 여전히 생명과를 먹는 가르침과 선악과를 먹는 가르침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거짓 종이 교회 안에 있느냐, 불교 속에 있느냐? 교회 안에 있다. 이단자가 기독교회 안에 있느냐, 미신을 섬기는 거기에 있느냐? 교회 안에 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 크게 보면 생명과 먹는 것과 선악과 먹는 것의 두 지식이 있다. 선악과는 세상 소원 목적으로 들어있고, 생명과는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닮고자 하는 면의 이치가 들어있다. 그 결과는 나오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과를 먹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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