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고전4:3-5 |
---|---|
설교자 : | 이익환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www.telavivchurch.org |
2018년 5월 26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고린도전서 4 마인드버그를 제거하라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전4:3-5)
우리는 하루에도 많은 판단을 하면서 산다. 판단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판단을 하면서 우리가 할 행동들을 결정한다. 우리가 내리는 판단들은 과연 얼마나 옳을까? 워싱턴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인 앤서니 그린월드는 <마인드버그>라는 책을 통해 ‘사람들 안에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편견과 고정관념이 숨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편견은 사고의 오류나 정신의 오작동을 일으키는데, 그것이 바로 ‘마인드버그(mindbug)’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마인드버그가 사회와 문화의 영향으로 발생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쳐 올바른 판단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을 보면 고린도교회 문제의 핵심이 바로 교인들 안에 있었던 ‘마인드버그’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당시 고린도 사회와 문화적인 영향 때문에 고린도교회 교인들 안에도 고정관념이 생긴다. 그 영향으로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영적 지도자들을 판단하였고 그로 인해 고린도 교회 안에 분쟁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마음 속에 어떠한 ‘마인드버그’가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어떠한 ‘마인드버그’가 있는지도 생각해보고자 한다. 편견과 잘못된 판단으로 ‘마인드버그’가 생기면 그것은 자신 뿐만 아니라 공동체 모두가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마인드버그’를 제거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을 심게 되는 은혜가 있길 바란다.
고전 :1-2,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자신을 비롯한 교회 사역자들을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기라고 당부한다. 일꾼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휘페레테스’다. 로마시대 배의 밑창에서 노를 젓는 노예를 말한다. 영화 <벤허>를 보면 벤허가 그러한 노예가 되어 배를 젓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가장 천한 계급의 노예였다. 그러한 노예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채찍질을 당하면 그것을 맞아가며 더 열심히 노를 저어야만 한다. 그러한 삶을 동경하며 노예를 따르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을 그러한 노예로 여기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왜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자신을 ‘그리스도의 노예’로 여기라고 명령한 것일까?
바울 당시 고린도에는 스토아 학파의 철학이 유행이었다. 스토아 학파의 핵심 사상은 한마디로 ‘불행은 결코 우리의 행복을 감소시킬 수 없다’라는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스토아 철학은 불행을 이기고 행복을 추구하는 철학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철학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떤 지도자가 더 지혜로운 말을 하는지에 따라 사람들은 그 지도자를 따르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고린도교회 안에 그대로 흘러 들어왔다. 교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영적지도자에게는 충성을 보였지만, 자신이 싫어하는 지도자는 판단하며 비판하였다. 바울은 이처럼 특정 사람을 높이며 사람에게 충성을 바치는 교인들의 성향을 고린도교회의 하나됨을 방해하는 핵심 이유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포함한 다른 모든 사역자들을 가장 비천한 계급인 ‘일꾼’으로 여기라고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한 자신과 교회 사역자들을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기라고 말한다. 여기서 ‘맡은 자’는 헬라어로 ‘오이코노모스’다. 주인의 집을 관리하는 관리인, 주인이 맡겨준 양식을 때에 따라 공급하는 집사를 의미한다. 성경을 보면 바울은 심는 역할을 맡았고 아볼로는 물을 주는 역할을 맡았다. 고전 3:6-8,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이 말에 의하면 바울과 아볼로는 하나님의 동역자였다. 그런데 고린도교인들은 자신들의 선호도에 따라 지도자를 평가했다. 그리고 서로 비판하며 반목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비롯하여 다른 사역자들이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하는 집사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성공’이 아니라 ‘충성’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역자들을 높이려는 태도를 갖지 말고, 그들을 다만 하나님이 부탁하신 것을 ‘맡은 자’로 여기라고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위대한 사도로 평가받는 바울은 정작 자신이 개척한 고린도교회에서는 교인들에 의해 엄청 판단을 받았다. 고후 10:10,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바울은 그들에 의해 종종 그의 사도권을 의심받았다. 그리고 그의 설교도 시원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평가와 판단은 주로 아볼로파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아볼로는 외모도 뛰어났고 웅변 실력도 탁월했다. 당대 철학적인 지식도 많아서 그것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기술도 탁월했다. 아볼로의 능력에 심취한 교인들은 상대적으로 바울의 말이 시원치 않다고 평가한 것이다. 이러한 평가에 대해 바울의 반응은 어땠을까?
고전4:3-4,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 판단 받는 일을 작은 일로 여겼다. 자신도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주변사람의 판단을 아랑곳하지 않는 독불장군이라서 일까? ‘모든 판단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판단무용론자이라서 일까?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자신의 역할에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평가를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판단하실 분은 오직 주님이시기에 그는 다른 사람의 판단과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판단’이라는 마인드버그에 걸려 하나되지 못하고 여러 분파로 나누어져 있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한다. 고전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바울은 상당히 획기적인 제안을 한다. 주님이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님의 심판이 있게 될 종말까지 판단을 보류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때가 되어서 각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정당한 판단과 심판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실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판단하는 마음 때문에 힘들어진다. 판단하는 렌즈로 사람을 보기 시작하면 그 관계에선 더 이상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 그것은 누구의 불행일까? 모두의 불행이다. 우리가 주님이 오실 때까지 정말 판단을 보류할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선악간에 옳고 그름을 알게 된 아담의 후예이기 때문에 우리는 판단을 멈추는게 쉽지 않다. 그러나 판단에 대한 주권은 나에게 있지 않다. 주님께 있다. 주님이 판단하지 말라고 하시면 우리는 판단을 멈춰야 하는 것이다. 원수도 사랑하라면 사랑해야 하는 것이 주를 따르는 우리의 몫이다. 여러분은 남을 판단할 수 있는 권리도 주님께 드릴 의향이 있는가?
세상에서는 능력 있는 사람, 성공한 사람을 높이 평가한다. 그래서 우리 역시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도 그러한 세상적인 가치기준에 많이 좌우된다. 그러나 모르는 일이다. 각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세상의 기준과는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어떠한 판결이 내려질지는 세상 끝에 가봐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 안에 있는 편견을 제거하기 원했다. 그래서 많은 판단을 하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
고전 4:8,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표준 새번역으로도 읽어보겠다.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제쳐놓고 왕이나 된 듯이 행세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진정 왕처럼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왕노릇 하게 되면, 좋겠습니다.” 당시 고린도는 무역이 발달한 항구도시였다. 경제적으로 번창한 곳이었다. 그런 도시에서 사람들은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 역시 그러한 도시의 영향을 받았다. 부유한 삶에 만족했고 교회 사역자들 없이도 왕이 된 듯 행세했다. 사도를 사도로 여기지도 않고 그들에게 배우려들지도 않으며 스스로 만족해 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말한다. “여러분이 진정 왕처럼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왕노릇 하게 되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누굴까? 대표적으로 바울과 아볼로를 말한다. 그들은 서로 다른 편이 아니라 ‘우리’였던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들처럼 정말로 왕노릇하길 원했다. 사람을 판단하며 뒷짐지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하며 그 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이 되길 원했던 것이다.
고전 4: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당시 스토아 철학자들은 고난을 견뎌냄으로 신과 인간의 칭송을 얻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비롯한 교회 사역자들이 결국 세상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는 존재라고 말한다. 로마 시대 원형극장에서 제일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은 가장 저주받은 죄수들이었다. 그들은 맹수와 싸우다가 죽임을 당한다. 바울은 자신과 교회 사역자들이 마지막에 등장하는 가장 저주받은 자들이라고 말한다. 즉 자신들은 세상의 영광을 얻는 직분이 아니라 가장 극심한 고난과 멸시의 자리로 이끌리는 존재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전 4:10-13,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상당한 풍자다. 바울은 교회의 리더십은 세상에서 칭송받는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십자가의 자리로 이끌리는 자리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그리스인이 가장 싫어했던 것이 두가지였다고 한다. 하나는 ‘먼지’고 다른 하나는 ‘때’였다 한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자신이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바울은 모욕을 당해도 축복하고, 박해를 받아도 참고, 비방을 받아도 권면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면서 16절에서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한다. 세상의 영광과 칭송을 구하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어 십자가의 길을 가는 자신을 본받으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그런 바울을 본받고 싶은가? 아마도 고개가 절로 흔들릴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기보다는 옆으로 가로 젓고 싶을 것이다.
성경학자인 리차드 헤이는 바울 당시 고린도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 스토아주의라면, 오늘날 21세기 서구 문화에 가득한 것은 스토아주의가 아니라 헤도니즘이라고 말한다. 헤도니즘은 쾌락주의를 말한다. 즉, 가장 최선의 선은 개인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는 쾌락주의가 교회에 침투하여 미묘한 방법으로 교회를 타락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교회 사역의 목적이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하고 편안하게 하는 데 맞춰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사람들은 십자가의 연약함을 싫어한다. 십자가를 실패로 여긴다. 그래서 십자가에 관한 설교보다는 번영과 행복에 관한 설교에 열광한다. 십자가의 설교는 사람의 영광이 없는 길을 얘기하는 것이다. 고난의 길을 가라고 도전하는 것이다. 수치와 모욕과 희생을 당연히 여기는 좁은 길을 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부담을 갖게 되는 설교다. 반면 번영을 설교하는 교회일수록 사람들이 몰린다. 미국의 경우 스테디움을 구입하거나, 방송국을 운영하기도 한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형교회, 성공한 목사의 설교가 좋은 설교라는 인식은 착각일 수 있다. 하나님의 기준은 다를 수 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복음의 본질인 십자가의 헌신과 희생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십자가 대신 성공과 행복이라는 시대정신으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과 참 자유를 위해 선택하신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사실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는 너무도 무능력해 보인다. 그러나 그 무능력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났다. 십자가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너무도 연약해 보인다. 그러나 그 연약함에서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게 된다.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 사랑스러운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우리가 사랑스러운 존재라서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럴 자격이 없지만 십자가를 통해 대신 속죄를 이루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는 그렇게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이다. 세상 기준으로 되는 놈은 되고 안 되는 놈은 안되는 곳이 아니다. 모두가 편견 없이, 제한 없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세워질 수 있는 곳이 바로 십자가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봐야 한다. 십자가를 통해서 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모든 상황에 대한 주권자가 예수님이 되야 한다는 것이다. 그 주인되신 예수님 때문에 내가 나를 주장하지 않고 주인의 말을 따르는 것이다. 내가 죽고 예수님만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이 편견으로 대하는 사람들도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봐야 한다. 설교 못하는 목사도 십자가를 통해서 봐야 한다. 나를 힘들게 하는 직장 상사나 동료들도 십자가를 통해 봐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 없이 세상에서 잘나가고 성공하는 것이 오히려 저주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십자가를 통해서 보면 나의 연약함, 다른 사람의 연약함, 교회의 연약함이 오히려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나의 생각과 판단에 영향을 끼치는 세상의 영향력이라는 파도 속에서 십자가라는 기준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세상에 지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 진정한 왕노릇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문화와 가치기준 때문에 어떤 마인드버그가 지금 내 안에 있는지 돌아보길 바란다. 바라기는 그 마인드버그가 제거되길 바란다. 내 안의 편견으로 남을 판단하는 삶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세워주고 살리는 삶이 되길 바란다. 개인의 성공과 가족의 행복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공동체를 세우며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감당하는 성도로 살아가게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결국 최후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잘 했다” 칭찬받는 사람들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